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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실록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예종실록 (1권즉위년)[1]

작성자山房山(榮國)|작성시간09.12.14|조회수58 목록 댓글 0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5. 예종실록 [1]  

 

예종 1권, 즉위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9월 7일(계해)

세자가 수강궁 중문에서 즉위하고 교서를 내리다

세조가 수강궁(壽康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병이 점점 위중하니, 예조 판서 임원준(任元濬)을 불러서 전교하기를,

“내가 세자에게 전위(傳位)하려 하니, 모든 일을 준비하라.”

하니, 임원준이 나가서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좌의정(左議政) 박원형(朴元亨)·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산양군(山陽君) 강순(康純)·창녕군(昌寧君) 조석문(曹錫文)·우의정(右議政) 김질(金礩)·좌찬성(左贊成) 김국광(金國光)에게 고하였다. 정인지 등이 아뢰기를,

“성상의 병환이 점점 나아가시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자리를 내어 놓으려고 하십니까? 신 등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므로 임원준이 이를 아뢰니, 세조가 노하여 말하기를,

“운(運)이 다하면 영웅도 마음대로 못하는데 너희들이 나의 하고자 하는 뜻을 어기니, 이는 나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하고, 내시(內侍)로 하여금 면복(冕服)5) 을 가져오게 하여 친히 세자에게 내려 주니, 세자가 굳이 사양하였으나 할 수 없었다. 임원준이 임금의 뜻을 돌이키지 못할 것을 알고 나가서 여러 재추(宰樞)에게 고하고, 백관을 모아서 의위(儀衛)를 갖추었으며, 날이 저물자 세자가 수강궁(壽康宮) 중문(中門)에서 즉위(卽位)하였다. 백관들이 하례하고 경내(境內)를 사유(赦宥)하였는데, 그 교서(敎書)는 이러하였다.

“내가 덕이 부족한 몸으로서 일찍이 세자의 자리에 있어 오직 뜻을 공경히 이어 받들지 못함을 두려워하였는데, 성화(成化) 4년6) 9월 초7일에 부왕(父王) 전하께서 명을 내리시기를, ‘내가 병이 들어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못하여 만기(萬幾)의 중함을 생각하니, 더욱 마음에 병이 된다. 너에게 중기(重器)7) 를 부탁하고 한가롭게 있으면서 병을 잘 조리하겠다.’ 하시기에, 내가 두세 번 굳이 사양하였으나 할 수 없어서 승락하고, 이날에 마지못해 대위(大位)에 올랐다. 부왕을 높여서 태상왕(太上王)으로 하고 모비(母妃)를 왕태비(王太妃)로 하며, 오직 군국(軍國)의 중한 일은 승품(承稟)8) 하여 행하겠다. 돌아보건대 나의 작은 몸으로 큰 자리를 이어받아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오직 조심하였을 뿐인데, 여러 신하들의 한 마음으로 도움에 힘입어 어렵고 큰 명(命)을 저버림이 없기를 바란다. 이 처음 일을 당하여 너그럽고 어짐을 펴는 것이 마땅하므로, 이달 초7일 매상(昧爽) 이전으로부터 십악(十惡)9) 과 강도(强盜)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하여 면제한다. 아아! 이미 무궁한 역수(歷數)를 이었으니, 여러 신민과 함께 새로와질 것이다.”

[註 5]면복(冕服) : 제왕(帝王)의 정복. 곧 면류관(冕旒冠)과 곤룡포(袞龍袍). ☞

[註 6]성화(成化) 4년 : 1468 세조 14년. ☞

[註 7]중기(重器) : 임금의 자리. ☞

[註 8]승품(承稟) : 물어서 명령에 따름. ☞

[註 9]십악(十惡) : 《대명률(大明律)》에 정한 열 가지의 큰 죄. 《당률소의(唐律疏義)》에 의하면, 모반(謀反)·모대역(謀大逆)·모반(謀叛)·악역(惡逆)·부도(不道)·대불경(大不敬)·불효(不孝)·불목(不睦)·불의(不義)·내란(內亂)을 말하는데, 사유(赦宥)에서 제외되었음. ☞

 

예종 1권, 즉위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9월 16일(임신)

백관들이 백의·오사모·흑대 차림으로 창덕궁에서 배표하다

중추부 지사(中樞府知事) 이석형(李石亨)·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이파(李坡)를 보내어 명나라에 가서 고부(告訃)·청시(請諡)하고 또 청승습(請承襲)하게 하였다. 백관들이 백의(白衣)·오사모(烏紗帽)·흑대(黑帶) 차림으로 창덕궁(昌德宮)에서 배표(拜表)32) 하였다.

