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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朝鮮王朝實錄)세조실록(42권13년)[31]

작성자山房山(榮國)|작성시간11.05.05|조회수133 목록 댓글 0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4. 세 조 실 록[31] 

 

 

세조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5월 5일(기사)

평안도 절제사가 야인의 침구를 치계하니 제신에게 대책을 의논하게 하다

평안도 절도사 김겸광(金謙光)이 치계(馳啓)하기를,

“의주 목사(義州牧使) 우공(禹貢)이 3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적강(狄江)의 북쪽을 건너 대창산(大昌山) 밑에 이르러서 갑자기 적병(賊兵)을 만나 싸움을 한지 한참 만에, 우공이 화살이 다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겨우 알몸으로 산에 올라 죽음을 면하고, 다시 흩어진 군졸을 수습하여 초도(椒島)까지 추격하다가, 날이 이미 어두워서 바로 돌아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곧 종친·재상과 제장(諸將)을 불러 이르기를,

“야인(野人) 1천여 군사가 우리 인축(人畜)을 죽이고 약탈하여 갔으니, 장차 앉아서 그 욕(辱)을 받을 것이냐, 그 죄를 성토하여 칠 것이냐?”

하니, 군신이 서로 돌아다보고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은 그 일이 어려워서 말하지 못하느냐?”

하니, 도총관(都摠管) 강순(康純)이 대답하기를,

“진실로 마땅히 군사를 크게 들어 토평해야 하나, 다만 지금은 성하(盛夏)이어서 활의 힘이 해이(解弛)하고 빗물[雨水]이 창일(漲溢)하여 이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올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천고마비[秋高馬肥]의 때를 기다려서 길을 들어가 그 위적(委積)7872) 한 곳을 불을 질러 자뢰(資賴)할 게 없게 하면, 오랑캐를 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여러 사람의 의논이 분분하였다. 〈임금이〉 어찰(御札)을 보이기를,

“지금 야인이 이미 중국을 능멸하고, 또 우리 나라를 모욕하였으니, 이것은 큰 계획과 원대한 계략이 아니고, 오로지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것밖에 알지 못하여, 이로움을 보면 탐내고 체통이 없는 까닭에 기강(紀綱)이 없어서, 조금만 패하면 도망하여 흩어지고, 조금만 이기면 장물(贓物)을 나누니, 이것이 적의 실정이다. 가까운 야인이 우리에게 붙좇아 따르는 까닭에 중국이 꺼렸으나, 우리 나라에서 매사(每事)를 칙지(勅旨)에 따르는 까닭에 믿게 되었으니, 오늘날에 이르러서 이 같은 연고로 공격하려는 것이다. 공격하는 데 이로움은 중국에 효험이 있을 것이고, 변경(邊警)이 영원히 그칠 것이며, 비어(備禦)가 더욱 공고하게 되고, 〈저들로 하여금〉 농사를 지을 수 없게 하는 것이며, 해로운 것은 빗물을 아직 알 수 없는 것이고, 군량을 허비하는 것이며, 남을 대신하여 적을 받는 것이고, 분주하게 명령을 받는 데 피로함이다.”

하니,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 와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 등이 이르기를,

“오랑캐가 지금 우리에게서 이익을 얻어 자못 교만한 마음이 있어, 방비하고 경계함이 없을 것이니, 그 뜻하지 않음을 타서 공격하는 것이 편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자못 옳게 여기고,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고, 강순(康純)·오자경(吳子慶)·어유소(魚有沼)·최적(崔適)·이극균(李克均) 등을 비장(裨將)으로 삼아, 정병(精兵)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5도(道)로 나누어 공격해 들어가게 하였으니, 계획이 이미 정하여졌다. 임금이 이극균을 불러 그 책략(策略)을 물으니, 이극균이 대답하기를,

“옛날에 허형손(許亨孫)이 패할 적에 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적의 경계에 들어가서 산천의 험한 곳을 역력히 기억합니다마는 이것은 군사를 쓸만한 곳이 못됩니다. 하물며 지금 풀과 나무가 우거지고 빗물이 창일하니, 어찌 나의 장기(長技)를 쓸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기뻐하지 아니하고 이극균에게 이르기를,

“국가의 일이 오직 인주[主]와 장상(將相)의 모책(謀策)에 달여 있을 뿐이므로, 네가 현량(賢良)이 되어서 〈너를〉 불러 주책(籌策)을 묻는 바인데, 너는 어찌하여 인주의 뜻과 조정의 계책을 알지 못하고 동쪽을 묻는데 서쪽을 대답하느냐? 고금 천하(古今天下)에 이와 같은 욕을 받고도 보복하지 않은 자는 없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범의 굴을 탐지(探知)하지 않고서 어찌 범의 새끼를 얻겠는가? 이와 같은 소위(所爲)로써 이와 같이 하고자 함을 구하는 것은 나무에서 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거의 이것을 이른 것이다. 내가 어찌 크게 무공(武功)을 세우는 것을 좋아해서 얕은 꾀를 경솔히 생각하여, 늙게 이러한 거사를 하겠느냐? 내가 매양 조정의 신하와 더불어 항상 민망하게 여기는 것은 중국이 이들 오랑캐에게 제재를 받는 것인데, 지금 어찌 치욕을 참고 설원(雪寃)하지 않겠느냐? 사마양저(司馬穰苴)7873) 가 장가(莊賈)를 참(斬)하고, 손무(孫武)가 궁빈(宮嬪)을 참(斬)하였으며, 월왕(越王)이 개구리[蛙]에게 예(禮)를 하였으니, 사졸(士卒)들이 스스로 분발해야 할 터인데, 너는 지금 정역(征役)을 꺼려서 적에 대한 의분의 뜻은 없고, 나의 모책(謀策)을 저상(沮喪)함이 어찌 이와 같으냐? 신자(臣子)의 의리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인데, 지금 너로 하여금 어렵고 위험한 데에 보내는데, 너는 나아가기를 즐겨하지 않느냐?”

하니, 이극균이 부복(俯伏)하고 대답하기를,

“다만 마음속에 간직한 의견을 진달하였을 뿐입니다. 말을 달리고 전쟁하는 데는 나라를 위하여 사는 것을 버리는 것이 이 신의 뜻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시는 많은 말을 하지 말라.”

