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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잡지자료 1 (개벽)

작성자山房山(榮國)|작성시간11.04.14|조회수24 목록 댓글 0

 

 

          한국근현대잡지자료

 

잡지명 :  개벽70

발행년월일 :  19260601

기사제목 :   五百年間革命運動

필자 :   金自立 김자립

기사형태 : 논설

 

 

五百年間革命運動 (오백년간의 혁명운동)

 

金自立

무엇보다도 만흔 民擾

漢陽定國한 이후 五百年(지난 庚戌年以後 일은 여긔에 不載)叛革運動一瞥하려 할 때에 몬저 생각나는 것은

첫재 그 歷史는 대개가 王室에서 編修하엿거나 또는 적어도 王室을 중심삼고 編修한 것임으로 根本으로 그와 가튼 民間叛逆에 대하야 記錄踈漏하게 하엿스며

둘재 가튼 政府에 대한 叛逆運動이라 할지라도 五百年間初期 乃至 中期에 잇서„œ는 그 運動動機가 대개로 네가 가진 것을 내가 가져 보겟다하는 王位 또는 기타의 政權爭奪하려는데 잇는 동시에 그 運動이 심히 民衆的이 못되엿슴에 반하야 末期運動은 그 動機救國安民에 잇슴을 발견하게 되는 동시에 그 運動도 스스로 關係를 한 그것이며

셋재 나타난 것보다도 나타나지 아니한 大小民擾想像 以外로 만흠을 발견하게 되는 그것이다. 그러나 이 民擾에 관해서는 도저히 軆系的으로 記錄할 수가 업고 오즉 下層人民이 그 못견딀 不平忿懣端片的으로 표현하다가 그 失敗 犧牲된 것이니라 하는 一言으로써 하는 수 밧게 업는 그것이다.

따라서 以下記錄한 몃 가지는 만흔 叛逆運動 中에서 正史에 나타난 몃 가지를 抄述함에 불과한 것이오 그런 중에는 徒黨的이 아니오 自己一個人當時政治制度에 대한 불평을 품고 一生浪人가티 지내다가47消失된 것을 여긔에 하나도 못싯게 된다.

自稱大金皇帝李澄玉

端宗朝時節이다. 咸吉道(現咸鏡道)都節制使 李澄玉이 크게 朝政紊亂하고 스스로 叛軍을 이르켜 五國城占領하고 一面으로 檄書野人에게 보내여 大金皇帝가 되엿다.

澄玉을 넘기로 하고 밤을 이여 進軍을 하던 중 鍾城節制使 鄭種勸止明朝進入하고 途中에서 假寢하던 중 鄭種夜襲을 바 다 其身先死하니 大金皇帝雄圖一場春夢이 되고 말앗다.

李澄玉! 그의 壯圖는 시작되야 곳 실패되엿스나 그 개인은 실로 무서운 將帥이엿다. 그는 梁山사람으로 일즉부터 武勇卓越하야 처음 富居柵을 직힐 때에 每每戰功을 세워서 華夷畏伏하엿스며 특히 當時名將 金宗瑞推薦을 바다 그에 대한 咸吉節制使가 되엿던 것이다. 사람을 쓰거던 의심치를 말거나 의심을 하거던 처음부터 쓰지를 말것이여 늘 每樣 狐疑를 갓는 당시의 世祖金宗瑞死後 못내 澄玉을 의심하야 朴好問으로 그에 하게 하고 澄玉召還키로 하엿다. 幼弄을 당한 澄玉은 처음은 그 대로 하려 하엿스나 다시 생각하되 일업시 나를 遞還하는 것은 반드시 曲折이 잇는 것이라 하야 곳 길을 돌려 朴好問擊殺하고 京師進攻하려 하다가 다시 計劃하기를 족으마한 朝鮮地域을 가지고 서루 다툴 것이 업시 널즉한 건너 地域征服함이 하겟다하야 곳 을 건너서기로 하고 鍾城까지에 니르럿던 -방정마즌 鍾城節制使의 적은 謀陷에 드러 무참히도 희생되고 말앗스니 그의 時年24엿다.