그 청시(請諡)하는 표문은 이러하였다.

“시호(諡號)를 하사하여 종말(終末)을 보이는 것은 오직 제왕(帝王)의 훌륭한 법이며, 시호를 칭하여 효도를 이루는 것은 인자(人子)의 지극한 정이므로, 감히 작은 정성을 펴서 총청(聰聽)을 번독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부(臣父) 선신(先臣) 휘(諱)는 폐복(敝服)33) 을 맡아 지키면서 특별히 돌보심을 입으니, 항상 충성을 다하여 삼가 제후(諸侯)의 법도를 닦았는데, 갑자기 병이 들어 길이 성조(聖朝)를 하직하였습니다. 삼가 옛법을 상고하건대 시호(諡號)를 청함이 마땅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어버이를 나타내는 높은 정성을 양해하시고 외로운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큰 은혜를 드리우시어, 드디어 정혼(貞魂)으로 하여금 총명(寵命)을 입게 하신다면, 신은 삼가 마땅히 부지런함을 다하고 게으름이 없이 뜻을 이어 받드는 정성을 더욱 닦겠으며, 길이 잊지 않기를 맹세하여 항상 수(壽)하고 강녕(康寧)하시기를 빌겠습니다.”

행장(行狀)은 이러하였다.(중략)

3년50) 에 왕이 전교하기를,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이룩되는 것이 아니며 또 사람마다 다 쓰는 것이 아니다. 비록 재질이 있어도 가르침을 권하지 아니하면 이룩하지 못하고, 비록 사람이 있을지라도 시험을 치르지 아니하면 쓰기 어려우니, 마땅히 항상 지도 권장하고 자주 시험하여 등용(登庸)할 준비를 하라.’ 하고, 자주 제생(諸生)을 인견(引見)하고서 경사(經史)를 강문(講問)하였다. 3월에 왕이 성균관에 이르러 선성(先聖)을 배알(拜謁)하고 책문(策問)을 내어 선비를 뽑았으며, 이 뒤로부터 자주 선성을 배알하였다. 왕은 항상 배우는 자가 스승의 가르침이 밝지 못하여 각각 소견을 고집하고 의논이 분분함을 근심하여, 여러 선비를 모아 사서 오경(四書五經)의 같고 다름을 논란(論難)하게 하였는데, 친히 임석하여 결단하고 요지[肯綮]를 분석하여 적당하게 하나로 귀결지으니 모든 의심스러운 것이 정하여졌다. 《역학계몽(易學啓蒙)》은 정밀(精密)하여 깨닫기 어려운데, 왕이 친히 주해(註解)를 지어 배우는 이를 깨닫게 하였다. 왕이 일찍이 후원에서 구신(舊臣)과 술을 마시고 인하여 사후(射侯)하였는데, 왕이 쏘면 반드시 과녁을 맞히자 시를 지어 올리는 이가 있었다. 왕이 수찰(手札)을 써서 보이기를, ‘내가 나이 젊을 때에 기개가 크고 마음이 장건하여 스스로 무예(武藝)에 놀아 평생의 업으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다. 만약 한갓 풍부(馮婦)51) 가 되고 절제(節制)할 바를 알지 못하면, 다스림을 이루고 군사를 복종하게 하는 도(道)가 아니다.’ 하였다. 또 여러 신하의 시(詩)에 모두 경계하는 말이 있음을 보고 더욱 고굉(股肱)의 충성에 감격하여 시(詩)로 회답하기를,

‘욕심이 적으니 욕심을 채울 수 있고,

일이 간략하니 공이 곧 이루어지네.

하늘을 공경하니 하늘이 보호되고,

백성의 일에 부지런하니 백성이 편안하도다.

