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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잡지자료 3 (별건곤 제15호)

작성자山房山(榮國)|작성시간11.05.12|조회수49 목록 댓글 0

 

 

 

 

  한국근현대잡지자료 3

 

 

(2). 잡지명 :  별건곤 제15

발행년월일 :  19280801

기사제목 :  朝鮮三大內亂記, 漢陽朝最初 反逆兒 關北豪傑 李施愛亂

필자 :  壽春學人

기사형태 :  문예기타

 

朝鮮三大內亂記, 漢陽朝最初 反逆兒 關北豪傑 李施愛亂

 

壽春學人

難兄難弟의 그 人物

자칭 大金皇帝 李澄玉千古遺恨을 품고 24세의 장년으로 두만강 머리에서 悲絶하게 최후를 맛친 지 14년을 뒤하야 關北에는 또 一大反亂이 이러낫스니 그것은 前 會寧府使 李施愛이엿다. 李施愛는 원래 吉州 사람으로 爲人勇悍豪俠하고 智謀가 출중하며 어렷슬 때부터 弓馬를 조와하야 무예가 또한 絶特하니 세상 사람들이 제2 李成桂라고 하얏다. 그의 아우 施伯施合은 또한 施愛不下하는 인물로 삼 형제가 공히 武科出身*야 일즉이 李澄玉幕下에 잇섯는데 澄玉은 그의 武勇하게 녁여 특히 寵愛하며 항상 갈오대 吾家형제와 (澄玉其兄澄石) 君家 삼 형제가 一心만 된다면 그까진 野人은 그만두고 中國全幅이라도 정복하기는 反掌과 갓겟다고 하고, 野人들은 또 그의 武威를 무서워하야 항상 서로 경계하되 李家三虎不可近이라 하고 그네가 한번 出馬한다면 히 대항치도 못하고 塞外望風逃走하얏섯다.<2> 그러다가 端宗 元年 癸丑李澄玉大金皇帝가 되겟다는 雄志를 품고 하다가 불행히 중도에 실패하매 (本誌 前號 참조) 그들은 몸에 가 밋칠가 두려워하야 다 軍職하고 本土에 도라와 혹은 수렵 혹은 농업으로 세월을 보냇섯다.

을 이르킨 動機

그 뒤에 施愛는 다시 擢用되야 會寧府使가 되엿스나 前日 李澄玉寃死한 것을 억울이 생각하야 그때 조정의 處置가 잘못된 것을 항상 憒慨할 뿐 안이라. 李氏王朝는 본래 咸鏡道에서 이러남에도 불구하고 도로혀 그 發祥之地咸鏡道의 인물을 猜忌 薄待하야 정부의 요직에는 한사람도 참여치 못하게 하는데 더욱 불평을 품어 언제이나 스사로 생각하기를 王家李氏나 자기나 다 가튼 咸鏡道李哥. 李太祖도 별수가 업는 자기와 同類武人 출신인데 그네가 다행이 朝鮮의 왕권을 차지하얏스면 자기의 고향인 咸鏡道를 특별 우대는 못할지언정 他道와 가튼 대우는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眞所謂 개고리()가 올챙이(蝌虯)를 멸시하는 격으로 우리 咸鏡道 사람을 누구보다도 박대하며 자기네 소위 王家에서도 父子相爭하고(指 李太祖) 叔侄弑簒을 하며(指 世祖) 까닭업는 功臣奸臣誣言에 빠저서 함부로 죽이니 누가 안심을 하고 살 수 잇스랴 찰아리 그럴진대 내가 反旗를 이르켜서 잘되면 제2 李太祖가 되고 못되면 越江逃走하야 李澄玉遺志를 니어 大金皇帝라도 되리라고 하얏섯다. 그러나 때가 때인지라 큰일을 함부로 妄動하기는 어렵고 더구나 당시 咸吉道節度使 許悰文武를 겸비한 大人物威德이 내외에 普及하야 일반이 크게 신뢰하니 아모리 大志를 가진 李施愛라도 엇지 輕輕下手할 수 잇섯스랴. 다만 자기 심중에 萬端의 불평만 품고 잇던 중 마츰 또 親喪을 당하니 其職하고 고향에 도라와 廬幕 생활을 하게 되엿다.