하였다.

[註 7872]위적(委積) : 곡식 따위를 모아 쌓아 둠. ☞

[註 7873]사마양저(司馬穰苴) : 춘추 시대 제(齊)나라의 장수. ☞

 

 

세조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5월 7일(신미)

모화관에 거둥하니 재추가 입시하고 장진충·정난종 등에게 진법을 익히게 하다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관문(館門)에 나아가니,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좌의정 심회(沈澮)·우의정 최항(崔恒)·남양군(南陽君) 홍달손(洪達孫), 중추부 지사(中樞府知事) 윤사흔(尹士昕)·강순(康純), 좌찬성(左贊成) 조석문(曹錫文)·우찬성(右贊成) 윤자운(尹子雲)·우참찬(右參贊) 김국광(金國光)·서원군(西原君) 한계미(韓繼美)·이조 판서 한계희(韓繼禧)·호조 판서 노사신(盧思愼)·예조 판서 강희맹(姜希孟)·공조 판서 임원준(任元濬)·형조 판서 서거정(徐居正)·예조 참판 이계손(李繼孫)·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事) 정문형(鄭文炯)·병조 참판 박중선(朴仲善)·형조 참판 정난종(鄭蘭宗)·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이윤인(李尹仁)·공조 참판 안빈세(安貧世)와 종친(宗親)·승지(承旨) 등이 모시었다. 임금이 장진충(張進忠)과 정문형·정난종·어유소(魚有沼)·금산 도정(金山都正) 이연(李衍)·평성 도정(平城都正) 이위(李徫), 이형손(李亨孫)·어세공(魚世恭)·이돈인(李惇仁)·신말주(申末舟), 호산 도정(湖山都正) 이현(李鉉), 김유(金紐)·이의형(李義亨)·유흥무(柳興茂)·이철견(李鐵堅)·이극균(李克均)·구치동(丘致峒)·최적(崔適) 등으로 하여금 장수를 삼아,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우전(羽箭)을 사용하여 쫓아가며 서로 쏘게 하고, 또 장사(將士)로 하여금 혹은 말을 달리며 쏘고, 혹은 격구(擊毬)하고, 혹은 멀리 쏘고, 혹은 말을 타고 창(槍)을 쓰게 하여, 그 뛰어난 것을 시험하고, 또 천례(賤隷)로 하여금 과녁을 쏘고, 손으로 치게 하여, 잘하는 자는 베[布]로 상을 주고, 이어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세조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5월 22일(병술)

도총사의 종사관 김관이 이시애의 모반한 정상을 아뢰다

명하여 우참찬(右參贊) 김국광(金國光)과 이조 판서 한계희(韓繼禧)·도승지(都承旨) 윤필상(尹弼商)에게 금중(禁中)에서 유숙하면서 함길도의 사변에 대기하게 하였는데, 도총사(都摠使)의 종사관(從事官) 김관(金瓘)이 왔으므로, 〈임금이〉 강녕전(康寧殿)으로 불러 들였다. 김관이 아뢰기를,

