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잡지자료
잡지명 : 개벽 제70호
발행년월일 : 1926년 06월 01일
기사제목 : 五百年間의 革命運動
필자 : 金自立 김자립
기사형태 : 논설
五百年間의 革命運動 (오백년간의 혁명운동)
金自立
무엇보다도 만흔 民擾
漢陽定國한 이후 五百年간(지난 庚戌年以後 일은 여긔에 不載)의 叛革運動을 一瞥하려 할 때에 몬저 생각나는 것은
첫재 그 間의 歷史는 대개가 王室에서 編修하엿거나 또는 적어도 王室을 중심삼고 編修한 것임으로 根本으로 그와 가튼 民間叛逆에 대하야 記錄을 踈漏하게 하엿스며
둘재 가튼 政府에 대한 叛逆運動이라 할지라도 五百年間의 初期 乃至 中期에 잇서„œ는 그 運動의 動機가 대개로 「네가 가진 것을 내가 가져 보겟다」하는 王位 또는 기타의 政權을 爭奪하려는데 잇는 동시에 그 運動이 심히 民衆的이 못되엿슴에 반하야 末期의 運動은 그 動機가 救國安民에 잇슴을 발견하게 되는 동시에 그 運動도 스스로 衆과 關係를 한 그것이며
셋재 나타난 것보다도 나타나지 아니한 大小의 民擾가 想像 以外로 만흠을 발견하게 되는 그것이다. 그러나 이 民擾에 관해서는 도저히 軆系的으로 記錄할 수가 업고 오즉 下層의 人民이 그 못견딀 不平忿懣을 端片的으로 표현하다가 그 時 그 時로 失敗 犧牲된 것이니라 하는 一言으로써 約하는 수 밧게 업는 그것이다.
따라서 以下에 記錄한 몃 가지는 만흔 叛逆運動 中에서 正史에 나타난 몃 가지를 抄述함에 불과한 것이오 그런 중에는 徒黨的이 아니오 單히 自己一個人이 當時의 政治制度에 대한 불평을 품고 一生을 浪人가티 지내다가<47> 消失된 것을 여긔에 하나도 못싯게 된다.
自稱大金皇帝李澄玉
端宗朝時節이다. 咸吉道(現咸鏡道)都節制使 李澄玉이 크게 朝政의 紊亂을 駁하고 스스로 叛軍을 이르켜 五國城을 占領하고 一面으로 檄書를 野人에게 보내여 大金皇帝가 되엿다.
澄玉이 仍히 江을 넘기로 하고 밤을 이여 進軍을 하던 중 鍾城節制使 鄭種의 勸止로 明朝進入을 決하고 途中에서 假寢하던 중 鄭種의 夜襲을 바 다 其身이 先死하니 大金皇帝의 雄圖도 一場春夢이 되고 말앗다.
李澄玉! 그의 壯圖는 시작되야 곳 실패되엿스나 그 개인은 실로 무서운 將帥이엿다. 그는 本히 梁山사람으로 일즉부터 武勇이 卓越하야 처음 富居柵을 직힐 때에 每每히 戰功을 세워서 華夷가 畏伏하엿스며 특히 當時名將 金宗瑞의 推薦을 바다 그에 대한 咸吉節制使가 되엿던 것이다. 사람을 쓰거던 의심치를 말거나 의심을 하거던 처음부터 쓰지를 말것이여 늘 每樣 狐疑를 갓는 당시의 世祖는 金宗瑞의 死後 못내 澄玉을 의심하야 朴好問으로 그에 代하게 하고 澄玉을 召還키로 하엿다. 이 幼弄을 당한 澄玉은 처음은 그 命대로 하려 하엿스나 다시 생각하되 일업시 나를 遞還하는 것은 반드시 曲折이 잇는 것이라 하야 곳 길을 돌려 朴好問을 擊殺하고 直히 京師를 進攻하려 하다가 다시 計劃하기를 족으마한 朝鮮地域을 가지고 서루 다툴 것이 업시 널즉한 江건너 地域을 征服함이 快하겟다」하야 곳 江을 건너서기로 하고 鍾城까지에 니르럿던 中 고-방정마즌 鍾城節制使의 적은 謀陷에 드러 무참히도 희생되고 말앗스니 그의 時年이 24엿다.
傳에 의하면 鄭種이 가만히 澄玉을 죽여 자기의 功을 세우기로 하고 니어 그의 部下가 되야 夜行不利를 理由로 하야 李를 중도에 旅宿케 하고 미리 力士 3人을 시켜 旅屋天井上에 埋伏하야 그의 熟睡를 기다려 長釰으로 直刺하던 중 劒이 그릇 右臂을 折하엿슴으로 澄玉은 그때에 驚起하야 그 釰을 빼아서 가지고 赤身으로 飛出하야 左手로써 鄭種의 徒黨數十人을 擊殺하고 結局 不幸하엿다 한다.