美人計節度使斬殺

그때에 節度使 許悰이 또한 喪忌로 인하야 하고 康孝文代住하니 孝文前 禮曹參判 汝中爲人驕傲, 淫逸하야 到任초로부터 酒色浸淫하고 政事를 잘 살피지 안이하니 인민의 원성이 날로 놉하저서 누구나 한번 民擾들 이르킬 생각을 가지게 되엿섯다. 이 기회를 엿본 李施愛는 비록 喪中에 잇스나 그 시기를 타서 평생의 宿志이던 反逆를 들랴고 만반의 계획을 할 제 무엇보다도 먼저 人心煽動식히랴고 그의 徒黨 數十百人을 사방으로 노와 流言하되 朝廷에서 본래 咸鏡道 사람을 박대하던 중 今般에는 특히 本道 사람을 다 殺戮하랴고 下三道 軍兵水陸으로 倂進케 하야 忠淸道兵船은 벌서 鏡城厚羅島에 와서 집중하고 黃平兩西雪寒嶺(或稱 薜罕嶺)을 넘어 前後厮殺한다 하니 人心이 크게 騷動되야 심지어 觀察使 吳凝까지도 그 流言<3> 信聽하고 각 군 守令에게 訓示하야 다 登山避難케 하엿다. 때에 李施愛는 그 의 맛친 것을 暗暗히 깃버하며 節度使 康孝文吉州巡廻함에 밋처서는 다시 其弟 施合과 공모하고 美人計를 쓰되 施合의 딸로서 歌舞姿色兼有한 당시 州中名妓 金貂蟬節度使에게 侍枕케 하얏다가 자기를 開門迎入케 하기로 하고 이에 聲言하야 曰 節度使가 여러 鎭將反逆한다 하고 밤을 타서 大呼吶喊하며 州衙襲擊하니 貂蟬孝文의 방에 잇다가 軍號를 듯고 즉시 衙門을 열어 施愛를 마저 드리니 施愛하야 一刀孝文과 또 吉州牧使 薜澄新斬殺하고 하야 一郡을 호령하니 때는 世祖 12丁亥夏 5월이엇다. 施愛는 이에 또 聲言하되 孝文咸興觀察 申㴐及 其父 叔舟와 반역을 하야 민심을 동요케 함으로 誅殺하얏다 하고 다시 一方으로 그 을 보내여 朝廷上書하되 각 營 人民外道兵에게 殺戮을 당할가 恐惶하야 訛言을 서로 한즉 本道의 인물로 道內 郡 守令을 삼어 인심을 안정케 하지 안으면 안이되겟다 하니 조정에서도 그 眞假를 알지 못하야 會寧軍官 成以乾에게 李施愛의 행동 여하를 물엇스나 成以乾이 또한 施愛의 술책에 속힌 바 되야 極力으로 李施愛忠國爲民한다는 를 말하니 조정은 그저 半信半疑하엿슬 뿐이엿다.

一夜間十餘郡征服

施愛는 이와가티 상하의 인심을 현혹케 한 후 또 각 黨與를 파송하야 流言하되 咸鏡道內郡守觀察外道人이 가지고 잇스면 管內의 인민이 未久에 그들의 손에 滅殺을 당할 터이니 급속히 下手치 안으면 아니된다 하니 咸興 이북의 10一夜間에 그곳의 수령을 다 죽이고 호응하얏다.

이에 施愛는 스사로 施吉道節度使라 칭하고 各郡軍馬를 친히 지휘하야 吉州에다 大本營을 두고 破竹南進하야 端川을 점령하고 利城(今 利原)하야는 縣監을 죽이고 其妻納入하야 을 삼고 하야 北靑 洪原 等沿海 諸郡을 점령하니 咸興에 잇는 施愛徒黨이 또한 주민을 煽動하야 觀察使 申㴐包圍襲殺하고 하야 宣諭使 孫旭까지 斬殺하니 關北 일대가 불과 몃 칠 둥안에 全然 李施愛의 천하가 되엿섯다. 이와가티 불시에 성공을 한 施愛는 다시 자기의 地盤을 더욱 튼튼하히기 위하야 각 의 수령을 자기의 心腹人으로 뽑아 식히고 지방으로 순회하며 인민을 按撫하고 창고를 열어서 빈민을 구휼하며 옥문을 개방하야 죄인을 해방하고 또 도처에 聲言하되 당시 朝野信望多大韓明澮, 申叔舟, 權擥, 盧思愼, 韓繼禧 등이 * *** ** *** 京城을 칼날에 피칠도 안이하고 점령한다 하니 인민이 다 信聽하고 李節度의 만세를 歡呼하엿섯다.