“회양(淮陽)의 노상에서 한 역마를 탄 사람이 숲 사이로 달려가 숨는 자가 있기에, 그를 잡아서 물었더니, 바로 함흥(咸興) 사람 김성주(金成柱)였습니다. 김성주는 윤자운(尹子雲)이 올리는 ‘반적들이 신면(申㴐) 등을 죽인 일’을 기록한 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글은 윤자운이 손수 작성한 것이 아니고, 실은 적당(賊黨)들이 작성한 것으로서, 윤자운을 협박하여 서명(署名)한 것이었습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신 관찰사(觀察使) 신면(申㴐)은 반신(反臣) 신숙주(申叔舟)의 아들로서, 도리어 「이시애(李施愛)가 모반(謀反)하였다.」 하며, 자칭 중위 장(中衛將)이라 하고, 박종문(朴宗文)과 구치동(丘致峒)을 좌위 장(左衛將)·우위장(右衛將)으로 삼아, 발병부(發兵符)도 없이 원판(圓板)의 표신(標信)을 사용해서 북청(北靑) 이남의 군사를 징발하여 모으고는, 변처관(邊處寬)으로 하여금 군사를 영솔하여 함관령(咸關領)에 웅거하게 하고, 이효석(李孝碩)은 송동령(松洞嶺)에 웅거하게 하며, 또 평안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거민(居民)들을 모두 죽이고서, 마침내 서울로 향하려고 하고, 또 심원(沈湲)으로 하여금 이시애의 족류(族類)들을 잡아 가두게 한 까닭에, 지금 모두 죽이고, 신으로 하여금 동쪽 백성들을 위로하여 안심시키게 하였으므로, 신면의 모반에 간여하지 않은 자는 아직 머물러 두고 죽이지 않았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김성주가 또 이르기를, ‘이시합(李施合)이 재상(宰相)의 의물(儀物)을 갖추고 군사를 영솔하여 함흥(咸興)에 도착해서 스스로 말하기를, 「지금 유지(諭旨)가 있었는데, 나의 형(兄) 이시애를 절도사(節度使)로 삼고, 나를 우후(虞候)로 삼았다.」 하고, 마침내 신면(申㴐)·구치동(丘致峒)과 도사(都事) 박종문(朴宗文)·정평 부사(定平府使) 이효석(李孝碩), 그리고 윤자운(尹子雲)의 반인(伴人)·가노(家奴) 등을 죽이고, 윤자운을 남청방(南廳房)에 가두고서 군사들로 두어 겹을 둘러쌌으며, 심원(沈湲)·손욱(孫旭)과 본부(本府)의 판관(判官) 변처관(邊處寬)·영흥 판관(永興判官) 김후(金厚) 등을 옥에 가두고, 또 전(前) 군사(郡事) 임관(任寬)을 고원(高原)에 가두고서 군사를 모아 부성(府城)을 지킨다.’고 하였으나,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이 김성주를 회양(淮陽)에 수금(囚禁)하였을 때는 이시합은 실지로 함흥(咸興)에 오지 않았었는데, 김성주가 거짓말을 하여, 함흥에서 반적들이 다섯 사람을 죽인 죄를 면하게 하려고 함이었습니다. 신면이 처음에 함흥부(咸興府)에 이르렀을 적에, 신면의 아우 신정(申瀞)의 처(妻)의 종인 나근내(羅勤乃)가 부성(府城) 밖에 살다가, ‘부인(府人)들이 새 감사(監司)가 〈함흥부에〉 이르기를 기다려서 죽이고 반적에게 응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신면의 종인(從人) 곽인중(郭仁仲)에게 은밀히 말하고 또 이르기를, ‘급히 남도(南道)로 돌아가면 〈화를〉 면할 수 있다.’고 하니, 곽인중이 이를 고하였습니다. 신면이 말하기를, ‘내가 지금 본영(本營)에 이르러 양식과 기계가 모두 구비하였는데, 어찌 두려움을 피하여 반적들로 하여금 성을 점거하고, 솔개가 날개를 편 것같이 〈득의(得意)하게〉 함이 옳겠느냐? 오늘의 일은 진격만이 있고 퇴각은 없을 것이다. 이것만이 내가 성상의 은혜에 보답할 때다.’ 하고는, 마침내 남도(南道)의 군사를 징발하여 수어(守禦)의 계책으로 삼았는데, 18일 밤 초경에 함흥 여수(咸興旅帥) 윤극검(尹克儉)과 사직(司直) 이중화(李仲和) 등이 ‘신면이 모반(謀反)하였다.’고 성언(聲言)하고, 잡아 죽이려고 하여, 마침내 감사(監司)의 아문을 포위하고 공격하며 부르짖기를, ‘이영공(李令公)7888) 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미 왔으니, 신면은 빨리 나오너라.’ 하니, 신면이 곽인중을 시켜 말하기를, ‘너희 고을 사람이 반적을 오인하니 그것을 살피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반적이 문틈으로 곽인중을 활로 쏘아 죽이고, 또 신면이 누(樓)로 올라가니, 반적이 난간에 들어가 칼을 빼어 들고 앞으로 돌진하며 호통하여 말하기를, ‘네가 지금 속히 내려오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니, 신면이 말하기를, ‘너희 한 고을 사람은 어찌 한 사람도 순리(順理)와 역리(逆理)를 아는 자가 없느냐? 내가 명령을 받고 너희 한 도(道)의 사람을 안무(按撫)하러 왔는데, 네가 반적과 응하여 나를 죽이려 하니, 내 어찌 〈너에게 항복하여〉 삶을 도둑질하겠느냐?’ 하였습니다. 적의 공격이 더욱 빠르고, 횃불을 나열하여 방패로 가리며 사면에서 어지럽게 활을 쏘며 먼저 사람을 시켜 신면의 화살통[矢筩]을 훔치게 하니, 신면이 대전(大箭) 6매(枚)를 가지고 기둥에 의지하여 활을 쏘아 적의 얼굴을 맞히었으나, 적이 또 화포(火砲)를 던져서 연기와 화염이 서로 창일하니, 신면이 형세가 다하여 활을 꺾어 던지고, 마침내 아래로 떨어져 담장을 넘으려고 하는데, 적이 죽이고, 구치동(丘致峒)과 박종문(朴宗文)·녹사(錄事) 엄유구(嚴悠久)와 반인(伴人)·가노(家奴) 등까지 모두 죽였으며, 윤자운(尹子雲)을 객사(客舍)의 별실(別室)에 가두었습니다.”

하였다. 신면은 승지(承旨)가 된 지 5년이 되었어도 일찍이 과실이 없었으며, 임금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자못 자상하고 명확하였다. 죽을 때의 나이가 30이며, 아들이 둘이 있으니, 신용관(申用灌)과 신용개(申用漑)이다. 김관(金瓘)이 원병(援兵)을 청하니, 임금이 김국광(金國光)과 한계희(韓繼禧)·윤필상(尹弼商)을 불러 김관과 더불어 의논하게 하고, 또 말하기를,

“이시애(李施愛)가 모반한 정상이 이미 드러났으니, 마땅히 관군(官軍)을 속히 출발시켜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에게 붙여 주어라. 나도 또한 친정(親征)하겠다.”

하였다. 김관이 주대(奏對)하기를 물흐르는 것과 같이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쓸 만한 사람이다.”

하고, 김관에게 명하여 〈도총사〉 준에게 말하게 하기를,

“속히 처치하려 들지 말고, 반드시 대군(大軍)을 기다리라.”

하였다. 구치관(具致寬)과 우의정 홍윤성(洪允成)·중추부 지사(中樞府知事) 강순(康純)·행 상호군(行上護軍) 어유소(魚有沼)·행 첨지사(行僉知事) 허형손(許亨孫)·행 호군(行護軍) 이형손(李亨孫)·행 상호군(行上護軍) 유균(柳均)·파산군(巴山君) 조득림(趙得琳) 등을 불러 밤새도록 의논하게 하니, 모두 아뢰기를,

“이시애가 반란을 꾀한 것이 어찌 감히 군사를 들어 서울로 향하겠습니까? 정녕코 함길도를 몰래 점거하려는 것일 것입니다. 이 도는 요새[關塞]가 많아서, 반적(反賊)이 만약 먼저 점거하게 되면, 대병(大兵)이 들어가기 어려우니, 5진(鎭)에 은밀히 유시하여 역리(逆理)와 순리(順理)를 알게 하면, 이시애는 쉽게 제어될 것입니다.”

하였다.

[註 7888]이영공(李令公) : 이시해를 말함. ☞

 

 

세조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5월 23일(정해)

이시애의 난을 토벌할 원군을 파견하고 어찰을 내려 군민을 효유하게 하다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종친(宗親)과 장상(將相)을 불러 의논하기를,

“이시애가 아직도 죽음을 당하지 않은 것은 군사와 백성들이 순역(順逆)7889) 을 알지 못함이다. 만약 순역을 알게 되면 스스로 서로 이반(離叛)하여, 형세가 곧 해체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시켜서 군사와 백성들을 효유(曉喩)하여 순역을 명확히 알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할 뿐이다.”

