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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朝鮮王朝實錄)세조실록(40권12년)[29]

작성자山房山(榮國)|작성시간09.12.14|조회수58 목록 댓글 0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4. 세 조 실 록[29] 

 

세조 40권, 12년(1466 병술 / 명 성화(成化) 2년) 10월 2일(경자)

신숙주·한명회·구치관 등이 모화관에서 진법을 익히다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영의정 구치관(具致寬), 중추부 지사(中樞府知事) 강순(康純)·정식(鄭軾)과 병조 판서 김국광(金國光) 등에게 명하여 모화관(慕華館)에서 습진(習陣)하게 하였다.

 

세조 40권, 12년(1466 병술 / 명 성화(成化) 2년) 10월 9일(정미)

함길도 절도사의 장계에 의거하여 변방의 방비를 의논하다.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康孝文)이 승정원(承政院)에서 글을 받들어 아뢰기를,

“회령(會寧)의 하다가사(下多家舍)에 거주(居住)하는 올량합(兀良哈) 아하(阿下)가 와서 알리기를, ‘동랑(東郞)에 거주하는 다랑개(多郞介) 등이 중국(中國)을 침구(侵寇)하려고 군사 1백여 명을 모아서 이미 길을 떠났는데, 나도 또한 군사 2백여 명을 모아 장차 입귀(入歸)하려고 합니다.’ 하며, 또 여포(廬包)에 거주하는 주장합(朱將哈)은 와서 알리기를, ‘아하(阿下) 등이 또 군사 80여 명을 모아 장차 중국(中國)에 입구(入寇)하려고 합니다.’ 하며, 중동량(中東良)에 거주하는 우로합(亐老哈)은 와서 알리기를, ‘다랑합(多郞哈) 등이 전일에 중국(中國)에 입조(入朝)하였을 때 포주(蒲州) 사람들이 박두전(樸頭箭)7666) 으로 쏘아 갈 수 없도록 했기 때문에 그 원수를 갚으려고 하여 군사 30여 명을 모아서 포주(蒲州)에 갔던 것입니다.’라고 하니, 아하(阿下) 등의 말은 비록 믿을 수가 없지마는 그러나 적(賊)의 계획은 헤아리기가 어려우므로, 신(臣)이 여러 진(鎭)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서 변고(變故)에 대비(待備)하도록 했으며, 아울러 평안도(平安道)에도 이문(移文)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와 의정부(議政府)·도총관(都摠管)에게 보이면서 이를 의논하니, 심회(沈澮) 등은 아뢰기를,

“절도사(節度使)의 장계(狀啓)에 의거하여 더욱 변경(邊境)의 방비를 삼가게 하소서.”

하고, 신숙주·한명회 및 강순(康純) 등은 아뢰기를,

“다랑합(多郞哈) 등이 사로잡아 간 사람과 가축(家畜)을 지금 쇄환(刷還)하도록 했는데도 무례(無禮)한 말로써 대답하니, 그들이 포주(蒲州) 사람과 더불어 무리를 지어서 침구(侵寇)할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마땅히 본도(本道)와 평안도(平安道)에 유시(諭示)하여 방어에 관한 모든 일을 전보다 갑절이나 포치(布置)하도록 하소서.”

하니, 신숙주 등의 의논에 따랐다.

[註 7666]박두전(樸頭箭) : 화살의 하나. 그 깃이 좁고 목촉(木鏃)인데, 2백 40보(步)에 쓰는 무과(武科)와 교습용(敎習用)임. ☞

 

 

세조 40권, 12년(1466 병술 / 명 성화(成化) 2년) 10월 10일(무신)