그는 어렷슬 때부터 엇지 勇力이 잇던지 범가튼 놈을 맛나면 한번 張目大叱하고 범의 合眼低首함을 기다려<48> 一矢로 射殺하는 버릇이엿는데 어느 때는 金海府使를 보러 갓다가 歸路에 少婦의 路哭함을 보고 그 이유를 물은즉 그 夫가 虎의 먹힌 바 되얏는데 그 범이 오히려 그 竹林 中에 잇다 함으로 澄玉은 곳 竹林에 드러 가 그 범을 붓잡아 노코 그 배를 갈나 男便되는 사람의 고기를 끄집어 낸즉 그 고기가 아직 삭지 안핫슴으로 그 여자로 하여금 그것을 주으라 하고 그 범의 가죽을 벳기여 그 여자를 준 일이 잇섯다 하며 또 한번은 그 어머니가 澄玉의 兄 澄石까지 불너 가로되 「내가 生山豕를 구경하고 십흔데 너의 兄弟가 능히 하겟느냐」한즉 그 兄 澄石은 그날로 한 山豕를 쏘아 가지고 왓고 澄玉을 二日間後에 졍말 生豕를 生摛을 하야 羊몰도록 몰아 가지고 와서 그 母께 뵈엿다고 하는 바 그의 勇力이 盖如許하엿다.
北朝鮮을 움즉인 李施愛 兄弟
世祖十二年 丁亥 夏 五月에 吉州人 二施愛가 그 弟施合으로 더불어 叛抗戰을 니르켜 크게 北朝鮮을 움즉이엿다.
施愛는 일즉이 會寧府使를 지내여 그 지방에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늘 異謀를 품고 잇던 중 맛츰 親喪를 맛나서 몃해 집에 蟄居하게 되매 이 때가 정히 謀事擧兵할 秋라 하야 各地에 同志를 보내여 한편으로 地方人心을 움즉일 流言(朝廷으로부터 大兵을 보내여 咸鏡道人을 盡殺할 계획이라는 等)을 돌리고 또 한편으로는 地方地方에 擧事할 黨與를 扶植하야 한번 손만 들면 咸興 以北이 長吏를 죽이여써 응하도록 맨드러 노코 及 其擧事時하야서는 本道節度使 康孝文을 自己鄕邑인 吉州로 誘來하야 妓妾으로 하야금 그와 同宿暗殺하는 동시에 吉州牧使 薛澄新을 幷殺하야 기세를 列郡에 示하니 列郡이 제각각 守令을 죽이여 응하는 중 咸鏡觀察使 申㴐이 亦力屈自盝하얏섯다.
이 報를 접한 朝廷에서는 大驚失色하야 直히 龜城君浚으로 都總使를 삼고 曹錫文으로 副將을 삼고 魚有沼 康純南怡로 大將을 삼아 六道兵三萬을 發하야 往攻케 하되 특히 喪中에 잇는 許琮을 니르켜 咸吉道節度使를 삼고 漁世恭을 올니어 觀察使를 삼아 施愛兄弟를 당케 하엿다.
이에 써 施愛의 軍은 크게 洪原에서 싸우고 또 北靑에서 싸우고 또 蔓嶺에서 싸와 大軆로 勝勢를 取해 왓스나<49> 蔓嶺의 戰에 魚有沼 康純등의 官軍에게 慘敗하여 施愛-吉州로 逃入하니 萬事는 飛去夕陽風이 되고 말앗다. 일이 敗하게 되면 그 禍는 언제던지 自己黨內에 니는 것이라. 吉州人 許惟禮가 施愛의 部下되는 李珠 黃生等을 꾀여서 施愛를 揰擒하야 朝廷에 바치고 二等 무엇이 되엿다고 한다.
李施愛의 爲人이 果如何하엿는가. 이는 紀錄이 別無하야 其詳을 알 수 업스나 謀略이 잇고 俠氣에 富하엿던 것은 사실인 동시에 女邑에 耽하야 民生을 念함과 가튼 革命의 大義가 업섯던 것도 亦 事實이엿는 듯십다.
全朝鮮을 號令한 李适
仁祖 2년 甲子 春正月이라. 平安府使 李适이 龜城府使 韓明璉으로 더불어 大軍을 거느리고 一擧에 京城을 直搗하야 君王은 公州로 逐出하고 스스로 執政者가 되여 비록 一時이나마 全朝鮮을 호령하엿다.