하였다. 이때 함흥(咸興)의 토관(土官) 이중화(李仲和) 등이 이시애의 편지[折簡]를 받고 살륙(殺戮)을 함부로 행하여, 형세가 날로 강성[鴟張]하니,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과 부사(副使) 조석문(曹錫文) 등이 그 위풍만 바라보고 겁내어, 회양(淮陽)에 도착하여서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르고 진격하지 못하므로, 이에 임금이 도총관(都摠管) 강순(康純)을 진북 장군(鎭北將軍)으로 삼아 평안도 군사 3천 명을 영솔하여 영흥(永興)을 넘어 들어가게 하고, 병조 참판(兵曹參判) 박중선(朴仲善)을 평로 장군(平虜將軍)으로 삼아 황해도 군사 5백 명을 영솔하고 문천(文川)을 넘어 들어가게 하며, 또 경중(京中)의 정병(精兵) 1천 명을 조발(調發)하여 어유소(魚有沼)에게 주어, 직접 준(浚)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게 하고, 강순 등으로 하여금 도착하는 곳의 읍창(邑倉)을 풀어서 군량(軍糧)을 지급하게 하였다. 선전관(宣傳官) 김이정(金利貞)을 충청도에 보내고, 민신달(閔信達)과 경임(慶絍)을 경기좌우도(京畿左右道) 에 보내어, 각각 군사 1천 명을 징발하게 하여, 경기의 군사는 민신달과 경임으로 하여금 영솔하여 준(浚)에게 붙게 하고, 또 민신달과 경임에게 유시하기를,

“군사들이 싸 가지고 간 양식이 다하게 되면, 도착하는 곳의 읍창(邑倉)을 풀어서 지급하라.”

하고, 충청도의 군사는 김이정으로 하여금 영솔하여 서울[京師]로 오게 하고, 또 충청도·경기 양도의 무재(武才)가 있는 수령(守令)과 한산인(閑散人)을 징발하였다. 어찰(御札)로 준(浚)에게 유시하기를,

지금 경중의 정병(精兵) 1천 명을 어유소에게 부쳐 발송하고, 강순에게 평안도의 군사 1만 명을 영솔하여 영흥(永興)을 넘게 하였으며, 박중선에게 황해도의 군사 8천 명을 영솔하여 문천(文川)을 넘게 하였으니, 그대는 절도있게 하여 반드시 정세를 보아 신중하게 하기를 힘쓰고, 반드시 속히 하려고 하지말라. 만약에 일이 반드시 속결(速決)되게 하려면, 그 귀중함이 머뭇거리지 않는 데 있으니, 군량은 창고를 풀어서 지급하고, 만일 부족하게 되면, 근경(近境) 제읍(諸邑)의 미곡(米穀)을 실어다 계속하여 지급하도록 하라. 내 장차 대병(大兵)을 이끌고 친정(親征)하겠으니, 제군(諸軍)을 응접(應接)하라.”하고, 마침내 우참찬(右參贊) 김국광(金國光)을 지응사(支應使)로 삼아, 모든 일을 이바지[供頓]하는 데 간략함을 따르게 하였다. 임금이 사람을 함길도에 보내어서 순역(順逆)을 개유(開諭)하려고 하는데, 도로가 막혀서 마땅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길주(吉州) 사람 마흥귀(馬興貴)의 아들 마현손(馬賢孫)이 자천(自薦)하며 이시애를 궐하(闕下)에 잡아 올 것을 원하므로,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불러 보고는, 제읍(諸邑)의 유향 품관(留鄕品官)7890) 등에게 효유하는 글을 주어 보냈으니, 그 글에 이르기를,

“이시애가 ‘밀지(密旨)가 있다.’고 사칭(詐稱)하고 강효문(康孝文)·황기곤(黃起崐)·신면(申㴐)과 수령(守令)·군관(軍官) 등을 살해하였으니, 너희들은 군사와 백성들을 효유하여 순역(順逆)을 명확히 알게 하고, 이시애를 잡아서 귀성군(龜城君) 준(浚)의 처치(處置)를 기다리게 하라.”

하였는데, 또 길주(吉州) 사람 최유(崔濡)의 아들 최윤손(崔閏孫)이 또한 이시애를 잡을 것을 자원하니, 임금이 그 사람됨이 광망하고 경솔함을 보고, 마현손과 더불어 앞서기를 다투어 사기(事機)를 낭패할까 염려하여, 뒤에 따라가게 명하였다.

[註 7889]순역(順逆) : 순리와 역리. ☞

[註 7890]유향 품관(留鄕品官) : 각 지방에서 수령(守令)의 정치를 도와 풍속을 바로잡고 향리(鄕吏)의 잘못을 규찰하는 일을 맡았던 지방의 유력자. ☞

 

 

세조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5월 25일(기축)

도총사 이준에게 이시애를 토벌하는 책략을 적은 어찰의 유서를 송부하다

군관(軍官) 한숙후(韓叔厚)를 불러 어찰(御札)의 유서(諭書) 2통(通)을 주어 이준(李浚)에게 송부하였으니, 그 하나에 이르기를,

“대저 적이 궁하면 도망하는 것이다. 지금 북도(北道)에서 반적을 따르는 자는 진실로 순역(順逆)을 알지 못하고 협종(脅從)하는 까닭에 순역을 명백히 알면 형세가 반드시 와해(瓦解)되어 저희 무리 가운데에서 적을 칠 것이다. 이제 그대는 제진(諸鎭)의 군사를 징모(徵募)하여 병세(兵勢)는 크게 확장하고, 나도 또한 계속하여 군사를 보내서 네 힘을 크게 할 것이니, 그대는 기회를 타서 지휘하되, 진영(陣營)을 연결하여 핍박(逼迫)하거나, 곧바로 함흥(咸興)을 공격하거나, 혹은 승세를 타서 몰아치는 것은 네 짐작(斟酌)에 달려 있다.”

하고, 그 하나에 이르기를,

“그대가 당시에는 군사가 적기 때문에 경솔히 진격할 수가 없어서 후병(後兵)을 기다린 것은 마땅하였다. 지금 경중(京中)의 군사 2천을 보냈으니, 네 힘이 족할 것이다. 마땅히 선봉(先鋒)을 보내서 속히 함흥을 취하고, 그대는 철령(鐵嶺)을 넘어 멀리 추격하여 진공(進攻)하라. 나도 또한 대병(大兵)을 가지고 급히 안변(安邊)에 이르면, 평안도·황해도와 하도(下道)의 군사들이 또한 운집(雲集)하여 따를 것이다.”

