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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朝鮮王朝實錄)세조실록(47권14년)[35]

작성자山房山(榮國)|작성시간11.05.05|조회수180 목록 댓글 0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4. 세조실록[35]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7월 17일(갑술)

이준, 김질, 조석문, 강순, 남이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영의정(領議政)으로, 김질(金礩)을 우의정(右議政)으로, 조석문(曹錫文)을 창녕군(昌寧君) 겸 호조 판서(戶曹判書) 오위 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으로, 강순(康純)을 산양군(山陽君) 겸 오위 도총관(五衛都摠管)으로, 함우치(咸禹治)를 겸 의금부 판사(兼義禁府判事)로, 정발(鄭發)을 정헌 대부(正憲大夫) 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 남이(南怡)를 겸 오위 도총부 도총관(兼五衛都摠府都摠管)으로, 허종(許琮)을 겸 사복장(兼司僕將)으로 삼았다. 이준은 임영 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아들인데, 사람됨이 침정(沈靜)하고, 기우(器宇)가 노성(老成)하며, 또 활을 잘 쏘았다. 임금이 심히 이를 그릇으로 여겨 모든 좌우(左右)에 두고,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와 더불어 아침 저녁으로 계품(啓稟)하게 하였다. 임금이 매양 이를 일컬어 말하기를,

“문(文)이 길고, 무(武)의 모범이 된다.”

하였는데, 이시애(李施愛)가 난(亂)을 일으킴에 미쳐서 명(命)하여 이준을 대장(大將)으로 삼고 이를 토벌하게 하였더니, 이준이 과연 공(功)을 세웠다. 이로부터 권우(眷遇)함이 날로 높아졌으며 이에 이르러 특별히 영의정에 제수(除授)하였다. 이구(李璆)가 이를 듣고 대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이준(李浚)은 어리석고 어리어 수상(首相)에 거(居)하는 것이 마땅치 않으니, 청컨대 성명(成命)을 거두어 주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允許)하지 아니하고, 인(因)하여 더불어 술자리를 베풀었다.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7월 22일(기묘)

대신들을 네 번으로 나누어 세자와 더불어 서사를 의논하게 하다

임금이 불예(不豫)하여 봉원군(蓬原君) 정창손(鄭昌孫)·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영성군(寧城君) 최항(崔恒)·중추원 영사(中樞院領事) 심회(沈澮)·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창녕군(昌寧君) 조석문(曹錫文)·남양군(南陽君) 홍달손(洪達孫)·산양군(山陽君) 강순(康純)·연성군(延城君) 박원형(朴元亨)·우의정(右議政) 김질(金礩) 및 여러 종친(宗親)과 재추(宰樞)들이 문안(問安)하였다. 불려서 안에 들었다가 나와서 세자(世子)를 모시고 서사(庶事)를 의논하여 정하였다. 저녁에도 여러 종친과 재추들이 또 와서 문안을 드리었다. 전지(傳旨)하기를,

“내가 차례를 어기고 외람되게 비기(丕基)8563) 를 이어 받았으나 재주가 없고 덕(德)이 없어 옛날의 정사(政事)를 변경한 것이 오히려 많았다. 군적(軍籍)과 호패(號牌)와 사거(徙居)하는 일과 《대전(大典)》8564) 을 편찬하는 일 등을 일시(一時)에 아울러 거행하였고, 북정(北征)과 서정(西征) 등으로 병사(兵師)가 끊이지 않음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모두 백성들의 원구(怨咎)가 되었다. 민심(民心)이 고요하지 못하면, 천심(天心)이 어찌 편안하겠는가? 근일(近日)에 전위(傳位)를 하고자 한 일은 내가 진실로 심히 그 불가(不可)함을 알지만 그러한 소이(所以)는 나의 병이 이제 이미 5, 6년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위로는 제사(祭祀)를 폐하고, 아래로는 습진(習陣)을 하지 못하여 국사(國事)가 능이(陵夷)해진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이제 또 중한 병을 얻었으니, 심히 낫기 어려운 것을 안다. 생각하건대 널[柩]앞에서 즉위(卽位)를 한다면 곡읍(哭泣)하는 사이에는 길흉(吉凶)이 서로 섞일 것이니, 심히 불가(不可)하다. 또 내가 선양(禪讓)한 후에 이 병이 낫는다고 하면, 비록 하루일지라도 우유(優游)8565) 한 즐거움을 향유(享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마음을 결정하여 반드시 이를 행(行)하고자 한 것인데 경(卿) 등이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굳이 청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므로 내가 부득이 그만두었다. 나의 생각에는 이 밖에 다른 것은 없었는데, 이제 다시 생각하니 부끄럽기 그지 없다. 지금 이후로는 경(卿) 등이 4번(番)으로 나누어 대궐(大闕)에 나아와 세자(世子)와 더불어 서사(庶事)를 의논하여 결정하라.”