정인지·정창손등이 문안하니 어전에 나와 이야기하고 녹비를 하사하다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봉원군(蓬原君) 정창손(鄭昌孫)·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좌의정 황수신(黃守身)·남양군(南陽君) 홍달손(洪達孫)·보성경(寶城卿) 이합(李㝓)·중추부 영사(中樞府領事) 심회(沈澮), 판사(判事) 심결(沈決)·김수온(金守溫), 지사(知事) 이변(李邊)·성봉조(成奉祖)·황치신(黃致身)·김개(金漑)·강순(康純)·윤사분(尹士昐)·윤사흔(尹士昕), 의빈(儀賓)7667) 심안의(沈安義)·좌찬성 최항(崔恒)·우찬성 조석문(曹錫文)·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개성군(開城君) 최유(崔濡)·공조 판서 구종직(丘從直)·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事) 정자영(鄭自英) 등이 문안(問安)하니, 임금이 모두 내전(內殿)에 들어오도록 명하고,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과 민발(閔發)·최적(崔適)으로 하여금 과녁을 쏘도록 했는데, 때마침 비가 와서 이내 파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정인지·정창손·신숙주·한명회·황수신·심회·심결·윤사흔·김수온·노사신(盧思愼)·강희맹(姜希孟)·임원준(任元濬)·영의정 구치관(具致寬)·이조 판서 한계희(韓繼禧)와 함께 어전(御前)에 나아와서 조용히 이야기하도록 하고 녹비(鹿皮) 각 1장(張)씩을 하사(下賜)하였다.

[註 7667]의빈(儀賓) : 부마 도위(駙馬都尉) 등과 같이 왕족(王族)의 신분이 아니면서 이와 통혼(通婚)한 사람의 통칭. ☞

 

 

세조 40권, 12년(1466 병술 / 명 성화(成化) 2년) 10월 17일(을묘)

신숙주·한명회 등이 문안하니 함길도 고령의 사변을 의논하게 하다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구치관(具致寬)·최항(崔恒)·조석문(曹錫文)이 문안(問安)하니, 임금이 신숙주·한명회·구치관·황수신(黃守身)·강순(康純) 등을 불러 내전(內殿)에 들어오게 하여 함길도(咸吉道) 고령(高嶺)의 사변(事變)을 의논하도록 하였다.

 

 

세조 40권, 12년(1466 병술 / 명 성화(成化) 2년) 10월 29일(정묘)

신숙주 등을 불러 평안도 방어에 관해 의논하고 활쏘기와 상희를 하게 하다

임금이 신숙주(申叔舟)·구치관(具致寬)·한명회(韓明澮)·심회(沈澮)·조석문(曹錫文)·최항(崔恒)·보성경(寶城卿) 이합(李㝓강순(康純)·김국광(金國光)·한계회(韓繼禧)·임원준(任元濬)·노사신(盧思愼)·정문형(鄭文炯)과 김겸광(金謙光)을 불러서 평안도의 방어(防禦)에 관한 모든 일을 의논하도록 하고, 또 우공(禹貢)·김계정(金繼貞) 등을 불러서 담 밑의 잣나무를 쏘게 했는데, 멀기가 80보(步)나 되었으나 김계정이 쏘아서 맞히지 않은 것이 없으니, 임금이 칭찬하기를 마지 않았다. 임금이 명하여 모두 술잔을 올리게 하고, 이내 평안도(平安道)의 군사를 둔치고 방어(防禦)할 방책(方策)을 물으니, 올리는 대답이 매우 임금의 뜻에 맞았다. 임금이 재상(宰相)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이 사람은 참으로 장수이다. 만약 일찍이 임용하지 않으면 늙어서야 장차 이르게 될 것이다.”

하고는 즉시 명하여 주의(注擬)7679) 하도록 하였다. 신숙주와 노사신 등이 임금의 앞에서 상희(象戲)7680) 를 했는데 신숙주가 이기지 못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신숙주에게 이르기를,

“노사신은 상희(象戲)에서 항상 경(卿)보다 못하였는데, 지금은 어찌 이와 같으냐? 경(卿)이 내일 재상(宰相)을 청하여 집에서 잔치를 베풀도록 하라.”