하였다. 또 유시하기를,

“듣건대 북도(北道)의 수령(守令)들이 모두 적에게 갇히고 죽음을 당해서, 창고를 열고 백성을 진휼(賑恤)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굶주리고 생업(生業)을 폐하였으며, 소동(騷動)이 안정되지 않는다고 하니, 그대는 마땅히 사람을 제읍(諸邑)에 나누어 보내서, 〈백성들을〉 진휼하고 존무(存撫)하며, 순역(順逆)을 효유(曉諭)하라.”

하고, 또 진북 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에게 유시하기를,

“관장하는 평안도 군사를 반드시 액수를 채워서 들어가게 되면, 혹시 사기(事機)에 미치지 못할까 염려되니, 경은 마땅히 먼저 1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고, 그 나머지 군사는 뒤따라 이르게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세조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5월 29일(계사)

도총사 이준·절도사 허종·제읍의 군민 등에게 유시하는 글을 보내다

임금이 융복(戎服) 차림으로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종친(宗親)·재추(宰樞)를 불러 술자리를 베풀고, 김백겸(金伯謙)과 윤흥신(尹興莘) 등에게 명하여 술을 올리게 하고는, 어찰(御札)로써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과 절도사(節度使) 허종(許琮)과 제읍(諸邑)의 관리(官吏)·군민(軍民) 등에게 유시하는 글을 김백겸과 윤흥신에게 주어 보냈다. 준(浚)에게 유시하는 글에 이르기를,

“1.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구적(寇敵)이 궁하면 핍박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너는 진중함을 가지고 군사를 기다려라. 이것은 당종(唐宗)7903) 이 백벽(栢壁)에 둔칠 때의 계책이니, 매우 좋은 계책이다. 만약 공격할 만한 형세가 있으면 마땅히 빠른 뇌성(雷聲)에 귀를 가릴 틈이 없는 것처럼 하라. 이것이 당종(唐宗)의 무뢰(武牢)의 용맹이니, 또한 매우 좋은 계략이다.

1. 장마[霖雨]에 물이 창일하여, 궁시(弓矢)가 모두 풀렸으니, 비록 백만의 무리라 하더라도 실상 쓰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양궁(良弓) 1천 장(張)과 현(弦) 1천 5백, 장피(獐皮) 50장, 장전(長箭) 5백 부(部)를 선택하여 너에게 부친다.

1. 너는 사람을 나누어 순역(順逆)을 효유(曉諭)하는 것이 매우 좋겠다.

1. 강원도에는 군량[糧餉]의 수량이 적으니, 너는 기미를 보아 안변(安邊)에 나아가서 웅거하게 되면 군량이 넉넉하고, 적세(賊勢)는 날로 위축될 것이다. 너는 다시 생각하고 유시(諭示)만 좇을 필요가 없다.”

하였다. 허종에게 유시하는 글에 이르기를,

“경(卿)의 서장(書狀)을 보고 이미 경이 말한 바를 잘 알았다. 군민(軍民)을 효유하면 의혹이 풀린다고 한 경의 말이 옳다. 그러므로 유서(諭書) 40통(通)을 윤흥신(尹興莘)에게 부쳐 보내니, 경은 속히 제읍(諸邑)에 나누어 배포하는 것이 옳다. 또 듣건대, 경은 강효문(康孝文)의 반당(伴倘) 2인을 안변(安邊)에 가두었다고 하니,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반드시 경을 가리켜 이시애(李施愛)의 당(黨)이라고 할 것이다. 경은 무슨 말로써 이시애를 토죄할 것이냐? 이는 국가에서 이시애를 토벌하는 뜻에 정히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하였다. 관리(官吏)와 군민(軍民)에게 효유하는 글에 이르기를,

“이시애가 반역(反逆)을 하여 제진(諸鎭)의 관인(官人)을 모두 죽이고 노복(奴僕)에 이르기까지 죽였으며, 절도사(節度使)를 사칭하여 인중(人衆)을 속이고 홀려서 마침내 군민(軍民) 등으로 하여금 모두 협종(脅從)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명하여 귀성군(龜城君) 준(浚)을 평안도·함길도·황해도·강원도 4도의 병마 도총사(兵馬都摠使)로 삼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조석문(曹錫文)을 부사(副使)로 삼아, 평안도 진북 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과 황해도 평로 장군(平虜將軍) 박중선(朴仲善) 등을 거느리고 토벌하게 하고, 어세공(魚世恭)을 본도 관찰사(本道觀察使)로 삼고, 허종(許琮)을 절도사(節度使)로 삼았으니, 너희들이 능히 역적 이시애 등을 잡는 자가 있으면, 비록 이시애의 친당(親黨)이라 하더라도 그 죄를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논상(論賞)하기를 한결같이 전번에 내린 유서(諭書)와 같이 하겠다.”

하였다.

[註 7903]당종(唐宗) : 당(唐)나라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 ☞

 

 

세조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6월 15일(무신)

상의원에 전지하여 이준·조석문·허종 등에게 줄 의복을 만들게 하다

상의원(尙衣院)에 전지하기를,

“이준(李浚)과 부사(副使) 조석문(曹錫文)·절도사(節度使) 허종(許琮)·진북 장군(鎭北將軍)강순(康純)·평로 장군(平虜將軍) 박중선(朴仲善)·관찰사(觀察使) 어세공(魚世恭) 등에게 줄 의복(衣服)을 만들도록 하라.”

하였다.