작은 재주에 마음을 쓰지 말고,

큰 정사에 마땅히 정성을 다하세.’

하였고, 또 이르기를,

‘근심 걱정은 편안하고 즐거움에서 나오고,

잎이 무성하면 뿌리가 곤하다네.

천명은 본디부터 일정함이 없으니,

착한 것만 따를 뿐이로다.

사귀는 뜻 잊지 말고,

시종(始終)이 있기를 생각하세.’

하였다.

4년52) 에 임금이, 우리 나라는 해외(海外)에 있어서 서적이 매우 적어 문학(文學)이 정밀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제(子弟)를 〈중국에〉 보내어 입학하기를 청하니, 칙서에 이르기를, ‘왕의 나라는 시서(詩書)와 예의(禮義)의 교육을 전하여 익혀서 바탕이 있고, 표문(表文)·전문(箋文)·장주(章奏)와 행이(行移)하는 이문(吏文)이 모두 예식에 따랐으니, 비록 중국음(中國音)에 다 통하지는 못할지라도 통사(通事)가 통역을 전하여 일찍이 통하지 못함이 없었는데, 어찌 반드시 자제가 와서 배울 것인가?’ 하였다. 처음에 모련위(毛憐衛) 올량합(兀良哈) 낭복아합(浪卜兒哈)이 우리 나라 회령(會寧) 지방에 대대로 살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과 대대로 서로 혼인하여 편맹(編氓)53) 과 다름이 없었고, 그 아들 역승가(亦升哥)는 서울에 와 살면서 장가들고 벼슬하였다. 낭복아합이 서울에 올라오고자 하니 변장(邊將)이 예(例)대로 겸종(傔從)54) 을 줄이게 하자, 낭복아합이 분을 내어 서울에 이르러서 역승가와 공모하고 친당(親黨)을 꾀어 여러 부락을 선동하고, 역승가가 길주(吉州) 온천에서 병을 치료하겠다고 청하여 역마(驛馬)로 갑절의 길을 달려가서 아비와 같이 모반(謀叛)하였는데, 변장이 뒤따라 그 계책을 알아내고 낭복아합 부자(父子)를 나치(拿致)하여 아뢰었다. 왕이 안핵(按覈)하자 모두 자복(自服)하여 모두 법대로 처치하였는데, 건주 우위 도지휘(建州右衛都指揮) 동화니치(佟火爾赤) 등이 거짓 날조하여 말을 만들어서 보복을 하려고 꾀하였다. 황제가 예과 급사중(禮科給事中) 장영(張寧)을 보내어, 와서 근본 이유를 묻고 그 실정을 사실대로 밝혔는데, 낭복아합의 아들 아비거(阿比車)가 도망해 숨어서 무리를 불러 모아 변경을 침범하고, 9월에 강가에 집결하여 몰래 엿보고 가만히 나오니, 변장이 길을 나누어 추격하여서 거의 다 죽이고 사로잡았는데, 왕이 곧 사유를 갖추어서 아뢰었다.(중략)

성화(成化) 3년73) 8월에 황제의 칙서에 이르기를, ‘건주삼위(建州三衛)와 동산(董山) 등은 본래 번신(蕃臣)으로서 대대로 조정의 은혜를 받았는데, 요즈음 양(陽)으로는 조공(朝貢)한다는 이름 하에 음(陰)으로는 변경에서 도둑질할 계획을 하였으니, 짐(朕)이 용서하면 더욱 방자할 것이므로 부득이 군사를 써서 토벌한다. 생각하건대, 너 조선 국왕(朝鮮國王)은 대대로 예의를 지키고 우리 나라에 충성하여 더함이 있고 변함이 없으니 짐이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만약 우리 군사가 저 역로(逆虜)를 치거든 왕은 마땅히 좁은 관문(關門)을 닫아 막아서 저들이 도망쳐 들어갈 수 없게 하여 사로잡아 멸망시키도록 할 것이며, 만약 왕이 능히 편사(偏師)74) 를 보내어 우리 군사와 멀리에서 서로 호응하여 편리함을 엿보아서 좁히면 저들에게서 항복받기가 더욱 쉬울 것이며, 왕의 공이 더욱 성하고 충성이 더욱 드러날 것이다. 짐이 어찌 왕에게 갚음이 없겠는가? 힘써 공과 이름을 세우라. 때를 잃을 수 없다.’ 하였는데, 왕이 곧 배신(陪臣) 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를 보내어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달려 건너서 길을 나누어 바로 건주(建州) 동북쪽 발저강(潑豬江) 올미부(兀彌府) 여러 진[寨]에 닿아 그 소굴을 쳐서 적(賊)의 추장(酋長) 이만주(李滿住)·고납합(古納哈) 및 그 당류를 사로잡아 베고서 그 부락을 분탕(焚蕩)하고 돌아왔는데, 왕이 배신 고태필(高台弼)을 보내어 포로를 바쳤다.

