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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士林派]

작성자康大熙|작성시간09.11.08|조회수55 목록 댓글 0

 

 

 

 

                                               사림파[士林派]

 

 

조선 중기의 재야 사류(士類)를 배경으로 한 정치 세력. 16세기 사화기에 훈구파 내지 훈신·척신 계열과 대립한 재야 사류를 배경으로 한 정치 세력이다.

 

〔사림의 기원과 특징〕

 

사림이란 용어는 여말선초 시기에도 간혹 쓰였으나, 무오사화 이후 사화가 거듭되는 가운데 피화자의 집단성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림파란 용어는 근대역사학 성립 후에 비로소 쓰여지기 시작하였다.

이병도(李丙燾)의 ≪국사대관 國史大觀≫에 조선 전기의 문인·학자의 유파를 나누어 훈구파(勳舊派), 절의파(節義派), 사림파, 청담파(淸談派) 등으로 구분한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구분에서 사림파는 훈구파와 대비되는 존재로서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지는 것으로 지적되었다.

즉, 성종대에는 문장·경술(經術)로 영남 일대에서 사종(師宗)의 위치에 있던 김종직(金宗直)을 지지하는 부류로 영남 출신이 다수를 이루었다. 이후 중종대 조광조(趙光祖)의 진출을 계기로 기호지방 출신의 사류도 다수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학문적으로 김종직대에는 아직 사화(詞華 : 문예)에 힘쓰는 문사가 많고 도학자는 적었던 반면, 조광조대 이후에는 도학(道學)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아졌다는 것 등이다.

조선 초기에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을 가리켜 사류, 사족이라고 지칭하던 것이 16세기에 접어들어 사림이란 용어로 그 집단성이 더 부각되었다. 이는 그간 교육제도의 발달로 지배 신분층의 저변인 재지중소지주층의 지식인화가 촉진되고, 또 그들이 관직으로 모두 수용되지 못하더라도 과거제를 통해 일정한 자격을 부여받는 수가 크게 늘어난 결과였다.

사림은 현직의 관인보다 재야의 지식인들을 앞세우는 표현으로, 대과(大科)에 합격해 벼슬에 나아갔다가 퇴직한 부류도 물론 포함되나, 소과 합격자인 생원·진사의 수적 비중이 컸다. 이들의 교육 기회는 관학인 4부학당·향교보다도 사학인 서재(書齋서원(書院)을 통한 경우가 절대적으로 우세하였다.

 

〔학문적 배경〕

 

사림파는 신유학 중에서도 정주성리학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변혁기에서 재지중소지주적 기반을 가지는 사류들은 관료로서보다는 지방 사회에서 향촌지주층로서의 구실을 중요시하였다. 이에 유향소(留鄕所)의 조직을 통해 활동 근거를 마련하는 한편, 송대(宋代) 신유학 가운데서도 향촌 지주의 사회적 구실을 중요시한 정주성리학을 선호하였다.

 

〔사림파의 형성과 정치 활동〕

 

그러나 조선 건국을 계기로 관료제적 중앙집권주의자들이 실권을 장악, 재지지주들은 열세에 처하였다. 그러나 약 1세기를 지나면서 집권 관료제가 많은 모순을 일으키게 되면서 되살아나 사림파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경제적으로 왕조 초기의 과전법(科田法) 단계에서 여러 가지 제약을 받던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가 본격적으로 발달하면서 재지중소지주층의 경제력이 향상된 것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사림파의 정치적 활동으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향촌 질서 재확립과 관련된 일련의 운동이다. 즉, 성종대에 김종직을 필두로 진출했을 때 세조 말에 혁파된 유향소제도를 부활시켜 ≪주례≫의 향사례(鄕射禮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시행하는 중심 기구가 되도록 하였다. 또, 중종대에 조광조를 중심으로 재진출해서는 주자(朱子)가 증손(增損)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고을마다 시행하고자 하였다.

이 일련의 운동은 조선 개창 후에도 농업 기술의 지속적인 발달로 농업 경제력이 신장되고, 이를 바탕으로 농촌 장시의 대두를 비롯한 상·수공업 분야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 농촌 사회가 동요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부에 대한 관료제의 대응이 일으키고 있는 모순을 혁신하려는 현실적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 질서 재확립 운동은 주자가 증손한 여씨향약을 실은 ≪소학≫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으로 확대, ≪소학≫ 실천 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

 

〔사림파의 군주관과 정치관〕

 

사림파는 군주정치에 대한 인식에서도 현저한 변화를 보였다. 왕조 초기의 중앙집권적 왕정체제 아래에서 정치 주체는 어디까지나 천도(天道) 실현의 유일자인 군주였고, 신하는 그 보조자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16세기 사림의 성리학적 군주관은 군주가 진정한 정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신하와 마찬가지로 ‘치인(治人)’을 위한 ‘수기(修己)’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주자의 ≪대학≫ 정신에 근거하는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군주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절대권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후 조선시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왕조 초기의 왕권은 과전(科田)이란 물적 보장을 통해 군주 측의 일방적인 군신 관계가 요구되었다. 반면, 과전이 직전(職田)으로 바뀌고 그것마저 폐기된 16세기에 와서 군신 관계는 신하 측의 자의가 크게 신장되는 차이가 있었다. 군주의 부름이 있어도 신하가 자의적 판단으로 나아가지 않는 사례는 16세기 이후부터 많아졌다.

사림파의 성리학적 정치관은 옳은 인재의 등용을 위해 과거제 보다 천거제를 중시하였다. ‘치인’의 입장, 곧 관인이 되기 위해서는 ‘치인’부터 해야한다는 성리학적 입장에서 과거제는 치인의 성과를 측정하기에 부족한 것이 많았다. 때문에 사림이 공인하는 인재들을 천거로 써야 한다고 하였다. 중종대에 조광조 등이 펼친 현량과(賢良科)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소학≫과 ≪대학≫은 16세기 사림파가 성리학의 목표인 ‘수기치인’의 달성을 위해 가장 중요시한 교과서였다. 그러나 그 세계의 실현을 위한 여러 노력은 훈신·척신 계열의 반발을 받아 사화의 수난을 거듭 받았다.

16세기의 사림은 정치적으로 훈신·척신 계열과 대립하는 관계 속에서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규합되었다. 그러나 16세기 말엽 선조 즉위를 계기로 척신정치가 일단 종식되고 사림의 관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사림 사회는 학연에 따라 여러 정파로 나뉘는 변화를 일으켰다.

흔히 붕당(朋黨)으로 표현되는 이 정파의 분립은 공도(公道)의 실현을 위해 정파간의 상호 견제가 필요하다는 신유학의 새로운 붕당관으로 뒷받침되었다.

 

≪참고문헌≫ 嶺南士林派의 形成(李樹健, 嶺南大學校出版部, 1979)
≪참고문헌≫ 朝鮮前期畿湖士林派의 硏究(李秉烋, 一潮閣, 1984)
≪참고문헌≫ 韓國社會史硏究(李泰鎭, 知識産業社, 1986)
≪참고문헌≫ 朝鮮儒敎社會史論(李泰鎭, 知識産業社, 1989)
≪참고문헌≫ 16世紀 士林派의 薦擧制 强化運動(崔異敦, 韓國學報 54, 1989)
≪참고문헌≫ 16世紀 士林系 官僚의 朋黨論(鄭萬祚, 韓國學論叢 12, 1989)
≪참고문헌≫ 16世紀 郎官權의 成長과 朋黨政治(崔異敦, 奎章閣 12,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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