하고, 이어서 정인지·구치관(具致寬)·홍윤성·김질을 1번으로 삼고, 정창손·심회·조석문·김국광을 2번으로 삼고, 신숙주·박원형·홍달손·노사신(盧思愼)을 3번으로 삼고, 한명회·최항·강순을 4번으로 삼았다. 또 조석문·노사신에게 명(命)하여 《북정록(北征錄)》을 찬정(撰定)하게 하였다.

[註 8563]비기(丕基) : 왕업의 기틀. ☞

[註 8564]《대전(大典)》 : 《경국대전(經國大典)》. ☞

[註 8565]우유(優游) : 편안하고 한가함. ☞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7월 26일(계미)

한명회, 강순, 김질 등이 세자를 모시고 서사를 의논하여 정하다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산양군(山陽君) 강순(康純)·우의정(右議政) 김질(金礩) 등이 세자(世子)를 모시고 서사(庶事)를 의논하여 정하였다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8월 8일(을미)

안효례에게 명하여 이영은과 더불어 《주역》의 이치를 강론하게 하다

임금이 불예(不豫)하였는데, 봉원군(蓬原君) 정창손(鄭昌孫)·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좌의정(左議政) 박원형(朴元亨)·남양군(南陽君) 홍달손(洪達孫)·영성군(寧城君) 최항(崔恒)·우의정(右議政) 김질(金礩)·산양군(山陽君) 강순(康純) 및 승지(承旨)를 불러 내정(內庭)에 입시(入侍)하게 하고, 안효례(安孝禮)에게 명(命)하여 이영은(李永垠)과 더불어 《주역(周易)》의 이치를 강론(講論)하게 하였는데, 안효례가 잡되게 희롱하며 망령되게 증류(證類)를 이끌어 대고, 심한 말로 양보함이 없으며 말이 심히 비야(鄙野)하였다. 최항 등에게 명(命)하여 먼저 《소학(小學)》과 《주역(周易)》의 구결(口訣)을 정하고, 다음에 《예기(禮記)》구결을 정하도록 하였으며,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의 구결은 양촌(陽村)이 이미 정하였으므로 우선은 이를 정지(停止)하게 하였다.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8월 8일(을미)

세자가 이준, 김질, 강순 등과 더불어 서사를 의논하여 정하였다

세자(世子)가 영의정(領議政) 이준(李浚)·우의정(右議政) 김질(金礩)·산양군(山陽君) 강순(康純) 등과 더불어 서사(庶事)를 의논하여 정하였다.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8월 12일(기해)

구종직 등에게 벼슬을 올려주다

임금이 불예(不豫)하여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봉원군(蓬原君) 정창손(鄭昌孫)·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남양군(南陽君) 홍달손(洪達孫)·좌의정(左議政) 박원형(朴元亨)·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창녕군(昌寧君) 조석문(曹錫文)·중추부 영사(中樞府領事) 심회(沈澮)·산양군(山陽君) 강순(康純)·우의정(右議政) 김질(金礩)·행 호군(行護軍) 송처관(宋處寬)·호조 판서(戶曹判書) 노사신(盧思愼)·중추부 지사(中樞府知事) 한계희(韓繼禧)와 승지(承旨) 등이 문안(問安)하였는데, 불러들이어 술자리를 베풀었다. 또 구종직(丘從直)·김예몽(金禮蒙)·정자영(鄭自英)·이영은(李永垠)·김수령(金壽寧)·최호원(崔灝元)·안효례(安孝禮)를 불러 《주역(周易)》의 이치를 논란(論難)하게 하니, 구종직과 정자영이 각각 소견(所見)을 고집하며 다투어 논란(論難)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최호원·안효례 등도 또한 각각 스스로를 고집하며 잡되게 회해(詼諧)하더니 인하여 성을 내며 갖은 말을 다하여 서로 꾸짖으니, 시좌(侍坐)한 신하들이 모두 가리키며 웃었다. 조금 있다가 여러 신하들을 모두 나가도록 명(命)하고, 오직 구종직 등만 머물게 하여 강론(講論)하게 하였다.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에게 명하여 전지(傳旨)하기를,