그때까지도 조정에서는 施愛反狀을 잘 알지 못함으로 그다지 중시치 안이하더니 邊報가 날로 급하며 또 韓明澮, 申叔舟 이하의 중요 諸臣이 다 內應이 되엇다는 流言都下에 성행하니 世祖가 크게 놀나고 또 하야 먼저 韓明澮 申叔舟 <4> 10여 중신을 궐내에 拘置하고 그 子婿는 다 禁府拿囚한 후(此等人其後 誣言이 판명되야 석방됨) 龜城君 浚하야 都摠使를 삼그 戶曹判書 曹錫文으로 副摠使를 삼으며 忌服 중에 잇는 許悰親召하야 咸吉道節度使를 삼고 康純, 魚有沼, 南怡 등을 뽑아 大將을 삼으며 六道兵 3만을 징발하야 咸興에서 케 하고 康純 南怡 28인을 다 錫文하야 즉시 永興케 하니 이와가티 六道大兵을 일시에 함은 李朝 건국 후 처음의 일이요 文武名人名將 20여 인이 동시 출정하게 된 것도 李朝內亂史 중 듬은 일이엿다.

最後 一刻蔓嶺大激戰

그러나 都摠使 李浚은 아즉 18세의 청년으로 京城한지 5일에 鐵原하야 路險하다는 핑계를 하고 江原監司治道 잘못한 데 돌녀 보내서 監司만 죽이고 時日遷延하며 (15일만에 淮陽한즉 벌서 平亂하얏다는 가 와서 도로 회군하얏는대 外面李浚遷延이나 사실은 당시 국내가 공허하고 兩南訛言이 또 유행함으로 世祖遷延하도록 密戒함이다) 端川 사람 崔潤孫은 조정의 內命을 밧고 施愛曉諭하러갓다가 施愛에게 附化하야 조정의 기밀을 다 말하니 여러 가지가 官軍에 불리할 뿐 안이라 李施愛 삼 형제는 武勇이 원래 著名한 중 인민이 流言浮動하야 모도 施愛에게 附和함으로 츠음에 官軍는 감히 먼저 兵火치 못하고 節度使 許悰體察使 尹子雲觀察使 魚世恭혀 인심 안정과 회유책에 전력하얏섯다. 그러나 李施愛一切 官軍의 회유를 거절하고 더욱 병력을 집중하야 제1회로 洪原에서 크게 싸웟섯는대 李軍은 항상 夜襲을 하야 官軍을 크게 케 하고 其次에는 北靑에서 또 크게 싸워 兩軍의 희생이 심히 만헛스나 승부가 別無하더니 제3蔓嶺의 싸홈에 李施愛大敗하얏스니 이 蔓嶺의 싸홈은 이번 반란 중 兩軍의 최대 격전이오 李軍一敗는 곳 그네의 치명상이 되엿섯다.

처음에 李施愛蔓嶺險高한 지점을 하야 관군을 下攻하니 矢石이 빗발가티 쏘다나려서 관군의 死者108, 9에 달하야 감히 仰攻치를 못하더니 許悰魚有沼로 하야금 감안이 精兵 수천을 배에 실고 海路로 도라서 蔓嶺上峯을 점거하되 軍兵服色을 초목의 빗과 가티 다 푸르게 하고 개암이()와 다람쥐 모양으로 나무를 안고 돌을 의지하야 불시에 북을 치며 李軍을 나려치니 李軍이 크게 놀나 軍伍를 일코 嶺下의 관군이 또한 상응하야 상하로 來攻하며 관군의 선봉장 李從生은 또한 용기를 내어 크게 奮戰하니 李軍이 능히 抵敵치 못하고 敗走하얏다. 그러나 그때까지 反軍은 아즉 軍勢가 심히 성함으로 관군이 감히 추격치 못하얏다.

