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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朝鮮王朝實錄)세조실록(33권10년)[22]

작성자山房山(榮國)|작성시간11.05.05|조회수20 목록 댓글 0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4. 세 조 실 록[22]

 

세조 33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4월 15일(정유)

강순에게 양인들의 항복을 가볍게 받아드리지 말 것을 명하다

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강순(康純)이 치계(馳啓)하기를,

“신이 야인(野人) 박모도(朴毛都) 등에게 이르기를, ‘조삼파(趙三波)·보하토(甫下土)가 사람과 가축을 다 돌려보내고 성심(誠心)으로 귀순(歸順)한다면 지난날 범한 죄는 반드시 추론(追論)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장차 대병(大兵)을 일으켜 진멸(殄滅)시킬 터인데, 죄가 있고 죄가 없음을 어느 겨를에 가리겠는가?’고 하고, 또 이뜻을 가지고 이만주(李滿住)·동창(童倉)에게 통기(通寄)하였습니다. 다만 동충야(童充也)가 만약 입조(入朝)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이를 처리하겠습니까?”

하니, 회유(回諭)하기를,

“경이 타이른 조삼파 등이 말을 낮추어 유약(柔弱)함을 보이는데, 적(賊)으로 하여금 그의 경중(輕重)을 엿보게 하면서 조금 적(敵)을 기다리는 체제(體制)를 낮추라. 경은 한명회(韓明澮)에게 회유(回諭)한 글을 읽어보고 가볍게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말라.”

하였다.

 

세조 33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4월 20일(임인)

강순이 요청한 병서에 대해 제진에 《병서》 2벌씩만 주다

승정원(承政院)에서 교지(敎旨)를 받들어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강순(康純)에게 치서(馳書)하기를,

“경(卿)이 요청한 《병요(兵要)》·《병장설(兵將說)》·《진법(陣法)》·《병정(兵政)》은 변방(邊方)에 보낼 수가 없으며, 《통감(通鑑)》·《장감박의(將鑑博議)》·《백장전(百將傳)》은 때마침 가진 것이 없어서 요청한 바와 같이 보낼 수가 없다. 다만 경과 제진(諸鎭)에 《병서(兵書)》를 각각 2벌씩 내려 준다. 그전에 보낸 《진법》도 또한 이를 비밀히 간수하는 것이 마땅하며 함부로 돌리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세조 33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5월 13일(을축)

강순이 야인들의 동향에 대해서 아뢰니 가을에 멸망시킬 것이라고 하다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강순(康純)이 아뢰기를,

“고령(高嶺)의 알타리(斡朶里) 이가화(李家和)가 포주(蒲州)에 돌아왔으므로, 신이 전에 내려 주신 유서(諭書)를 가지고 이가화에게 부쳐 보내어 보하토(甫下土)·조삼파(趙三波)·이권치(李權赤)를 일일이 유치(誘致)하도록 하였더니, 이가화가 돌아와서 고(告)하기를, ‘보하토 등이 모두 전의 혐의(嫌疑)를 빙자하여 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대국(大國)6570) 에서 들어가 공격할까봐 군사를 훈련하면서 변(變)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로잡아간 인구(人口)는 각각 나누어 역사(役使)시키고 있습니다. 또 충상(充尙)의 아우 충야(充也)와 이만주(李滿住)의 관하(管下) 추도합(秋都哈)은 서울로 올라와서 숙배(肅拜)하려고 하여 이미 회령(會寧)에 도착하였습니다. 또 내가 돌아올 적에 오라별라(吾羅別羅)의 알타리(斡朶里) 도지휘(都指揮) 마무두(馬無豆)가 말하기를, 「포주(蒲州)의 적(賊)들이 조선(朝鮮)으로 향(向)하고자 하는데, 내가 요로(要路)에 의거하여 그들이 나왔다가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이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들이 낭보아한(浪甫兒罕)과 속로첩목아(速魯帖木兒)의 처(妻)를 가지고 핑계를 대고 있는데, 이것은 살아날 방도를 알지 못하는 짓이니, 만약에 인구(人口)를 다 돌려 주지 않는다면 대병(大兵)으로 한번 침입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만, 그들은 끝내 뉘우침이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읽어보고 이르기를,

“가을에 그들을 멸망시켜야 마땅한데, 어찌 다시 다른 방책을 강구하겠는가?”

하였다.

 

세조 33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5월 24일(병자)

강순이 야인 동충야와 왕 시을두가 귀순하고자 함을 아뢰다

함길도 병마 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 강순(康純)이 회령 절제사(會寧節制使) 이시애(李施愛)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이달 5월 11일에 올량합(兀良哈) 동창(童創)의 아우 동충야(童充也)와 이만주(李滿住)의 관하(管下) 왕시을두(王時乙豆) 등이 와서 고(告)하기를, ‘듣건대 대국(大國)6594) 에서 장차 군사를 일으켜 변경(邊境)을 침범(侵犯)한 적(賊)들을 토벌(討伐)하는데, 우리들은 비록 적(賊)에게 간여하지는 않았으나, 그러나 같이 공격 토벌을 당할까 두려우니, 즉시 귀순(歸順)하여 나가서 성상(聖上)께 입조(入朝)하기를 원(願)합니다.’고 하므로, 이 시애가 이르기를, ‘너희들은 아무런 공(功)도 없으니, 변장(邊將)이 마음대로 보낼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또 대답하여 이르기를, ‘지금처럼 날씨가 무더운데 먼 길에 정(情)을 다하여 와서 귀순(歸順)하는데, 제때에 입조(入朝)하지 못하니 몹시 실망하는 바입니다.’고 하였습니다.”하니, 어서(御書)로 회유(回諭)하기를,

“더욱더 군사를 정돈하여 입공(入功)할 계획을 세우고 대명(待命)하라.”

