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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잡지자료 5 (별건곤 제61호 )

작성자山房山(榮國)|작성시간11.05.12|조회수602 목록 댓글 0

 

 

 

한국근현대잡지자료 5

 

 

 

(4).잡지명 :  별건곤 제61

발행년월일 :  19330301

기사제목 :  朝鮮刺客列傳(제삼회)

필자 :  壽春山人

기사형태 :  문예기타 

 

朝鮮刺客列傳(제삼회)

 

壽春山人

金宗瑞椎殺楊汀·柳洙·林藝

세조정난공신(世祖靖亂臣)중에 제일 심술 산압고 사람만히 죽인 자는 양정(楊汀)이다. 양정은 원래 충청도 청주(淸州)사람으로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요 심술이 구저서 사람 잘 때리고 싸흠 잘하기로도 이명한 사람이다. 일즉이 무과(武科)에 출실하얏스나 문벌이 한미한 탓으로 놉흔 벼슬을 어더하지 못하고 불우낙척하야 시정으로 도라다니며 무뢰한들과 교유하며 또 한명회(韓明澮)와는 고향이 가튼 탓으로 서로 교유하얏섯다. 그때에 세조대왕(世祖大王)은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잇스며 항상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할 야심을 가지고 조야(朝野)의 인물을 만히 결탁하니 한명회는 이 양정(楊汀)과 유수(柳洙) 유사(柳泗) 홍달손(洪達孫)등 삼십여인을 추천하얏섯다. 세조는 이 여러 장사들을 혹은 술과 기집으로 혹은 돈으로 매수하야 자긔의 심복지인을 만들고 항상 여러 가지의 음모를 하엿섯다. 그러나 당시 조정(朝廷)에 잇는 령의정 황보인(領相皇甫仁) 좌정승 김종서(左相金宗瑞) 우정승 정분등 여러 사람은 문종대왕의 고명지신(顧命之臣)으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잇는 중 특히 김종서는 세종(世宗)이래 삼대중신으로 위인이 강즉충용(剛直忠勇)하고 지략이 만어서 세상사람들이 대호(大虎)라고 지목을 하엿는데 세조가 자긔의 목적을 달하랴면 누구보다도 먼저 김종서를 처지하지 안으면 아니되게 되엿다. 그리하야 세조일파는 언제이나 김종서를 살해하랴고 음모를 하다가 단종원년게유(端宗元年癸酉) 십월십일에 단종대왕이 교동(지금 慶雲洞)에 잇는 녕양위정종(寧陽尉鄭悰)의 집에 우거하신 틈을 타서 대정변을 이르키기로 결정하엿섯다. 권람(權擥)과 한명회(韓明澮)등은 돈의문(敦義門-西大門)을 수즉하게 하되 인경을 처도 문을 닷지 안케하고 (그때 宗瑞의 집이 西大門 外에 잇는 까닭에) 홍윤성(洪允成)을 보내서 먼저 김종서의 집 동정을 살핀 다음에 세조는 황혼을 타서 친히 양정(楊汀) 유수(柳洙) 유사(柳泗) 유숙(柳淑) 림예(林藝) 등 력사를 다리고 종서의 집을 차저 갓섯다. 종서는 영문도 모르고 잇다가 별안간에 수양대군이 차저왓다는 말을 듯고 황망하게 마저 드렷섯다. 세조는 무엇보다도 종서를 끌어내여 죽일 긔회를 맨들랴고 간단한 인사의 말을 한 다음에 총총히 도라간다고 고별하니 종서는 그를 전송하기 위하야 평복으로 중문박뜰에까지 나왓섯다. 그러나 종서의 뒤에는 종서보다도 힘이 세기로 유명한 그의 아들 김승규(金承珪)가 항상 떠나지 안음으로 세조일행이 감히 하수를 못하고 머뭇머뭇하엿섯다. 이때에 세조는 한 꾀를 내여 고의로 사모뿔(紗帽角)을 땅에 떨귀어 불어 트리고 중서의 사모뿔을 빌녀 달나고 하니 종서는 신지무의하고 승규를 명하야 안에 가서 자긔의 사모뿔을 가저오게 하엿섯다. 이 긔회를 타서 양정 림예동은 미리 예비하얏던 철퇴로 종서의 머리를 냅다치니 종서가 담박에 꺽구러저서 땅에 업허젓섯다. 승규는 사모뿔을 가지고 나오다가 그 광경을 보고 황망하게 달녀드러 종서의 등에 업듸여서 그의 아버지를 구하랴 하니 양정이 칼을 빼여 승규를 죽이고 또 종서를 란자한후(그 뒤 종서는 다시 살어나서 부인타는 교군을 타고 남대문으로 드러오랴다가 문이 닷처 드러오지 못하고 도라가서 자근 아들 승벽(承壁)의 집에 숨어 잇다가 세조의 수하군인에게 살해를 당하얏다) 세조일파는 도라가서 일방으로 단종대왕에게 고변하되 김종서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결탁하야 역모를 한다하고 단종을 위협하야 명패(命牌)를 나려 여러 재신을 부르게 하고 일방으로 금우군(禁衛軍)을 분부하야 궁중을 엄숙히 호위하게 한 후 한명회 등이 생살부(生殺簿)를 가지고 여러 재신을 드러오는 족족 처서 죽이니(이것도 대개는 양정 유수등이 맛터 하엿다) 황보인(皇甫仁) 조극관(趙克寬) 이양(李穰)등 여러 중신이 일시에 참해를 당하얏다. 양정은 그 공으로 소위 정난공신(靖亂功臣)이 되고 청원군(淸原君)까지 봉하얏스며 또 평안도절도사(平安節度使)가 되엿섯다. 그러나 원래 천한 사람이 고관대작(高官大爵)을 하면 반듯시 교만한 법이엿다. 평안절도사의 임긔가 차서 서울로 도라오게 되매 세조는 공신이 오래동안 외지에서 수고한 것을 위로하기 위하야 친히 주연을 벼풀고 양정을<30>불너 술을 하사하니 정은 술을 몃잔 먹은 다음에 어전에서 말하기를 전하께서 왕위에 오래 긔시엿스니 웬만하면 편안하게 놀으시는 것이 조켓다고 하얏다. 세조는 정에게 뭇기를 사시(四時)의 차려와 가티 성공한 사람이라는 말이냐(四時之序成功者去)하니 정은 솔즉하게 그러하다고 대답하얏섯다. 세조는 그 말을 듯고 크게 노하야 어보(御寶)를 급히 가저다가 세자에게 전하랴 하니 여러 조신들이 모도 황공하야 엇지 할 줄을 모르다가 신숙주(申叔舟)가 극력으로 간하야 중지하엿섯다. 그러나 대간(臺諫-언론을 마튼 관리)이 란언무엄(亂言無嚴)한 죄를 탄핵하니 세조도 또한 대간의 말을 올케 생각하야 참형에 처하라 명하니 일시 허영에 취하야 무고한 사람을 만히 죽이던 죄인은 이에 와서 보복을 밧고 소위 정난공신이란 부귀영화도 일장의 춘몽으로 변하고 말엇다. 그리고 양정과 동시에 소위 일문사력사(力士)로 유명하고 사람을 만히 죽이던 유수(柳洙) 유사(柳泗) 유숙(柳淑) 유하(柳河)등은 원래 서흥사람(瑞興人)으로 유수 유하는 정난 이등공신에 군까지 봉하고 벼슬이 판서에 이르럿스며 유사(柳泗) 유숙(柳淑)은 또 삼등공신으로 또 한군을 봉하얏섯다. 그외 림자번(林自蕃)은 라주(羅州)림가로 본명은 예()니 원래 궁로(宮奴)로서 힘이 센 까닭에 세조가 심복을 만드러서 정변을 이르킬 때에 양정 유수 등과 협력하야 여러명 재상을 죽인 까닭에 그 공으로 정란공신이 되고 양양군(襄陽君)봉작까지 하얏스며 벼슬이 또 병사까지에 이르고 죽은 뒤에 문정공(文正公)이란 시호까지 엇게 되엿다.