에 의하면 鄭種이 가만히 澄玉을 죽여 자기의 을 세우기로 하고 니어 그의 部下가 되야 夜行不利理由로 하야 를 중도에 旅宿케 하고 미리 力士 3을 시켜 旅屋天井上埋伏하야 그의 熟睡를 기다려 長釰으로 直刺하던 중 이 그릇 右臂하엿슴으로 澄玉은 그때에 驚起하야 그 을 빼아서 가지고 赤身으로 飛出하야 左手로써 鄭種徒黨數十人擊殺하고 結局 不幸하엿다 한다.

그는 어렷슬 때부터 엇지 勇力이 잇던지 범가튼 놈을 맛나면 한번 張目大叱하고 범의 合眼低首함을 기다려48一矢射殺하는 버릇이엿는데 어느 때는 金海府使를 보러 갓다가 歸路少婦路哭함을 보고 그 이유를 물은즉 그 의 먹힌 바 되얏는데 그 범이 오히려 그 竹林 中에 잇다 함으로 澄玉은 곳 竹林에 드러 가 그 범을 붓잡아 노코 그 배를 갈나 男便되는 사람의 고기를 끄집어 낸즉 그 고기가 아직 삭지 안핫슴으로 그 여자로 하여금 그것을 주으라 하고 그 범의 가죽을 벳기여 그 여자를 준 일이 잇섯다 하며 또 한번은 그 어머니가 澄玉兄 澄石까지 불너 가로되 내가 生山豕를 구경하고 십흔데 너의 兄弟가 능히 하겟느냐한즉 그 兄 澄石은 그날로 한 山豕를 쏘아 가지고 왓고 澄玉二日間後에 졍말 生豕生摛을 하야 몰도록 몰아 가지고 와서 그 께 뵈엿다고 하는 바 그의 勇力盖如許하엿다.

北朝鮮을 움즉인 李施愛 兄弟

世祖十二年 丁亥 夏 五月吉州人 二施愛가 그 弟施合으로 더불어 叛抗戰을 니르켜 크게 北朝鮮을 움즉이엿다.

施愛는 일즉이 會寧府使를 지내여 그 지방에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늘 異謀를 품고 잇던 중 맛츰 親喪를 맛나서 몃해 집에 蟄居하게 되매 이 때가 정히 謀事擧兵라 하야 各地同志를 보내여 한편으로 地方人心을 움즉일 流言(朝廷으로부터 大兵을 보내여 咸鏡道人盡殺할 계획이라는 )을 돌리고 또 한편으로는 地方地方擧事黨與扶植하야 한번 손만 들면 咸興 以北長吏를 죽이여써 응하도록 맨드러 노코 及 其擧事時하야서는 本道節度使 康孝文自己鄕邑吉州誘來하야 妓妾으로 하야금 그와 同宿暗殺하는 동시에 吉州牧使 薛澄新幷殺하야 기세를 列郡하니 列郡이 제각각 守令을 죽이여 응하는 중 咸鏡觀察使 申㴐亦力屈自盝하얏섯다.

를 접한 朝廷에서는 大驚失色하야 龜城君浚으로 都總使를 삼고 曹錫文으로 副將을 삼고 魚有沼 康純南怡大將을 삼아 六道兵三萬하야 往攻케 하되 특히 喪中에 잇는 許琮을 니르켜 咸吉道節度使를 삼고 漁世恭을 올니어 觀察使를 삼아 施愛兄弟를 당케 하엿다.

이에 써 施愛은 크게 洪原에서 싸우고 또 北靑에서 싸우고 또 蔓嶺에서 싸와 大軆勝勢해 왓스나49蔓嶺魚有沼 康純등의 官軍에게 慘敗하여 施愛-吉州逃入하니 萬事飛去夕陽風이 되고 말앗다. 일이 하게 되면 그 는 언제던지 自己黨內에 니는 것이라. 吉州人 許惟禮施愛部下되는 李珠 黃生等을 꾀여서 施愛揰擒하야 朝廷에 바치고 二等 무엇이 되엿다고 한다.

李施愛爲人果如何하엿는가. 이는 紀錄別無하야 其詳을 알 수 업스나 謀略이 잇고 俠氣하엿던 것은 사실인 동시에 女邑하야 民生함과 가튼 革命大義가 업섯던 것도 亦 事實이엿는 듯십다.

全朝鮮號令李适

仁祖 2甲子 春正月이라. 平安府使 李适龜城府使 韓明璉으로 더불어 大軍을 거느리고 一擧京城直搗하야 君王公州逐出하고 스스로 執政者가 되여 비록 一時이나마 全朝鮮을 호령하엿다.