하였다.

註 6594]대국(大國) : 조선. ☞

 

세조 33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7월 5일(병진)

강순이 야인들과의 교전이 있었으며, 적변에 대비하고 있음을 아뢰다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강순(康純)이 부령진 절제사(富寧鎭節制使) 이중영(李仲英)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동량동(東良洞) 체탐 정병(體探正兵) 원길(元吉)이 말하기를, ‘적(賊) 5, 6인이 허수라(虛水剌)에서 말을 달려서 이르므로 화살을 뽑아서 서로 쏘았는데, 세력이 고립 무원(孤立無援)임으로 인하여 대적(對敵)하지 못하고 산으로 올라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정병(正兵) 가운데 화살에 맞은 자가 2인이고 적(賊)들도 또한 화살에 맞아서 갔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경성(鏡城)·길주(吉州)·단천(端川)·갑산(甲山)·삼수(三水)의 여러 진(鎭)의 구자(口子)에 이문(移文)하여 방비(防備)를 조심하도록 하였으며, 신(臣)도 또한 부령(富寧)에 도착하여 적변(賊變)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회유(回諭)하기를,

“지금 보니, 야인(野人)의 성식(聲息)이 이미 자세하고, 방어(防禦)하는 여러 가지 일을 경(卿)에게 맡겨서 조처하게 한다. 다만 어느 곳 어떤 사람이 어느 사람의 지휘(指揮)를 듣고서 나왔는지, 종성(鍾城)과 회령(會寧)의 성 밑에 사는 올량합(兀良哈)을 시켜서 저들에게 가서 조사 문의해서 아뢰라. 또 화살에 맞은 사람들을 구료(救療)하는데 소홀히 하지 말라.”

하였다.

 

세조 33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7월 28일(기묘)

강순에게 야인 동초양이 아내를 거느리고 온 이유를 구별하여 아뢰게 하다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강순(康純)이 종성 절제사(鍾城節制使) 배맹달(裵孟達)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포주(蒲州)의 알타리(斡朶里) 동창(童倉)의 아우 도만호(都萬戶) 동초양(童肖陽)이 와서 말하기를, ‘우리 종족(種族)이 오랫동안 회령성(會寧城) 아래 오음회(吾音會)에 살았는데, 경신년6690) 에 족류(族類)를 따라 포주(蒲州)로 옮겨 가서 살고 있으며, 종형(從兄) 속로첩목아(速魯帖木兒)는 그대로 오음회(吾音會)에 거주하여 대국(大國)에 예속(隸屬)되어 있다가, 지금 이미 작고(作故)하였습니다. 그러나 오음회(吾音會)는 본래 우리가 살던 땅이고 속로첩목아(速魯帖木兒)의 관하(管下) 때문에 이곳에 도로 살고자 하여, 이미 아내를 거느리고 왔습니다. 만약 절제사(節制使)께서 병사(兵使)에게 전(轉)하여 보고하면, 내가 마땅히 아내를 족중(族中)에 맡겨 두고 몸소 본거지(本居地)로 돌아가서 어머니와 아들과 가축(家畜)을 거느리고 오겠습니다.’고 하므로, 신(臣)이 말하기를, ‘국법(國法)에 공적(功績)이 현저한 자에게는 상(賞)이 있는데, 너는 국가(國家)에 대하여 일찍이 조그마한 공효(功效)도 없었으며, 속로첩목아(速魯帖木兒)의 옛 일을 끌어다가 성(城) 아래에 살겠다는 믿지 못할 말을 어찌 마땅히 들어 주겠는가?’ 하였습니다. 동초양(童肖陽)이 오히려 청(請)하여 마지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임시로 핑계하여 대답하기를, ‘행당(行當)6691) 이 친히 가서 구처(區處)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것을 여러 장수(將帥)에게 보이기를,

“쓸데없는 오랑캐를 대접하는 것은 무익(無益)한 일이니, 이를 쫓아내면 그만이다. 살리고 죽이는 것이 우리의 조치에 달려 있다.”

하였다. 이어서 회유(回諭)하기를,

“지금 경의 계본(啓本)을 보고 사의(事意)를 자세히 알았다. 동창의 아우 동초양이 아내를 거느리고 왔으니, 거절(拒絶)할 수도 없고 가볍게 허락할 수도 없다. 마땅히 그에게 말하기를, ‘지금 아뢰었더니, 전지(傳旨)하기를, 「동초양이 아내를 거느리고 왔는데, 그 정유(情由)6692) 가 무엇인가? 공력(功力)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만약 실제로 아무런 까닭이 없다면 충성(忠誠)이겠으나, 까닭이 있다면 사기(詐欺)인 것이다. 그 충성(忠誠)과 사기(詐欺)를 구변(區辨)하여 다시 아뢰어라.」하였다. 전지(傳旨)가 이와 같으니, 붙어서 살도록 둘 수가 없다.’고 하고, 이와 같이 상세히 설명하고 급히 회계(回啓)를 하라.”

하였다.

[註 6690]경신년 : 1440 세종 22년. ☞

[註 6691]행당(行當) : 본직(本職), 곧 함길도 도절제사. ☞

[註 6692]정유(情由) :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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