“구종직은 초자(超資)하여 벼슬을 올려 주고 김예몽은 가자(加資)하여 벼슬을 올려주고, 정자영은 가자하여 주고, 이영은은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제배(除拜)하고, 김수령은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제배하고, 최호원은 가자(加資)하기를 직(職)에 준(准)하라.”

하고, 또 이부(李溥)에게 명하여 그의 서대(犀帶)를 풀어 구종직에게 주도록 하였다.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8월 18일(을사)

재신들에게 명해 경기·강원도·황해도에 군적을 만드는 것의 편부를 의논하게 하다

임금이 여러 재신(宰臣)들에게 명(命)하여 경기(京畿)·황해도(黃海道)·강원도(江原道)에 군적(軍籍)을 만드는 것의 편부(便否)를 의논하게 하니, 영의정(領議政) 이준(李浚)·좌의정(左議政) 박원형(朴元亨)·우의정(右議政) 김질(金礩)·좌찬성(左贊成) 김국광(金國光)·좌참찬(左參贊)·유수(柳洙), 도총관(都摠管) 이침(李琛)·강순(康純)·김개(金漑)·윤사흔(尹士昕)·강곤(康袞)은 말하기를,

“강원도(江原道)·황해도(黃海道)의 두 도는 근래에 종정(從征)으로 인(因)하여 피폐(疲弊)하였으니, 금년에는 다만 경기(京畿)로 하여금 군적(軍籍)을 만들게 하소서.”

하였고, 도총관(都摠管) 남이(南怡)는 말하기를,

“군적(軍籍)은 국가(國家)의 중대한 일이니, 청컨대 아울러 3도(三道)에서 군적을 만들게 하소서.”

하였으며, 우찬성(右贊成) 한계미(韓繼美)·우참찬(右參贊) 윤필상(尹弼商)은 말하기를,

“지난해에는 종정(從征)을 하였고 금년에는 실농(失農)하였으며, 또 중국 사신의 행차가 지나갔으니, 청컨대 우선 정지(停止)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준(李浚) 등의 의논을 따랐다.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8월 22일(기유)

세자가 선공감과 전연사의 관리들을 용서하다

세자(世子)가 산양군(山陽君) 강순(康純)·우의정(右議政) 김질(金礩)과 더불어 일을 의논하였는데, 선공감(繕工監) 관리(官吏)는 모두 공신(功臣)이며, 전연사(典涓司) 관리는 정(情)이 가긍(司矜)하므로 아울러 이를 용서하도록 하였다.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9월 7일(계해)

세자가 수강궁 중문에서 즉위하다

임금의 병이 크게 더하니, 예조 판서(禮曹判書) 임원준(任元濬)을 불러 안에 들게 하고 전지(傳旨)하기를,

“내가 장차 세자(世子)에게 전위(傳位)하겠으니, 그에 대한 모든 일을 판비(辦備)하라.”

하니, 임원준이 나와서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연성군(延城君) 박원형(朴元亨)·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산양군(山陽君) 강순(康純)·창녕군(昌寧君) 조석문(曹錫文)·상락군(上洛君) 김질(金礩)·좌찬성(左贊成) 김국광(金國光)에게 고(告)하니, 정인지 등이 아뢰기를,

“성상의 병이 점점 평전(平痊)되어 가는데, 어찌 갑자기 석위(釋位)하고자 하십니까? 신(臣) 등은 불가(不可)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으므로, 임원준이 아뢰니, 임금이 성을 내며 이르기를,