그런데 여긔에 잠깐 소개할 일은 民間義兵將 延川君 車云革의 일이니 그는 麗末忠信文節 車原頫革朝會寧謫居하얏는대 때마츰 施愛이 이러남으로 富寧人 曹紏, 鍾城人 鄭休明, 鍾城人 朴成章同謀하고 勤王을 이르키니, 世祖가 그를 嘉尙이 생각하고 특히 선봉장을<5> 하니 그는 75세의 노령으로 奪身出戰하야 李軍南進하는 摩雲嶺路을 단절하고 또 施伯, 施合 兩 형제를 誘執하야 관군에 보내더니 중도에서 副將 崔潤孫李施愛을 통하야 施伯 형제를 奪送하고 云革一同하야 端川 獄中하니 그들은 그만 옥에서 節死하얏다. 그러나 李軍은 그로 인하야 일대 타격을 바더서 급속히 남진치 못하고 관군은 또 그 새이에 모든 요지를 점령하야 군사상 큰 편리를 엇게 되엿섯다.

千古遺恨鬼門關

施愛는 이와가티 蔓嶺에서 관군에게 대패를 당하얏스나 *壯氣는 조금도 屈橈치 안이하야 관군이 屢次 歸降을 권유하되 斷然히 거절하고 退하야 吉州本營을 굿게 직히고 재차 관군의 逆擊할 일을 계획하얏섯다. 그러나 때는 벌서 관군의 세력이 크게 되고 變幻無常한 민중은 관군의 세력이 커짐에 따러서 점차 施愛離叛코자 하는 경향이 뵈이니 施愛는 그 대세의 불리 할 것을 미리 짐작하고 虜中으로 건너가서 捲土重來하기를 결심한 후 妓生財寶를 다 실고 하야 鏡城으로 가니 그때까지도 麾下施愛反狀을 알지 못하고 다만 관군이 咸鏡道人을 살해하러오는데 施愛는 그것을 반항하는 줄로만 알엇섯다.

그때에 마츰 吉州 사람 許惟禮施愛陣中에 와서 歸化를 청하니 惟禮는 원래 李施愛의 처남으로서 서울에 가서 司甕院別座로 잇다가 이제 施愛이 이러나매 는 그 기회에 한 을 이를가 하고 世祖에게 자진하야 李施愛圖謀하고 표면으로 귀화함이엿다. 그러나 施愛는 본시 故鄕인 동시에 처남이 되고 또 그의 부모까지도 施愛陣中에 잇스니 엇지 추호이나 其者異志가 잇슬 줄을 뜻하얏스랴. 그러나 언제이나 는 원래 蕭牆에 잇는 법이라. 惟禮施愛가 자기를 의심치 안이함을 무엇보다도 깃겁게 생각하고 暗暗 중에 施愛의 주요 부하인 李雲露(後錄 2等勳, 鍾城郡 莊敬公) 李珠, 黃生 등을 이해로 說諭하야 회심케 하고 다시 그 자들과 공모하야 鬼門關 밧게 큰 연회를 배설하고 施愛를 청하니 施愛가 방심하고 와서 놀다가 술이 半酣에 이르매 惟禮 등은 미리 약속하얏던 끈을 끈으니 施愛의 형제 일당이 맛치 주머니 속에 들은 쥐와 가티 속수무책으로 다 잽피워서 관군에게 호송되니 一世의 호걸인 李施愛鬼門關外斷頭鬼가 되고 말며 咸吉道는 그 까닭으로 南北道에 분리되고 吉州吉城縣으로 降下되며 龜城君 41은 다 敵愾功臣을 타고 許惟禮도 또한 그 으로 2等勳, 吉城君하엿섯다.

李施愛의 실패는 여러 가지의 원인이 잇지만은 그중 한가지 특히 女色이니 그가 利原에서 縣監을 삼은 것은 신망을 크게 일을 뿐 안이라 거긔에 관련하야 屢日留連하는 동안에 남진할 시기를 일코 虜中으로 가랴 할 때에도 속히 심복 군병만 다리고 강을 건넷스면 鬼門關의 실패가 업섯겟는데 吉州에서 妓女財貨移送하노라고 시기를 일어 몸까지 죽고 말엇스니 후일에 큰 일을 하는 자 - 엇지 치 안이하랴.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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