4년75) 4월에 칙서에 이르기를, ‘짐이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건주(建州)의 역로(逆虜)를 토벌하게 하고 왕으로 하여금 제왕(帝王)의 군대에 협조하게 하였는데, 이제 왕의 주달을 받아 보니, 배신 중추부관(中樞府官) 강순(康純) 등을 보내어 1만여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압록강·발저강 두 강을 건너서, 올미부의 여러 진을 쳐부수고 역로 이만주·고납합 부자를 죽이고 그 부속(部屬)을 베거나 사로잡았으며, 그 집과 재물을 불태우고, 그들이 약탈한 우리 동녕위(東寧衛)의 인구를 찾아서, 배신 이조 참판 고태필을 보내어 포로를 바친 것을 알았다. 이미 왕이 바친 적속(賊屬)은 예에 의해 처치하고, 인구는 친족에게 주어 완취(完聚)하게 하며, 소는 군대에 주어 둔종(屯種)하게 하였다. 진실로 왕은 대대로 충정(忠貞)을 돈독히 한 까닭에 짐이 척찰(尺札)76) 로 왕에게 명하였는데, 왕의 나라 군사는 해동(海東)에서 호응하고 짐의 장졸(將卒)은 우레처럼 엄하고 바람처럼 몰아서 안팎에서 합세(合勢)하여 역로(逆虜)가 허물어졌으니, 왕은 가히 짐의 명한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겠다. 짐이 왕과 더불어 군신(君臣)이 마음을 같이하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이제 내관(內官) 강옥(姜玉)·김보(金輔)를 보내어 왕의 나라에 이르러 왕에게 채단(綵段)·백금(白金)·문금(紋錦)·서양포(西洋布)를 하사하게 하고, 강순·고태필 등에게도 각각 하사함이 있어 그 노고를 표하게 하니, 왕은 공경히 받으라.’ 하였는데, 왕이 표문을 올려 사례하였다. 6월에 등주위 총기(登州衛摠旗) 쇄경(鎖慶) 등 43인이 표류(漂流)하여 우리 나라 경계에 이르렀는데, 왕이 의복과 양식을 후하게 주어 요동으로 풀어 보냈다. 중국 사람이 혹은 해상으로부터 표류해 오고 혹은 오랑캐 가운데에서 도망해 돌아온 자를 전후해서 요동으로 풀어 보낸 것이 무려 수백 인이었는데, 모두 다 후하게 위로하고 대접해 보냈다. 9월 갑자에 왕이 병으로 정침(正寢)에서 훙(薨)하였는데, 향년(享年)이 52세이고 재위(在位)는 14년간이다.