“운(運)이 간 영웅(英雄)은 자유(自由)롭지 못한 것인데, 너희들이 나의 뜻을 어기고자 하느냐? 이는 나의 죽음을 재촉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니, 정인지 등이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임금이 환관(宦官)으로 하여금 경복궁(景福宮)에서 면복(冕服)을 가지고 오게 하여, 친히 세자(世子)에게 내려 주고 즉위(卽位)하게 하였다. 임원준이 임금의 뜻을 돌이키지 못할 것을 알고 나와서 여러 재추(宰樞)들에게 고하고 의위(儀衛)를 갖추었다. 세자가 드디어 수강궁(壽康宮) 중문(中門)에서 즉위하고서 백관(百官)의 하례(賀禮)를 받고 반사(頒赦)하였다. 그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나는 양덕(涼德)8601) 으로써 일찍이 저위(儲位)8602) 를 욕되게 하며 오직 잘 공손히 계승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였더니, 성화(成化) 4년8603) 9월 7일에 부왕 전하(父王殿下)께서 명하여 이르기를, ‘내가 병에 걸리어 오래도록 정사(政事)를 보지 못하였는데, 만기(萬機)의 중함을 생각하니, 마음에 더욱 근심되어 너에게 중기(重器)8604) 를 부탁하고, 한가히 거처(居處)하며 병을 치료하겠다.’고 하시었으므로 나는 두번 세번 굳이 사양하였으나 유윤(兪允)을 얻지 못하고, 이날 마지못하여 수강궁(壽康宮)에서 대위(大位)에 올랐다. 부왕(父王)을 높이어 태상왕(太上王)이라 이르고, 모비(母妃)를 왕태비(王太妃)라 이를 것이며, 오직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은 명을 받들어 행할 것이다. 나의 미말(微末)함을 돌아보건대 외람되게 비기(丕基)를 이어받았으나, 두려워하고 근심하며 오직 힘쓰고 오히려 군신(群臣)이 마음을 함께하여 협보(夾輔)하는 데에 힘입으면 어렵고 큰 명(命)을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에 초복(初服)8605) 에 관인(寬仁)함을 선포(宣布)하니, 이달 9일 새벽 이전부터 모반(謀反)·대역(大逆)·모반(謀叛), 자손(子孫)으로서 조부모(祖父母)나 부모(父母)를 구매(敺罵)한 것, 처첩(妻妾)으로서 지아비를 모살(謀殺)한 것, 노비(奴婢)로서 주인을 모살한 것, 고독(蠱毒)·염매(魘魅)한 것, 고의로 살인(殺人)을 한 것과 다만 강도(强盜)를 범한 자를 제외(除外)하고,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아니하였거나 이미 결정했거나, 아직 결정하지 아니하였거나 모두 이를 용서하여 면제한다. 아아! 이미 무강(無强)한 역사를 이어받았으니, 모든 유중(有衆)8606) 과 더불어 유신(惟新)할 것이다.”

하였다.

 

[註 8601]양덕(涼德) : 엷은 덕. ☞

[註 8602]저위(儲位) : 세자의 지위. ☞

[註 8603]성화(成化) 4년 : 1468 세조 14년. ☞

[註 8604]중기(重器) : 임금의 자리. ☞

[註 8605]초복(初服) : 처음으로 정치를 잡고 교화를 베품. ☞

[註 8606]유중(有衆) : 백성. ☞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9월 16일(임신)

중국에 부고하고 시호를 정하게 하며 의정부에서 행실을 찬하여 예부에 주달하다

중추부 지사(中樞府知事) 이석형(李石亨)을 보내어 중국에 가서 부고(訃告)하고 시호(諡號)를 정하게 하였는데, 의정부(議政府)에서 행실(行實)을 찬(撰)하여 예부(禮部)에 주달(奏達)하였다.