 

 

세조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6월 16일(기유)

도총사 이준이 진북장군 강순에게 이시애 토벌 작전을 글을 써서 주다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이 글을 써서 진북 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에게 준 것에 이르기를,

“함관령(咸關嶺)을 넘을 기일과 제장(諸將)과의 약속(約束)은 이미 평로 장군(平虜將軍) 박중선(朴仲善) 등에게 공(公)의 지휘를 듣게 하고, 또 어유소(魚有沼)·허종(許琮)으로 하여금 진영을 연결하여 송동(松洞)을 후원하게 하였으니, 공(公)은 사람으로 하여금 응원을 상약(相約)하는 것이 가하다. 그러나 경솔하게 진격할 수도 없고 또한 기회를 잃을 수도 없으니, 형세를 관망하고 징후(徵候)를 탐지하여 먼저 적의 우익(羽翼)을 베는 것이 가장 좋겠다.”

하였다.

 

 

세조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6월 22일(을묘)

지인 김경례를 보내어 이시애 토벌 동정을 고하개 하다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이 함흥(咸興)을 출발하여 함관령(咸關嶺) 아래 신원(新院)에 둔병(屯兵)하고, 진북 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이 홍원(洪原)에 있으면서 지인(知印) 김경례(金敬禮)를 보내 와서 고(告)하기를,

“듣건대 이시애(李施愛)는 야인에게 청병(請兵)하여 군세(軍勢)가 매우 성합니다.”

하고, 또 함흥 정병(咸興正兵) 한득의(韓得義)가 와서 고하기를,

“듣건대 북청(北靑)의 아리(衙吏)가 이르기를, ‘이시애는 5진(五鎭)의 병사를 뽑아 이달 19일에 이성(利城) 다보동(多寶洞)에서 머물고, 27일에 북청(北靑)·홍원(洪原)에 들어왔는데, 여수(旅帥) 김징(金澄)이 병사를 거느리고 거산(居山)에 마중나왔다.’고 합니다.”

하였다. 강순(康純)이 또 글을 준(浚)에게 주기를,

“이달 20일에 내가 종개(鍾介)·산개(山介)의 두 고개 아래에 이르러 결진(結陣)하였는데, 북청 정병(北靑正兵) 최복시(崔福時)가 와서 고하기를, ‘여수(旅帥) 이약동(李約同)은 군대 4대(隊)를 거느리고 본부(本府)의 종고대(終高台)에 주둔하고, 김징(金澄)은 군사 4대(隊)를 거느리고 차기(車岐)에 주둔하였으며, 갑산군(甲山軍)은 이성(利城)의 북동(北洞) 고사리포(高沙里鋪)에 주둔하였다.’고 합니다.”하니, 준(浚)이 대답하기를,

“평로 장군(平虜將軍) 박중선(朴仲善)과 헤아려서 종개(鍾介)·산개(山介)로 길을 나누어 진입하고, 절도사(節度使) 허종(許琮)·대장(大將) 어유소(魚有沼)는 양화(楊花)로부터 들어오되, 강순(康純)은 바로 제장(諸將)과 북청(北靑)에 진입할 계책을 의논하라.”

하니, 맹패장(猛牌將) 이숙기(李淑琦)가 말하기를,

“북청에 들어가 점거하면 세 가지 이점이 있습니다. 읍내(邑內)에 수목(樹木)이 있어 벌목(伐木)하여 목책을 하니 한 가지 이롭고, 먼저 창고의 곡식을 점거하니 두 가지 이롭고, 적의 소굴에 비밀히 접근하여 형세를 탐후하기 쉬우니 세 가지 이롭습니다. 평포(平浦)에 유둔(留屯)하면 세 가지 불리함이 있으니, 군사가 들에 처하여 장맛비가 열흘을 연달으면, 활이 풀리고 갑옷이 무거우니 한 가지 불리하고, 앉아서 군량만을 허비하니 두 가지 불리하고, 종고대(終高台)의 물이 창일하면 군사가 건널 수 없으니, 세 가지 불리합니다.”

하니, 강순(康純)이 탄식하기를,

“오늘의 책략은 이숙기(李淑琦)가 제일이다.”

하니, 제장(諸將)이 모두 옳게 생각하여, 드디어 종개령(鍾介嶺)을 넘어 북청(北靑)에 들어가 주둔하였다.

 

 

세조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6월 23일(병진)

진북 장군 이준에게 이시애 토벌 작전에 관한 글을 주다

진북 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이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에게 글을 주기를,

“우리 군사가 북청(北靑) 앞 평야에 주둔하니, 북청(北靑) 정병(正兵) 김원생(金元生)이 와서 고하기를, ‘이시합(李施合)이 배패(陪牌) 90인을 거느리고, 본부에 이르러 군량을 흩으고 단천(端川)을 향해 돌아갔으며, 이 앞서 12일 사이에 이명효(李明孝)는 이승언(李升彦)·서숭례(徐崇禮)·맹득미(孟得美)·박자곤(朴自崐)·차운혁(車云革)·정휴명(鄭休明) 등을 죽이고, 오직 마현손(馬賢孫)만은 이약동(李約同)의 족친(族親)이라 하여 비호(庇護)하고 죽이지 않았다.’ 하고, 북청(北靑) 사람 이숭명(李崇明)이 와서 고하기를, ‘이시합(李施合)이 이달 19일에 2만 2백여 군사를 거느리고 본부(本府)에 이르러, 군량을 흩으고는 이성(利城)으로 향해 돌아갔다.’고 하며, 또 이시합(李施合)이 이명효(李明孝)와 홍원(洪原)·북청(北靑)·이성(利城)·갑산(甲山)의 병사를 거느리고 북청의 여주을현(汝注乙峴)에 주둔하고, 이시애(李施愛)는 단천(端川) 이북의 제진(諸鎭)의 군사와 야인(野人) 5백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성(利城) 고사리포(高沙里鋪)로부터 북청(北靑)의 두어소(頭於所)까지 관군(官軍)을 협공(夾攻)하려 합니다.”

하고, 또 글을 주기를,

“우리 군사가 들어온 뒤로부터 노상(路上)의 초적(草賊)이 도적으로 발현하여 인마(人馬)를 겁탈하니, 왕래하며 변을 보고하는 자가 약탈당할까 염려됩니다. 마땅히 속히 병사를 산개(山介)·종개(鍾介)·양화(楊花) 등의 요로에 보내어 관방(關防)을 공고히 하고, 또 군중(軍中)에 역기(驛騎)가 없어 변을 보고하는 것이 지체되어 사기(事機)를 잃을까 두려우니, 모름지기 역기를 많이 보내며, 또 내가 군사에게 북청(北靑)에서 울타리[寨]를 설치하여 오래 있으려고 계획하니, 모름지기 수령(守令)을 임기로 차견(差遣)하여 독촉하여 보내 주시오.”