이에 하야 綾陽君(仁祖)金瑬, 李曙, 李适, 李貴文武將相相謀하야 淫虐無雙光海君하고 反正大事斷行後 金瑬 等 50餘人에 대하야 靖社功勳表賞할 새 用兵用策에 다 가티 主力이 된 李适에 대하야는 겨우 判尹하고 에 비하면 아모 것도 아닌 李貴등에 대하야는 兵判한 바 이로부터의 은 한 업는 不平을 갓고 잇든 중 朝廷에서는 다시 그를 左遷시켜 平安兵使를 삼으니 此期不可夫이라 하야 前記 韓明璉其 子梅로 더불어 하고 同志紏合하야 드대여 당시의 王家顚伏복하고 스스로 新朝創業主가 되려는 擧措를 니르켯다. 그래서 破竹之勢京城까지를 함락하야 大事 거외 告功을 하려하엿스나 鄭忠臣 張晩 等不意襲擊을 바더 利川方面으로 敗走하게 되매 그의 부하에 잇던 李守白 奇益獻 等明璉暗殺하야 俗談에 전하는 말과 가티 李适은 꽝괄이 되고 말앗다.

用兵用事하는 謀略과 또 激越意氣는 실로 當世一人됨을 不失한얏스나 일이 너무 急遞(謀事中途關係上)하야 결국의 실패를 招致하고 말앗다. 그러나 그 간 500反抗史 中에 오즉 京城直陷하고 몃칠간일지라도 大權掌握한 이는 이 李适一人뿐이다.

仁祖 때에는 이밧게도 柳孝立 柳濯 等 이제 各各 叛旗를 든 일이 잇섯스나 모다 大事不至하고 失敗된 바 50별로 論及할 거리가 못된다.

講習稱托鄭汝立

宣祖 22년이라. 湖南 鄭汝立叛旗를 들려하다가 일은 시작도 못하고 鎭安山谷間에서 官軍에게 들리여 勢窮自殺하다. 이에 대하야 한가지 말 할 것은 講習稱托하고 상당히 同志를 모고 武兵養成하엿던 그것이다. 그러나 始作도 되기 謨洩하엿스니 다시 또 무엇을 말하리오.

嶺南 巨物李麟佐

英祖 4년이라. 嶺南 巨物 李麟佐를 중심삼고 叛革運動이 니러 八路騷然한 감이 잇섯다.

英祖朝 이때에 벌서 東西分黨己久하고 老少論爭鬪日烈하야 서로 讒誣하고 서로 驅除하는 하는 그 士禍寃獄非再非三인 바 이에 관계된 子孫이나 또 其同僚들은 스스로 王室하고 國家咀呪하야 기회만 잇스면 叛革을 니르키려 하엿다. 때에 마츰 嶺南李麟佐-爲人이 비범하고 黨與-其衆하야 가히 하염즉 함이 잇슴을 본 中央의 모든 不平人들은 드대여 그와 相謀하야 그 일을 일르킨 것이엿다.

暫間 그의 戰狀을 보면 처음 李麟佐同志 權瑞鳳과 가티 거즛 喪輛를 꾸려 가지고 그 속에 兵器를 감추고 淸州 城邑潛入하야 밤중에 兵使 李鳳祥斬殺하고 麟佐-스스로 大元帥가 되야 瑞鳳으로 淸州牧使를 삼고 檄文列邑에 전하야 兵馬徵聚하고 營府財穀盡散하야 크게 民衆慰撫하엿다.

消息을 접한 中央政府에서는 兵曹判書 吳命恒을 명하야 四路都巡撫使를 삼고 京營大發하야 安城 竹山 等地에서 連戰하던 중 畢竟, 李麟佐軍不利하야 麟佐瑞鳳이 아울너 生擒되고 일이 하뉀ˆ 오즉 吳命恒 이하 50餘人武功을 자랑케 함이 되엿슬 뿐이엿다.