“왕(王)의 성(姓)은 이씨(李氏)요, 휘(諱)는 아무[某]이며, 자(字)는 수지(粹之)이니, 장헌왕(莊憲王)의 제2자(第二子)로 모비(母妃)는 심씨(沈氏)인데, 본국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심온(沈溫)의 딸이었습니다. 영락(永樂) 15년 정유년(丁酉年)8607) 9월 병자(丙子)에 탄생하였는데, 천자(天資)가 영명(英明)하여 배우기를 좋아하며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며, 덕기(德器)가 날로 이루어져 수양군(首陽君)에 봉(封)하여졌습니다. 장헌왕(莊憲王)이 만년(晩年)에 병이 걸렸을 때에 왕(王)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침 저녁으로 곁에 모시며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훙(薨)함에 이르러서는 애통해 하여 몸이 여위니 보는 자가 감탄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경태(景泰) 3년8608) 에 공순왕(恭順王)이 훙하니 황제(皇帝)께서 상선감 좌감승(尙膳監左監丞) 김유(金宥)와 우감승(右監丞) 김흥(金興)을 보내어 시호와 제사를 내려 주셨고, 또 사왕(嗣王)의 고명(誥命)과 관복(冠服)을 내려 주었으므로, 사왕은 왕(王)8609) 을 뽑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중국 서울에 나아가 칭사(稱謝)하게 하였습니다.

4년에 간신(姦臣)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 등이 무리를 모아 불령(不逞)하게 반역(反逆)을 꾀하여 화기(禍機)가 이미 절박하였으므로, 왕이 사왕에게 고(告)하여 주살(誅殺)하여 제거하였고, 6년에는 사왕이 나이가 어리고 또한 병들었으므로 나라 안에 연고가 많으니, 배신(陪臣)을 보내어 연유를 갖추어 진주(陳奏)하고, 국사(國事)를 왕에게 전(傳)하여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중략)

3년에 왕이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인재(人才)를 양육(養育)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사람들을 모두 쓰는 것도 아니다. 비록 인재가 있어서 가르치더라도 부지런히 하지 아니하면 이루지 못하는 것이고, 비록 사람이 있어서 시험한다 하더라도 미리 하지 아니하면 쓰기가 어려운 것이니, 마땅히 항상 유액(誘掖)8620) 하고 권려(勸勵)하여 자주 이를 시험하여 등용(登用)에 대비하겠다.’하고, 자주 여러 유생(儒生)을 인견하여 경사(經史)를 강문(講問)하였습니다. 3월에 왕이 성균관(成均館)에 이르러 선성(先聖)을 알현하고 책제(策題)를 내어 취사(取士)하였으며, 이 뒤로부터는 자주 선성을 알현하였습니다. 왕은 일찍이 학자(學者)의 사수(師授)함이 불명(不明)하여 각기 소견(所見)을 고집하여 의논(議論)이 분운(紛紜)한 것을 근심하여 여러 선비를 모아 사서(四書) 오경(五經)의 동이(同異)를 논란(論難)하게 하고, 친히 스스로 결단하는 데에 임하여서 긍계(肯綮)8621) 를 부석(剖析)하고 뭇 의논을 사리에 마땅하게 귀일(歸一)시켜 정하였으며, 《역학계몽(易學啓蒙)》은 정밀(精密)하고 알기가 어려운 것을 왕이 친히 주해(註解)를 저술하여 학자를 깨우쳤습니다. 왕은 일찍이 후원(後園)에서 구신(舊臣)들과 술을 나누고, 이어서 더불어 사후(射侯)하였는데, 왕이 쏜 것은 반드시 과녁을 관통하였으므로, 시(詩)를 올리는 자가 있었습니다. 왕은 수찰(手札)을 보이며 이르기를, ‘나는 소년 시절에 기운이 웅장하고 마음이 씩씩하여 스스로 유예(遊藝)를 평생(平生)의 업(業)으로 하려고 하였으나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다. 만약 한갓 부녀에 의빙(依憑)되어 절제할 소이(所以)를 알지 못하였다고 하면, 정치(政治)를 하고 오랑캐를 굴복시키는 길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였으며, 또 여러 신하의 시를 보니, 모두 경계(警戒)하는 말이 있었으므로 더욱 고굉(股肱)의 충성을 느끼어 시로 회답하기를,

욕심이 적으면 욕심을 가히 채울 수가 있고,

일이 간략하면 공(功)을 가히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을 공경하면 하늘이 보전(保全)할 것이며,

백성 다스리기를 부지런히 하면 백성이 편안할 것이니,

소예(小藝)에 생각을 다하지 말고,

큰 정사(政事)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우환(憂患)은 안락(安樂)함에서 나오고

창달(暢達)은 곤궁함에서 싹트는도다.

천명(天命)은 진실로 항상되지 아니하니,

오로지 선(善)만을 따를 뿐이다.

교수(交修)하는 뜻을 잊지 말라.