왕은 영명 과단하고 용기와 지혜가 있으며 공손 근검하고 너그럽고 소탈하며, 천성이 학문에 독실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였고 경사(經史)와 제서(諸書)를 한번 보면 잊지 아니하였으며, 고금(古今)을 널리 통하고 역산(曆算)·음률(音律)·의약(醫藥)·복술(卜術)의 이치에 이르기까지 정밀하게 연구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시행 조처할 일을 만나면 어느 곳에나 밝게 통하였다. 어려서부터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행동이 모두 명백하고 정대(正大)하여 추호라도 거짓과 꾸밈이 없으며, 정성으로 위를 섬기고 예(禮)로 아래를 대접하여 가법(家法)을 바르게 하여서 그 화목함을 다하고 인륜(人倫)을 후하게 하여, 그 은혜와 사랑을 극진히 하며 비첩(妃妾)의 구분을 엄하게 하고 적서(嫡庶)의 등급을 분명히 하며, 제사를 반드시 몸소 행하고 법령을 반드시 지키며 정사에 임하여 예민하고 정밀하여 오직 하늘을 공경하고 민정(民政)에 부지런함으로써 마음을 삼아, 날마다 부지런하고 날마다 조심하여 조금도 한가롭게 즐김이 없었다. 어질고 능한 이를 뽑아 올리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이를 내쳐 물리치며, 유술(儒術)을 숭상하여 영재(英才)가 일어나고 무사(武事)를 숭상하여 사졸(士卒)이 정련(精鍊)되며, 상(賞)을 밝게 하고 벌(罰)을 신중히 하며, 농사에 힘쓰고 잠업(蠶業)을 중히 하며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고 정렴(征斂)77) 을 박하게 하며, 몸소 먼저 검약(儉約)하여 항상 깨끗한 옷을 입으니, 왕비 이하가 모두 화려한 복식을 배척하였다. 궁인(宮人)을 놓아 보내고 다만 겨우 청소하는 것만 갖추게 하고, 쓸데없는 음식을 없애고 헛된 비용을 줄여서 재용(財用)을 절약하니, 몇 해 되지 아니한 사이에 저치(儲峙)78) 가 차고 남아서 백성이 날로 풍족하였다. 매양 감사와 수령을 거듭 경계하고 혹은 어사를 보내어 순찰하여서 백성의 폐막(弊瘼)을 모두 없애며, 외임(外任)에 나가는 배사(拜辭)하는 자도 반드시 인견(引見)하고서 지방을 맡아 백성을 사랑하라는 뜻을 간곡하게 효유하여 보내니, 이로 말미암아 은혜가 아래에 미치고 민정(民情)이 상달되어 환과 고독(鱞寡孤獨)이 가려짐이 없었다. 날마다 신하들을 인견하여 다스리는 길을 묻고 비록 적은 일에 처해서도 역시 스스로 우(虞)79) 를 스승으로 하여 자기의 의견을 버리기에 어려움이 없었고, 잘못을 바로잡고 경계하여 간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서 언로(言路)를 넓히고, 혹시 한가로운 때를 만나면 유아(儒雅)80) 를 불러 맞이하여 역대(歷代)의 치란(治亂)·성패(成敗)의 자취를 의논하고 성현(聖賢)의 도통(道統)과 성리(性理)의 오묘(奧妙)를 강론해 밝혀서, 날이 기울고 밤이 깊도록 열심하여도 피로함이 없었다. 항상 세자에게 훈계하여 먼 계책을 전해 주고, 조선(祖先) 이래의 헌장(憲章)이 갖추어졌을지라도 과조(科條)가 많아서 유사(有司)가 혹시 준수하기에 의혹됨이 있음을 염려하고, 또 때와 형세가 달라서 변통(變通)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에 참작하고 확실하게 헤아려서 간략하고 적절하기에 힘써 일국의 대전(大典)을 정하여 지어서 후세에 준수할 법을 만들었다. 의(義)로써 교린(交隣)하여 오직 화목하기를 힘쓰고 정성과 신의를 보이니, 이런 까닭에 비록 도왜(島倭)와 야인(野人)같이 미련하고 사나운 무리라도 모두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에 보답하지 않음이 없었다. 수명(受命)81) 한 이후로부터 정성을 다해 직무를 살피고 번한(藩翰)을 삼가 지켜서 무릇 황제의 명이 있으면 미처 삼가지 못할까 두려워하니, 황제의 돌보심이 특별히 더하여 거듭 사랑함을 입었으므로 우리 나라 백성들이 기뻐하여 길이 수(壽)하기를 바야흐로 원하였는데, 하늘이 무정(無情)하여 갑자기 병이 들었다. 목숨이 끊어짐에 미쳐서도 정신이 조금도 어지럽지 아니하였고, 백성을 수고롭게 해서 장례(葬禮)할 것을 염려하여 유명(遺命)으로 상장(喪葬)을 모두 검약(儉約)하게 하라고 하여 죽으면서도 오히려 백성에게 은혜를 입혔으니, 통탄함을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註 32]배표(拜表) : 표문에 배례하는 의식. ☞