이에 先하야 綾陽君(仁祖)이 金瑬, 李曙, 李适, 李貴등 文武將相과 相謀하야 淫虐無雙한 光海君을 廢하고 反正의 大事를 斷行한 後 金瑬 等 50餘人에 대하야 靖社功勳을 表賞할 새 用兵用策에 다 가티 主力이 된 李适에 대하야는 겨우 判尹을 除하고 适에 비하면 아모 것도 아닌 李貴등에 대하야는 兵判을 拜한 바 이로부터의 适은 한 업는 不平을 갓고 잇든 중 朝廷에서는 다시 그를 左遷시켜 平安兵使를 삼으니 适은 此期不可夫이라 하야 前記 韓明璉과 其 子梅로 더불어 密히 兵을 鍊하고 同志을 紏合하야 드대여 당시의 王家를 顚伏복하고 스스로 新朝의 創業主가 되려는 擧措를 니르켯다. 그래서 破竹之勢로 京城까지를 함락하야 大事 거외 告功을 하려하엿스나 鄭忠臣 張晩 等의 不意襲擊을 바더 利川方面으로 敗走하게 되매 그의 부하에 잇던 李守白 奇益獻 等이 适과 明璉을 暗殺하야 俗談에 전하는 말과 가티 李适은 꽝괄이 되고 말앗다.
适의 用兵用事하는 謀略과 또 激越한 意氣는 실로 當世의 一人됨을 不失한얏스나 일이 너무 急遞(謀事中途에 謀가 洩한 關係上)에 出하야 결국의 실패를 招致하고 말앗다. 그러나 그 간 500년 反抗史 中에 오즉 京城을 直陷하고 單 몃칠간일지라도 大權을 掌握한 이는 이 李适一人뿐이다.
仁祖 때에는 이밧게도 柳孝立 柳濯 等 이제 各各 叛旗를 든 일이 잇섯스나 모다 大事에 不至하고 失敗된 바 <50> 별로 論及할 거리가 못된다.
講習을 稱托한 鄭汝立
宣祖 22년이라. 湖南 鄭汝立이 叛旗를 들려하다가 일은 시작도 못하고 鎭安의 山谷間에서 官軍에게 들리여 勢窮自殺하다. 이에 대하야 한가지 말 할 것은 講習을 稱托하고 상당히 同志를 모고 武兵을 養成하엿던 그것이다. 그러나 始作도 되기 前에 謨洩하엿스니 다시 또 무엇을 말하리오.
嶺南 巨物인 李麟佐
英祖 4년이라. 嶺南 巨物 李麟佐를 중심삼고 叛革運動이 니러 八路騷然한 감이 잇섯다.
英祖朝 이때에 벌서 東西의 分黨이 己久하고 老少論의 爭鬪가 日烈하야 서로 讒誣하고 서로 驅除하는 策을 取하는 그 間에 士禍寃獄이 非再非三인 바 이에 관계된 子孫이나 또 其同僚들은 스스로 王室을 怨하고 國家를 咀呪하야 기회만 잇스면 叛革을 니르키려 하엿다. 때에 마츰 嶺南의 李麟佐-爲人이 비범하고 黨與-其衆하야 가히 하염즉 함이 잇슴을 본 中央의 모든 不平人들은 드대여 그와 相謀하야 그 일을 일르킨 것이엿다.
暫間 그의 戰狀을 보면 처음 李麟佐는 同志 權瑞鳳과 가티 거즛 喪輛를 꾸려 가지고 그 속에 兵器를 감추고 淸州 城邑을 潛入하야 밤중에 兵使 李鳳祥을 斬殺하고 麟佐-스스로 大元帥가 되야 瑞鳳으로 淸州牧使를 삼고 檄文을 列邑에 전하야 兵馬를 徵聚하고 營府의 財穀을 盡散하야 크게 民衆을 慰撫하엿다.
이 消息을 접한 中央政府에서는 兵曹判書 吳命恒을 명하야 四路都巡撫使를 삼고 京營의 兵을 大發하야 安城 竹山 等地에서 連戰하던 중 畢竟, 李麟佐軍이 不利하야 麟佐와 瑞鳳이 아울너 生擒되고 일이 罷하뉀ˆ 오즉 吳命恒 이하 50餘人의 武功을 자랑케 함이 되엿슬 뿐이엿다.
이 때에 한가지 야릇한 말이 잇섯스니 즉 巨儒 鄭羽良이라 하는 자가 進言하되 麟佐의 아들 하나가 잇서 年今 5세에 釰舞의 狀을 행하니 청컨대 이 兒를 이제부터 가두어 두엇다가 성장하기를 기다려서 斬殺함이 엇더함니까<51> 하엿는데 결국 그러케까지는 못하는 法이라 하야 實行은 되지 못하엿스나 이 한가지 事實로써 在來의 仕路에 선 그 者들이 如何히 당시의 君王에게 阿附하엿는가를 推察할 수 잇다.