더불어 생각하면 시종(始終)이 있으리다.

하였습니다.

4년에 왕이 본국(本國)이 해외(海外)에 있어서 서적(書籍)이 매우 적고 문학(文學)이 정묘롭지 못하다고 하여 자제(子弟)를 보내어 입학(入學)하기를 청하였더니, 조칙에 이르기를, ‘왕의 나라는 시서(詩書)와 예의(禮儀)의 가르침을 전습(傳習)하여 평소에 표문(表文)·전문(箋文)·장주(章奏)와 무릇 행문 이첩(行文移牒)하는 이문(吏文)은 모두 예식(禮式)을 좇았고, 비록 능히 다 한음(漢音)을 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통사(通事)가 전역(傳譯)하여 일찍이 알지 못한 것이 없었는데, 어찌 반드시 자제를 와서 배우게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처음에 모련위 올량합(毛憐衛兀良哈)의 낭복아합(浪卜兒哈)이 대대로 우리 나라 회령(會寧)지방에 살면서 우리 나라 인민(人民)과 더불어 대대로 서로 혼가(婚嫁)하여 편맹(編氓)8622) 과 다름이 없었으며, 그 아들 역승가(亦升哥)는 왕성(王城)에 와서 살면서 아내를 맞이하고 벼슬살이를 하였는데, 복아합(卜兒哈)이 왕성에 오고자 하는 것을 변장(邊將)이 겸종(傔從)을 예(例)대로 감하였더니, 복아합이 분(忿)함을 발하여 왕성에 이르러 역승가와 더불어 같이 모의하여 친당(親黨)을 다시 유인하고 여러 부락을 선동하였으며, 역승가도 길주 온천(吉州溫泉)에서 병을 치료할 것을 청하고는 길을 재촉하여 역마로 달리어, 아비에게 나아가 같이 모반하기로 한 것을 변장이 뒤따라 그 모의를 알고 복아합의 부자를 나치(拿致)하여 아뢰었으므로 왕이 안핵(按覈)하니 모두 자복하여 곧 법대로 조치하였습니다. 건주 우위 도지휘(建州右衛都指揮) 동화니치(佟火爾赤) 등이 말을 만들어 거짓으로 날조하여 보복(報復)하고자 하니, 황제께서 예과 급사중(禮科給事中) 장녕(張寧)을 보내어 와서 그 근유(根由)를 물어 모두 그 실정을 얻어 들었는데, 복아합의 아들 아비거(阿比車)가 도망가 숨어서 군당(群黨)을 불러 모아 변강(邊疆)을 침요(侵擾)하려고, 9월에 강(江)을 연(沿)하여 둔결(屯結)하여 몰래 군사를 발(發)하였으나 변장(邊將)들이 길을 나누어 추격(追擊)하기를 거의 다하였으므로 왕은 즉시 사유를 갖추어 계문(啓聞)하였습니다.

 