[註 33]폐복(敝服) : 우리 나라를 낮추는 말. ☞

[註 34]영락(永樂) 15년 : 1417 태종 17년. ☞

[註 35]경태(景泰) 3년 : 1452 문종 2년. ☞

[註 36]공순왕(恭順王) : 문종. ☞

[註 37]사왕(嗣王) : 단종. ☞

[註 38]4년 : 1453 단종 원년. ☞

[註 39]6년 : 1455 단종 3년. ☞

[註 40]7년 : 1456 세조 2년. ☞

[註 41]체수(滯囚) : 오래 갇혀 있는 죄수. ☞

[註 42]자봉(自奉) : 스스로 자기 몸을 보양함. ☞

[註 43]불차 탁용(不次擢用) : 공로가 있는 사람을 벼슬에 임명할 때 서열(序列)의 차례와 자급(資級)을 무시하고 발탁하여 임명하던 것. ☞

[註 44]발섭(跋涉) :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길을 감. ☞

[註 45]관상(關上) : 산해관(山海關). ☞

[註 46]천순(天順) 원년 : 1457 세조 3년. ☞

[註 47]치주례(齒胄禮) : 세자가 학교에 들어갈 때 신분(身分)에 따르지 않고 연령(年齡)에 따라서 다른 학생 사이에 자리를 정하는 예식. ☞

[註 48]천순 2년 : 1458 세조 4년. ☞

[註 49]사목(司牧) : 임금. ☞

[註 50]3년 : 1459 세조 5년. ☞

[註 51]풍부(馮婦) : 《맹자(孟子)》 진심(盡心)편에 보면, “진(晉)나라 사람에 풍부라는 자가 있었는데, 범을 잘 잡다가 나중에 좋은 선비가 되었다. 그 후 그가 들에 나갔는데, 여러 사람들이 범을 쫓다가 범이 벼랑턱을 등에 지고 버티고 있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고, 풍부를 바라보고서는 달려가서 그를 환영하였다. 풍부는 팔을 흔들면서 수레에서 내렸는데, 그 여러 사람들은 다들 기뻐하였으나 선비들은 그를 비웃었다.”고 하였으니, 해야 할 것 같으면 따르지만 불가(不可)한데 그만두지 않으면 유해(有害)하다는 뜻임. ☞

[註 52]4년 : 1460 세조 6년. ☞

[註 53]편맹(編氓) : 우리 나라 호족에 편입된 백성. ☞

[註 54]겸종(傔從) : 따르는 하인. ☞

[註 55]7년 : 1463 세조 9년. ☞

[註 56]주의(注擬) : 관원을 임명할 때 먼저 문관(文官)은 이조(吏曹), 무관(武官)은 병조(兵曹)에서 후보자 3사람[三望]을 정하여 임금에게 올리던 것. ☞

[註 57]사목(四目) : 사방 백성의 일을 보는 식견. ☞

[註 58]실봉(實封) : 신하가 임금에게 생민(生民)의 이해와 사직(社稷)의 안위(安危)에 관한 중대사를 밀계(密啓)할 때 다른 사람이 소장의 내용을 보지 못하도록 봉(封)하던 일. ☞

[註 59]도리(道里) : 거리. ☞

[註 60]공순왕(恭順王) : 문종. ☞

[註 61]풍후(風后) : 황제(黃帝) 때의 재상. ☞

[註 62]《악기경(握奇經)》 : 병서(兵書)의 이름. ☞

[註 63]이정(李靖) : 당(唐)나라 태종 때의 명신으로 병법에 능하였음. ☞

[註 64]번한(蕃漢) : 오랑캐와 중국. ☞

[註 65]기정(奇正) : 기병(奇兵)과 정병(正兵). ☞

[註 66]하도(河圖) : 옛날 중국의 복희(伏羲) 때 황하(黃河)에서 나왔다는 용마(龍馬)의 등에 나타난 도형(圖形). 역괘(易卦)의 원리가 되었음. ☞