關西가 産出한 洪景來 運動
李朝 23世 되는 純祖朝이다. 이 때쯤 되야서는 王家를 중심으로 한 班族專政弊害도 거의 其 極에 達하야 그야말로 민중이 聊生할 수 업슬만한 지경에 陷入되엿다. 이런 인심을 推察하고 政權의 平等을 絶呌하야 純祖 11년 平安道人 洪景來가 嘉山一隅에서 王朝革命의 叛革戰을 니르켯다. 王家로 더불어 單純한 勢力을 다투는 싸움이 아니요 적어도 政權均分을 목적으로 하는 말하면 西歐의 佛蘭西 7月革命과 그 趣意를 가티 한 歷史的 意義를 가진 것이 이 洪景來叛革이엿다. 이에 대한 仔細한 紀錄은 일즉히 本誌에서 平北道號를 할 때에 말함이 잇섯는 고로 이에 再述치 아니하거니와 洪景來 그는 幼年時로부터 大意를 품고 「文不過持平掌令武不遇僉使萬戶」라는 標語로써 크게 壓迫밧는 民衆을 刺戟시키되 例의 嘉山境內에 砂金鑛을 한다는 稱托 下에서 다수의 武卒을 양성하고 時의 大官 邊將들과도 氣脉을 豫通하야 一擧에 嘉山을 占奪하고 니여 沿路列郡을 占有하엿섯스나 定州의 役에 불리하야 積年의 雄圖도 水泡에 空歸한 셈이 되엿다.
이 때 政府에서는 이 運動을 鎭定하기에 상당한 困難을 늣겻스니 十萬의 金과 三千의 穀을 賑發하야 平安道民을 慰撫하는 등을 취함과 가튼 것은 그 腐心의 一例라 하겟스며 每戰每敗의 朴基豊의 中軍을 罷免하고 柳孝源을 新任하야 겨우 定州의 役을 치르게 한 것도 亦然하다 할 것이다. 餘不再記.
百萬의 黨員을 擁有한 東學黨
高宗 31년 甲午春에 朝鮮叛革運動 중에 가장 大規模的 이며 또 計劃的 이며 특히 歷史的 意義를 가진 東學黨動亂이 닐다. 이에 관하야는 바루 本誌 4월호에 그 大軆를 소개한 바 讀者의 기억이 尙新할지라 여긔에 再論할 필요가 업거니와 一言으로 蔽하면 그간 500年의 朝鮮政治가 純然히 王室과 班族을 중심삼고서 民衆을 魚肉하야<52> 國破民殘의 최후를 馴致할 形勢에 迫及한 바 哲宗末年頃 慶州의 崔濟愚가 일즉이 槪然한 바 잇서 20여년을 自嘆自悶하던 중 距今 66년 전에 東學이라하는 軆系가 잇고 政綱이 잇는 道學을 創明하야 그로써 同志를 紏合하고 秘密結社를 행해 오던 중 불과 5년에 그는 獄殺되고 同志 崔時亨이 그 後를 繼하야 問題의 東學亂을 니르키던 前期해서는 其黨員이 100萬으로써 算하게 된 바 드대여 全肆準가튼 慹烈한 鬪將을 先驅로 하야 東學亂은 니러난 것이다.
때의 政府와 ALT이를 支持하는 特權班族階級을 破滅하고 當民中心의 新朝鮮을 건설하리라 한것은 그 運動의 처음부터 唯一抱負이엿고 洋人을 排하고 倭人을 斥한다는 것은 時의 인심을 收攬키 위한 唯一標榜이엿다. 兵起한지 不出數月에 兩湖를 征服하고 直히 京城을 泊하려 하매 政府에서는 不得已 淸國과 日本에 援軍을 청하기까지에 至하야 그 결과가 如何하게 된 것은 一般이 共知하는 바이며 이 東學運動이라하는 것은 저 다른 叛亂과 가티 一時의 私憾이나 혹은 政治的 不平으로만 紏合 起動된 것이 아니오 東學이라 하는 특수한 思想과 黨綱을 根據로 하야 성립된 組織인 고로 그 當時에 말할 수 업는 犧牲을 내이고 慘敗하엿슴에도 불구하고 그의 主義와 그의 組織은 더욱 儼然하야 天道敎라는 새 組織을 가지고서 朝鮮民衆間에 의존한 것은 역시 一般이 잘 아는 今日이다.<53>
<47-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