李施愛斬殺吉州 許惟禮

허유례(許惟禮)는 길주의 세족(吉州世族)이니 세조때에 회녕부사로 반긔를 드러 일시 함경도 일대를 소란케 하던 이시애(李施愛)의 처남으로 서울에 와서 사옹원별좌(司甕院別座)란 벼슬을 하고 잇섯다. 당시 이시애는 정부에 대하야 항상 불평을 품고 잇다가 세조십이년 정해(丁亥)에 그의 아우 시합과(施合) 공모하고 반긔를 들어 절도사 강효문(節度使康孝文)을 죽이고 길주에 웅거하야 인근읍에 격문을 전하고 또 조야에 류언을 퍼치되 공신 신숙주(申叔父) 한명회(韓明澮)등 모모명신이 모도 내음한다 하니 함경 일때가 일시 선동되야 함흥(咸興)의 군민은 관찰사 신면(觀察使申㴐)을 죽이고 단천사람 최윤손(端川人崔潤孫)은 이품관(二品官)으로 효유사(譊諭使)의 명을 띄고 갓다가 도로혀 적과 부합하야 조정의 사정을 밀고하니 상태가 자못 위험하얏섯다. 세조대왕은 크게 걱정하야 귀성군 이준(龜城君李浚)으로 도총사(都摠使) 호판조석문(戶判曹錫文)으로 부총사(副摠使)를 삼고 허종(許琮)으로 절도사를 삼고 어유소(魚有沼) 강순(康純)으로 대장을 삼어 홍원, 북청(洪原, 北靑) 두곳에서 크게 싸워 승첩하얏스나 사아가 길주성으로 도라가서 지구전의 계획을 하니 관군이 또한 곤난하게 되엿섯다. 이때이다. 허유례는 원래 시아와 남매의 가 잇슴으로 그대로 잇스면 자긔의 몸에 화가 밋칠 념녀도 잇고 또 대세를 본즉 아모래도 시애가 실패할 것 가틈으로 그 긔회를 타서 한번 공을 세워보랴고 의리도 정분도 다 불고하고 자원하야 이시애를 잡아오기로 하엿섯다. 조정에서는 크게 깃버하야 만흔 돈을 주고 또 공을 이르면 장래에 큰벼슬을 줄것까지 약속하얏다. 허유례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길주에 가서 이시애를 보고 자긔도 가티 일을 하겟다 하고 조정의 사정도 밀고하는척 하고 또 가지고 간 돈으로 군자금도 판출을 하니 시애가 크게 깃버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미더서 여러 가지의 비밀을 다 말하고 술을 먹거나 밥을 먹어도 다 가티 하엿섯다. 유례는 항상 시애의 겻흘 떠나지 안코 긔회를 엿보다가 시애의 술이 취한 틈을 타서 한 칼로 벼혀 죽이고 그 목을 잘너서 관군에 보내니 시애의 난이 스사로 평정하게 되고 유례는 그 공으로 적개이등공신(敵愾二等功臣)에 길성군(吉城君)을 봉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의 벼슬을 하며 사후에는 공조판서 중즉에 효장공(孝莊公)시호까지 나리엿다.<31>

<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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