하니, 준(浚)이 즉시 군관(軍官) 경정(慶禎)을 보내어 치계(馳啓)하였다.

 

 

세조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6월 24일(정사)

진북 장군 북청에 진입할 때 절도사 허종과 의논하다

진북 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이 북청(北靑)으로 진입할 적에 절도사(節度使) 허종(許琮)이 의논(議論)하기를,

“대군(大軍)이 만약 관부(官府)에 웅거하여 결진(結陣)하면, 화곡(禾穀)을 짓밝아 백성이 원망할 것이니, 냇가에 진(陣)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하니,

강순이 말하기를,

“대사(大事)를 이룬 자는 작은 폐단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니, 이제 적로(賊路)가 사방으로 통하는 땅에 처하여 울타리를 설치할 만한 목석(木石)이 없다. 만약 적병(賊兵)이 밤을 타서 돌격하여 오면 무엇으로 방어하겠는가?”

하였으나, 허종(許琮)이 굳이 우기기를 그만두지 않으므로, 비장(裨將) 김교(金嶠)가 말하기를,

“부중(府中)에 웅거하여 결진하여도 창고가 그 안에 있으면 적병이 비록 오더라도 족히 염려가 되지 않습니다.”

하니, 드디어 그 계교를 따라 부내(府內)에 진영하였다. 강순이 사졸(士卒)로 하여금 사람마다 각각 나무를 벌채하여다 안에는 목채(木寨)를 설치하고 밖에는 녹각성(鹿角城)7925) 을 설치하게 하였더니, 사졸이 분기(忿氣)를 다투고 힘을 다하여 잠깐 만에 이루었는데 매우 견고하였다. 또 성 밖에다 구덩이를 파게 하였는데, 밤 4경[四鼓]에 이시애(李施愛)가 1만 6천여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수겹으로 포위하여 그 서면(西面)을 공격하니, 거의 무너지고, 또 물의 상류(上流)를 막아 우리 진영에 흐르지 못하게 하여, 부내(府內)의 여사(廬舍)에 불을 놓아 사르고, 화전(火箭)을 놓아 북을 치고 떠들며 크게 부르짖으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또 오랑캐 말을 하여 기세를 폄으로써 삼면(三面)을 합공(合攻)하므로, 강순(康純)이 군사(軍士)로 하여금 함매(銜枚)7926) 하고 마족(馬足)을 매고 벽을 견고히 하고 더불어 싸우지 못하게 하니, 진중(陣中)이 고요하기가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적(賊)이 진(陣)을 옮기려 생각하고 드디어 차츰 물러갔다가 새벽에 적이 다시 진격하므로 더불어 싸운 지 한참 만에, 강순이 본도(本道) 사람의 군관(軍官) 방서동(方瑞同)·지득련(池得連)·이연년(李延年) 등으로 하여금 적을 부르게 하여 이르기를,

“너는 이미 유서(諭書)를 보았을 터인데, 감히 관군(官軍)과 항거하겠느냐?”

하고, 대의(大義)로써 효유하고 화복(禍福)으로 개설(開說)하니, 적이 혹 유서(諭書)를 구하여 보는 자가 있었다. 강순이 전흥민(全興敏)·정흥덕(鄭興德)으로 하여금 유서를 가지고 울타리 밖에 나가 적에게 보이게 하였더니, 적이 둘러서서 펴 보므로, 잠깐 만에 이시애(李施愛)·이시합(李施合)·이명효(李明孝) 등이 독전(督戰)함이 매우 급하였다. 물러나 배반하는 자 두 사람을 참수(斬首)하여 머리를 창대 위에 걸어서 군중에게 보이니, 군중이 다리를 떨며 모두 창을 안고 진격하여 모두 10여 합(合)을 싸웠다. 김교(金嶠)는 울타리 남쪽 모퉁이를 감당하여 방어하였다. 적이 김교의 거느린 군사를 엿보니 모두 나약(懦弱)하여 매우 쉬운 것을 알고는 정예한 병사가 다 한데 모여들어 공격하니, 화살이 비와 같으므로 우리 군사도 분발하여 다투고 쏘아서 적이 감히 당해내지 못하였다. 사상(死傷)함이 셀 수가 없었으나, 이숙기(李淑琦)·남이(南怡)가 살상한 것이 가장 많았다. 점심 때에 이시애는 군색함이 심하여 싸우려면 능하지 못하고 물러나려면 추격이 두려워, 길주(吉州) 사람 박의례(朴義禮)로 하여금 항복을 빌기를,

“우리들은 본시 반심(反心)이 없는데 조정에서 도리어 역적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만약 나로 하여금 예궐하여 스스로 진달하게 한다면 마땅히 전하를 위하여 이 뜻을 드러내어 아뢰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무릎을 꿇어 흙을 머금고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기를,

“장군께서 병사를 파하면 내가 마땅히 퇴각하겠습니다.”

하므로, 그때에 아군(我軍)도 화살이 다하고 힘이 다하여 곧 거짓 응하는 체하고 말하기를,

“너희들은 모두 우리 나라의 백성인데, 다 죽여서 무엇이 이익되겠느냐? 만약 말한 것과 같이 한다면 우리도 또한 군사를 퇴각하겠으나, 만일 우리를 배반함이 있으면 마땅히 다시 거병하여 무찔러서 남음이 없게 하겠다.”

하니, 적이 바로 이끌고 가버렸다. 적이 처음 울타리를 설치한 것을 보고 곧 이르기를,

“하루 안에 울타리를 설치한 것이 매우 견고함이 이와 같으냐?”

하였다.

[註 7925]녹각성(鹿角城) : 나무를 가로 세로로 얽어 맞추어 쭉 벌려 세워서 적의 침임을

막던 성(城). ☞

[註 7926]함매(銜枚) : 하무를 입에 물림. 옛날 행군(行軍)할 때에 떠들지 못하도록 입에 가는 막대기를 물리던 것. ☞

 

 

세조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6월 25일(무오)

진북 장군 강순북청을 지키는 사목을 만들어 도총사 이준에게 주다

진북 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이 사목(事目)을 만들어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에게 주기를,

“1. 이곳의 창고는 아직 완전하니, 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서 지키려 합니다.