성화(成化) 3년8634) 8월에 황제의 조칙에 이르기를, ‘건주 삼위(建州三衛)의 동산(童山) 등은 본래 번신(蕃臣)으로 대대로 중국 조정의 은혜를 받았는데, 근자(近者)에 겉으로는 조공(朝貢)한다는 명목이나 음(陰)으로는 변방을 도둑질하는 계책을 행(行)하였지만, 짐(朕)이 이를 용서하였는데도 더욱 방자하므로 부득이 군사를 써서 토벌하기에 이르렀다. 오직 그대 조선 국왕(朝鮮國王)은 대대로 예의(禮義)를 지키고, 우리 국가(國家)에 충성하여, 더함은 있었으되 바뀜은 없었으니, 가상(嘉尙)하게 여기는 바이다. 만약 우리 군사를 저 역노(逆虜)들이 침노하거든 왕은 마땅히 관애(關隘)를 폐절(閉絶)하여 저들로 하여금 달아나서 들어갈 곳이 없게 하고 나아가 사로잡아서 진멸하게 하라. 만약 왕이 능히 편사(偏師)를 보내어 우리 군사와 더불러 멀리서 서로 호응하여 편(便)한 것을 기다려 이를 절박하게 몰아치면, 저들의 항복을 받기가 더욱 쉬울 것이며, 왕의 공(功)은 더욱 성하고, 충성은 더욱 더 빛날 것이니, 짐이 어찌 왕에게 보답함이 없겠는가? 힘써 훈명(勳名)을 심고, 때를 잃는 것은 불가하다.’라 하였습니다. 왕은 즉시 배신(陪臣) 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를 보내어 1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길을 나누어 바로 건주(建州)의 동북(東北) 발저강(潑猪江)을 올미부(兀彌府)의 여러 산채를 공격하고 그 소혈(巢穴)을 무찔러 적(敵)의 우두머리인 이만주(李滿住)·고납합(古納哈) 및 그 당류(黨類)를 사로잡거나 베기도 하여 둔락(屯落)을 분탕(焚湯)하고서 돌아왔는데, 왕은 배신을 고태필(高台弼)을 보내어 포로를 바쳤습니다. 4년8635) 4월에 조칙(詔勅)하여 이르기를, ‘짐이 장수에 명(命)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건주(建州)의 역로(逆虜)를 토벌함에 이르러 왕으로 하여금 중국 군사를 협조(協助)하게 하였더니, 이제 왕의 아룀을 보고, 배신(陪臣) 중추부관(中樞府官) 강순(康純)을 보내어, 무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과 발저강(潑猪江)의 두 강을 건너서 올미부(兀彌府)의 여러 채(寨)를 공파(攻破)하고, 역로(逆虜) 이만주(李滿住)·고납합(古納哈) 부자(父子)를 죽이고, 그 부속(俘屬)을 참획(斬獲)하였으며, 그 여사(廬舍)를 불사르고, 그 곳에서 적취(積聚)8636) 하였으며, 우리 동녕위(東寧衛)의 인구(人口)를 뺏아온 것을 알았다. 배신 이조 참판(吏曹參判) 고태필(高台弼)을 보내어 부로(俘虜)를 바치므로 이미 왕이 바친 바의 적속(賊屬)의 예(例)에 의하여 처치(處置)하고, 인구(人口)는 친척에게 주어 완취(完聚)8637) 하게 하였으며 우축(牛畜)은 군(軍)에 주어 둔전(屯田)을 갈게 하였으니, 진실로 왕이 대대로 충정(忠貞)을 돈독히 한 것에 연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짐이 척찰(尺札)로써 왕에게 명(命)하였는데도 왕국(王國)의 백성들이 해동(海東)에서 향응(響應)하여 짐의 장사(將士)들이 우레처럼 사나웁고 바람처럼 달려가 내외(內外)가 합세(合勢)하여 역로가 와해(瓦解)되었으니, 왕은 짐의 명한 바를 저버리지 아니했다고 이를 수 있겠다. 짐이 왕의 군신(君臣)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 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이제 내관(內官) 강옥(康玉)과 김보(金輔)를 보내어, 왕의 나라에 이르러 왕에게 채단(綵段)·백금(白金)·문금(紋錦)·서양포(西洋布)를 내려 주고, 강순과 고태필 등에게도 또한 각각 내려 주어 그 공로를 표창하니 왕은 이를 받을지어다.’ 하였으므로, 왕은 표문(表文)을 받들어 칭사(稱謝)하였습니다. 6월에 등주의(登州衛) 총기(總旗) 쇄경(鎖慶) 등 43인이 우리 나라 국경에 표류(漂流)해 왔으므로 왕은 옷과 양식을 후히 베풀어 주고, 요동(遼東)으로 풀어 보냈습니다. 중국 사람으로 혹은 해상(海上)으로부터 표류해 이르거나, 혹은 포로(捕虜) 가운데서 도망해 돌아오는 자를 전후(前後)로 요동(遼東)으로 풀어 보낸 바가 무려(無慮) 수백 인(人)이었는데, 모두 후히 위로하고 도와 주어 보냈습니다.