이 때에 한가지 야릇한 말이 잇섯스니 즉 巨儒 鄭羽良이라 하는 자가 進言하되 麟佐의 아들 하나가 잇서 年今 5세에 釰舞을 행하니 청컨대 이 를 이제부터 가두어 두엇다가 성장하기를 기다려서 斬殺함이 엇더함니까51하엿는데 결국 그러케까지는 못하는 이라 하야 實行은 되지 못하엿스나 이 한가지 事實로써 在來仕路에 선 그 들이 如何히 당시의 君王에게 阿附하엿는가를 推察할 수 잇다.

關西産出洪景來 運動

李朝 23되는 純祖朝이다. 이 때쯤 되야서는 王家를 중심으로 한 班族專政弊害도 거의 其 極하야 그야말로 민중이 聊生할 수 업슬만한 지경에 陷入되엿다. 이런 인심을 推察하고 政權平等絶呌하야 純祖 11平安道人 洪景來嘉山一隅에서 王朝革命叛革戰을 니르켯다. 王家로 더불어 單純勢力을 다투는 싸움이 아니요 적어도 政權均分을 목적으로 하는 말하면 西歐佛蘭西 7月革命과 그 趣意를 가티 한 歷史的 意義를 가진 것이 이 洪景來叛革이엿다. 이에 대한 仔細紀錄은 일즉히 本誌에서 平北道號를 할 때에 말함이 잇섯는 고로 이에 再述치 아니하거니와 洪景來 그는 幼年時로부터 大意를 품고 文不過持平掌令武不遇僉使萬戶라는 標語로써 크게 壓迫밧는 民衆刺戟시키되 嘉山境內砂金鑛을 한다는 稱托 下에서 다수의 武卒을 양성하고 大官 邊將들과도 氣脉豫通하야 一擧嘉山占奪하고 니여 沿路列郡占有하엿섯스나 定州에 불리하야 積年雄圖水泡空歸한 셈이 되엿다.

이 때 政府에서는 이 運動鎭定하기에 상당한 困難을 늣겻스니 十萬三千賑發하야 平安道民慰撫하는 등을 취함과 가튼 것은 그 腐心一例라 하겟스며 每戰每敗朴基豊中軍罷免하고 柳孝源新任하야 겨우 定州을 치르게 한 것도 亦然하다 할 것이다. 餘不再記.

百萬黨員擁有東學黨

高宗 31甲午春朝鮮叛革運動 중에 가장 大規模的 이며 또 計劃的 이며 특히 歷史的 意義를 가진 東學黨動亂이 닐다. 이에 관하야는 바루 本誌 4월호에 그 大軆를 소개한 바 讀者의 기억이 尙新할지라 여긔에 再論할 필요가 업거니와 一言으로 하면 그간 500朝鮮政治純然王室班族을 중심삼고서 民衆魚肉하야52國破民殘의 최후를 馴致形勢迫及한 바 哲宗末年頃 慶州崔濟愚가 일즉이 槪然한 바 잇서 20여년을 自嘆自悶하던 중 距今 66년 전에 東學이라하는 軆系가 잇고 政綱이 잇는 道學創明하야 그로써 同志紏合하고 秘密結社를 행해 오던 중 불과 5년에 그는 獄殺되고 同志 崔時亨이 그 하야 問題東學亂을 니르키던 前期해서는 其黨員100으로써 하게 된 바 드대여 全肆準가튼 慹烈鬪將先驅로 하야 東學亂은 니러난 것이다.

때의 政府ALT이를 支持하는 特權班族階級破滅하고 當民中心新朝鮮을 건설하리라 한것은 그 運動의 처음부터 唯一抱負이엿고 洋人하고 倭人한다는 것은 의 인심을 收攬키 위한 唯一標榜이엿다. 兵起한지 不出數月兩湖征服하고 京城하려 하매 政府에서는 不得已 淸國日本援軍을 청하기까지에 하야 그 결과가 如何하게 된 것은 一般共知하는 바이며 이 東學運動이라하는 것은 저 다른 叛亂과 가티 一時私憾이나 혹은 政治的 不平으로만 紏合 起動된 것이 아니오 東學이라 하는 특수한 思想黨綱根據로 하야 성립된 組織인 고로 그 當時에 말할 수 업는 犧牲을 내이고 慘敗하엿슴에도 불구하고 그의 主義와 그의 組織은 더욱 儼然하야 天道敎라는 새 組織을 가지고서 朝鮮民衆間에 의존한 것은 역시 一般이 잘 아는 今日이다.53

4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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