1. 종개(鍾介)·산개(山介) 등지에 모름지기 원병(援兵)을 보내어 파수하시오.

1. 원병이 멀리 있으면 성식(聲息)을 통하기 어려우니, 모름지기 연달아 계속 사람을 보내어 변란에 대응할 것을 살펴보시오.

1. 함흥 이남의 인민은 처음에 모두 산에 올라 백단(百端)으로 개설(開說)하여 점점 돌아와 모였으나, 심한 자는 떼로 산에 모여 노략질하여 훔치는 자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다시 조치를 더하여 정상을 다 효유(曉諭)하시오.

1. 정병(精兵)·약장(藥匠)·전마(戰馬)·군기(軍器)·총통(銃筒)과 변을 고하는 역기(驛騎)를 모름지기 많이 들여보내시오.”

하니, 준(浚)이 대답하기를,

“글을 받고 이시애(李施愛)가 항복하고 퇴각하기를 비는 것을 알았으니 기뻐할만하나, 그러나 뒤의 변란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마땅히 조치를 더하기를 엄격히 하고, 종개(鍾介)·산개(山介) 등지는 벌써 김숭해(金崇海)·박사형(朴思亨)으로 하여금 군병 6백을 거느리고 나누어 웅거하게 하였으며, 보내 준 사건은 즉시 군관(軍官) 김백겸(金伯謙)에게 주어 치계(馳啓)하였습니다

 

 

세조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6월 26일(기미)

진북 장군 이 적정 정탐한 것을 도총사 이준에게 치보하다

진북 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이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에게 치보(馳報)하기를,

“김교(金嶠)가 거느렸던 별시위(別侍衛) 염문달(廉文達)이 와서 고하기를, ‘적변(賊變)을 몰래 살피는 것으로 인하여 북청(北靑)의 경계에 들어가 풀숲 사이에 숨었더니, 홀연히 1기(一騎)가 지나가며 이르기를, 「너는 이 무슨 사람이냐?」 하기에 대답하기를, 「북청(北靑) 사람이다.」 하니, 그 사람이 이르기를, 「이시애(李施愛)가 거느린 군사가 양화(楊花)로부터 홍원(洪原)에 이르러, 직접 도총사(都摠使)의 진영을 공파(攻破)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또 북청 사람을 잡아 물었더니, 이르기를, ‘이시애가 명령하기를, 「3일분의 익힌 음식을 가지고 다시 와서 결전(決戰)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그윽이 뜻하건대, 적의 모의를 헤아리기 어려운 까닭으로 내가 곧 퇴인(退引)하여 대문령(大門嶺) 아래에 주둔하여서 응원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세조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6월 28일(신유)

신숙주·구치관 등과 겸사복 유자광 등을 불러 이시애 잡을 책략을 의논하다

강녕전(康寧殿)에 나아가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연성군(延城君) 박원형(朴元亨)과 의정부(議政府)·충훈부(忠勳府)의 당상(堂上)·승지(承旨) 등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고, 한참 있다가 진무(鎭撫) 김맹(金孟)·겸사복(兼司僕) 유자광(柳子光) 등을 불러 이시애(李施愛)를 잡을 책략을 의논하니, 모두 가 이르기를,

“적세(賊勢)가 이미 견고하니, 해이할 수 없고, 이준(李浚)이 홍원(洪原)에 속히 들어가는 것은 불가합니다. 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가 아울러 한 곳에 주둔한 것도 또한 옳지 못하나, 병사는 먼 곳에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여기에 있으면서 지휘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의 의논이 다 옳다. 내 생각으로는 강순 등이 두류(逗遛)하여 진격하지 않는 것도 또한 옳지 못하다. 만약 속히 단천(端川)·이성(利城)에 들어가 대군(大軍)으로 진압하되, 곧바로 적이 주둔한 뒤를 지나 5진(五鎭)에 들어가 웅거하여 앞뒤로 협공하면 적은 반드시 솥 가운데의 고기가 될 것이나, 한결같이 지시하여 준 것만을 고집하는 것도 불가하니, 마땅히 준(浚)에게 유시하여 다방면으로 기책을 써서 기회를 타서 승리하게 하겠다.”

하고, 드디어 신숙주(申叔舟) 등에게 명하여 유서(諭書)를 만들게 하였다. 또 유자광(柳子光)에게 명하여 초안을 세우게 하여 그 재주를 시험하였더니, 유자광이 입성(立成)하였으므로 임금이 가상히 여기고 명하여 술을 올리게 하고는, 인하여 그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당종(唐宗)은 호걸(豪傑)한 선비[土]를 대(待)함에 반드시 먼저 위엄과 분노를 더하여 그 기상을 꺾은 연후에야 맡겨서 등용하였는데, 나는 그렇지 않고, 친애(親愛)할 따름이다. 이제 너를 임용하여 장수로 삼아, 1려(旅)를 이끌고 가서 이시애(李施愛)를 토벌하게 하려 하나, 다만 너는 미천하므로, 미천한 자는 본디 위망(位望)이 없어 사졸(士卒)이 따르지 못할까 두려운 까닭에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니, 너는 마땅히 알도록 하라.”

하였다.

 

 

세조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6월 29일(임술)

진북 장군 이 이시애에게 속히 예궐하여 자수하라고 하다

이시애(李施愛)가 그 무리 김여석(金如石)을 보내어, 진북 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에게 글을 주기를,

“소인(小人)의 일은, 청컨대 본도의 군민(軍民)에게 방문하여 마땅한 대로 계달하소서.”

하니, 강순이 답서(答書)하기를,

“족하(足下)의 일은 방문할 필요가 없고, 즉시 이미 치계(馳啓)하였다. 그러나 도내가 소요(騷擾)하고 농사를 폐하여 생업을 잃어서 백성이 의지하고 살 수가 없으니, 족하(足下)는 속히 나와서 예궐(詣闕)하여 자수(自首)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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