 

(중략)

 

 

 

[註 8607]정유년(丁酉年) : 1417 태종 17년. ☞

[註 8608]경태(景泰) 3년 : 1452 문종 2년. ☞

[註 8609]왕(王) : 세조. ☞

[註 8610]척려(惕厲) : 위구(危懼)스러워 몸을 수양함. ☞

[註 8611]염평(廉平) : 공평함. ☞

[註 8612]강거목장(綱擧目張) : 아래에서는 위에서 하는대로 다룸. ☞

[註 8613]천순(天順) 원년(元年) : 1457 세조 3년. ☞

[註 8614]계체(繼體) : 제왕의 자리를 잇는 것. ☞

[註 8615]치주례(齒胄禮) : 세자(世子)가 학교(學校)에 들어갈 때 신분(身分)에 따르지 않고 연령(年齡)에 따라서 다른 학생 사이에 자리를 정하는 예식. ☞

[註 8616]순절(諄切) : 친절하고 간절함. ☞

[註 8617]천순(天順) 2년 : 1458 세조 4년. ☞

[註 8618]증민(烝民) : 백성. ☞

[註 8619]사목(司牧) : 맡아서 기른다는 뜻으로 임금을 말함. ☞

[註 8620]유액(誘掖) : 인도하여 도와줌. ☞

[註 8621]긍계(肯綮) : 일의 급소(急所). ☞

[註 8622]편맹(編氓) : 호적에 편입된 백성. ☞

[註 8623]주의(注擬) : 관원을 임명할 때 먼저 문관(文官)은 이조(吏曹), 무관(武官)은 병조(兵曹)에서 후보자 3인을 정하여 임금에게 올리던 것. ☞

[註 8624]패향(沛鄕) : 한 고조의 고향. ☞

[註 8625]실봉(實封) : 신하가 임금에게 밀계(密啓)할 때 소장(疏章)의 내용을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봉(封)하던 일. ☞

[註 8626]공순왕(恭順王) : 문종. ☞

[註 8627]풍후(風后)의 악기(握奇) : 중국 황제(皇帝) 때의 재상이었던 풍후(風后)의 병법(兵法)에 나오는 군진(軍陣)의 이름. ☞

[註 8628]이정(李靖) : 당(唐)나라 장수. ☞

[註 8629]하도(河圖) : 복희(伏儀) 때 황하에서 나온 용마(龍馬) 등의 도형. ☞

[註 8630]낙서(洛書) : 하(夏)의 우(禹)임금이 치수(治水)할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龜)의 등에 있었다는 45점의 글씨. 《서경(書經)》의 홍범 구주(洪範九疇)와 팔괘(八卦)의 법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함. ☞

[註 8631]관자(管子) : 관중(管仲). 춘추 시대 제(齊)나라의 정치가. 환공(桓公)의 재상이 되어 부국강병책을 써서 환공으로 하여금 패자(霸者)가 되게 하였음. ☞

[註 8632]구공(九功) : 6부(六府:水·火·金·土·穀으로 백성을 기르는 기본)와 삼사(三事:正德·利用·厚生)로 선정의 기본. ☞

[註 8633]7덕(七德) : 정치의 7가지 덕. ☞

[註 8634]성화(成化) 3년 : 1467 세조 13년. ☞

[註 8635]4년 : 1468 세조 14년. ☞

[註 8636]적취(積聚) : 병량(兵糧)·마량(馬糧) 따위. ☞

[註 8637]완취(完聚) : 한 가족의 식구가 흩어져 있지 않고 한 곳에 모여 사는 것. ☞

[註 8638]예정(銳精) : 정신을 한군데로 모아 일에 힘씀. ☞

[註 8639]은부(殷阜) : 풍성하고 넉넉함. ☞

[註 8640]자민(字民) : 백성을 사랑하는 뜻. ☞

[註 8641]환과(鱞寡) : 외롭고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 ☞

[註 8642]문아(文雅) : 문필(文筆)이 뛰어난 사람. ☞

[註 8643]상론(尙論) : 옛 사람의 언행(言行)·인격 등을 의논함. ☞

[註 8644]미미(亹亹) : 부지런한 모양. ☞

[註 8645]저이(儲貳) : 세자(世子). ☞

[註 8646]이모(貽謀) : 자손을 위하여 남기는 꾀. ☞

[註 8647]상각(商搉) : 헤아려서 정함. ☞

[註 8648]술직(述職) : 제후가 천자에게 자기의 직무에 대한 일을 말함. ☞

[註 8649]천권(天眷) : 황제의 돌봄. ☞

[註 8650]총수(寵綬) : 사랑하고 편안하게 함. ☞

 

                                                                     - 終 -

 

                                                              - 이어서 예종실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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