하고는, 인하여 술과 음악을 하사(下賜)하고, 노사신에게도 활과 금낭(錦囊)을 하사(下賜)하였다.

[註 7679]주의(注擬) : 관원을 임명할 때 먼저 문관(文官)은 이조(吏曹), 무관(武官)은 병조(兵曹)에서 후보자 세 사람을 정하여 임금에게 올리던 것. ☞

[註 7680]상희(象戲) : 중국 장기의 일종.

 

 

세조 40권, 12년(1466 병술 / 명 성화(成化) 2년) 10월 30일(무진)

신숙주가 잔치를 베푸니 입직한 도총관 강순도 잔치에 가도록 배려하다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가 잔치를 베푸니, 여러 재신(宰臣)과 추신(樞臣)들이 잔치에 나아갔는데 도총관(都摠管) 강순(康純)은 입직(入直)한다고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잔치에 나아가도록 하고, 도승지(都承旨) 신면(申㴐)을 임시로 도총관(都摠管)의 사무를 맡게 하였다.

 

세조 40권, 12년(1466 병술 / 명 성화(成化) 2년) 11월 2일(경오)

정인지 등을 불러서 생원 6인에게 경서를 강하게 하다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봉원군(蓬原君) 정창손(鄭昌孫)·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중추부 판사(中樞府判事) 김수온(金守溫), 지사(知事) 윤사흔(尹士昕)·강순(康純), 동지사(同知事) 어효첨(魚孝瞻)·구종직(丘從直)·서거정(徐居正)·정자영(鄭自英), 문성군(文城君) 유수(柳洙)·대사헌(大司憲) 양성지(梁誠之)·행 상호군(行上護軍) 송처관(宋處寬)·호조 참판(戶曹參判) 성임(成任)·오성군(筽城君) 유자환(柳子煥)·행 대사성(行大司成) 김예몽(金禮蒙)·공조 참판(工曹參判) 이예(李芮)·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이파(李坡)·형조 참판 정난종(鄭蘭宗)을 불러서 생원(生員) 유척(兪陟) 등 6인에게 경서(經書)를 강(講)하도록 하고, 또 겸사복(兼司僕), 여러 장수를 불러서 좌우(左右)로 나누어 사후(射侯)하게 하였는데, 등준위(登俊衛)의 반희(潘熙)가 많이 맞혔으므로 내구마(內廐馬) 1필을 하사(下賜)하였다.

 

 

세조 40권, 12년(1466 병술 / 명 성화(成化) 2년) 11월 22일(경인)

등준시에 합격한 무신들에게 홍패와 안마를 하사하다

등준시(登俊試)에 합격한 무신(武臣) 최적(崔適) 등에게 홍패(紅牌)를 하사(下賜)하고, 을과(乙科) 이상에게는 안마(鞍馬)를 차등있게 하사(下賜)하였다. 이어서 은영연(恩榮宴)을 의정부(議政府)에서 하사(下賜)하고, 도승지(都承旨) 신면(申㴐)과 좌승지(左承旨) 윤필상(尹弼商)을 보내어 선온(宣醞)을 하사(下賜)하였다.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 영의정 한명회(韓明澮),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우의정 황수신(黃守身)·좌찬성 최항(崔恒)·우찬성 조석문(曹錫文)·중추부 지사(中樞府知事) 강순(康純)·동지사(同知事) 이호성(李好誠)·병조 판서 김국광(金國光)·이조 판서 한계희(韓繼禧)·호조 판서 노사신(盧思愼)·공조 판서 임원준(任元濬)·형조 판서 성임(成任)에게 명하여 잔치를 주관하도록 하였다. 최적(崔適)은 세계(世係)가 미천(微賤)하여 젊었을 때는 우마(牛馬)의 수종(隨從)이 되기까지 했지마는, 그러나 무예(武藝)가 남보다 뛰어나서 임금에게 알려져 대부(大夫)의 지위에 이르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영광스럽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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