[註 67]낙서(洛書) : 중국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홍수(洪水)를 다스렸을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龜)의 등에 쓰여 있었다는 글로서 홍범(洪範)의 원본(原本)이 된 것임. ☞

[註 68]빈모(牝牡) : 암수. ☞

[註 69]공성(孔聖) : 공자. ☞

[註 70]시랑(豺狼) : 악한 무리. ☞

[註 71]구공(九功) : 육부(六府)와 삼사(三事). 육부는 수(水)·화(火)·금(金)·목(木)·토(土)·곡(穀)이고, 삼사는 정덕(正德)·이용(利用)·후생(厚生)임. ☞

[註 72]칠덕(七德) : 무(武)의 일곱 가지 덕. 곧 금포(禁暴)·집안(戢安)·보대(保大)·정공(定功)·안민(安民)·화중(和衆)·풍재(豊財)임. ☞

[註 73]성화(成化) 3년 : 1467 세조 13년. ☞

[註 74]편사(偏師) : 한 패의 군대. ☞

[註 75]4년 : 1468 세조 14년. ☞

[註 76]척찰(尺札) : 칙서. ☞

[註 77]정렴(征斂) : 부세. ☞

[註 78]저치(儲峙) : 곡식의 축적. ☞

[註 79]우(虞) : 순(舜) 임금. ☞

[註 80]유아(儒雅) : 유학자. ☞

[註 81]수명(受命) : 임금이 됨. ☞

   

예종 1권, 즉위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9월 17일(계유)

종친과 재추들에게 원릉으로 쓸 만한 땅을 살피게 하다

하동군 정인지(鄭麟趾)·봉원군 정창손(鄭昌孫)·고령군 신숙주(申叔舟)·상당군 한명회(韓明澮)·능성군 구치관(具致寬)·영성군 최항(崔恒)·좌의정 박원형(朴元亨)·우의정 김질(金礩)·남양군 홍달손(洪達孫)·(산양山陽君) 강순(康純)·창녕군 조석문(曹錫文) 및 밀성군 이침(李琛)·영순군 이부(李溥)·영의정 이준(李浚) 등이 모여서 원릉(園陵)84) 으로 쓸 만한 땅을 의논하여, 길을 나누어 가서 살피게 하였다.

 

예종 1권, 즉위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10월 1일(정해)

종친과 재추에게 정흠지의 묘자리가 능침에 적당한가를 아뢰게 하다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하성군(河城君) 정현조(鄭顯祖)·사산군(蛇山君) 이호(李灝)·강양군(江陽君) 이융(李瀜)·정양군(定陽君) 이순(李淳)·팔계군(八溪君) 이정(李瀞)·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봉원군(蓬原君) 정창손(鄭昌孫)·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좌의정 박원형(朴元亨)·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영성군(寧城君) 최항(崔恒)·남양군(南陽君) 홍달손(洪達孫)·창녕군(昌寧君) 조석문(曹錫文)·산양군(山陽君) 강순(康純)·우의정 김질(金礩)·중추부 영사(中樞府領事) 심회(沈澮)·좌찬성 김국광(金國光)·좌참찬 유수(柳洙), 중추부 지사 김개(金漑)·한계희(韓繼禧)·어효첨(魚孝瞻)·윤사흔(尹士昕)·홍응(洪應)·구종직(丘從直)·서거정(徐居正), 공조 판서 김예몽(金禮蒙)·예조 판서 임원준(任元濬)·이조 판서 성임(成任)·대사헌(大司憲) 양성지(梁誠之)·참판(參判) 정자영(鄭自英)·보덕(輔德) 최사로(崔士老)·문학(文學) 김계창(金季昌)·사경(司經) 성현(成俔)·설서(說書) 최숙정(崔淑精)과 승지(承旨)들을 불러 여차(廬次)에 들어 오게 하였다. 도승지 권감(權瑊)으로 하여금 상지관(相地官)을 하나하나 불러서 묻기를,

“너희들이 어제 본 정흠지(鄭欽之)의 묘자리에서 그 산세(山勢)의 길흉(吉凶)을 숨김없이 다 아뢰라.”

하니, 안효례(安孝禮)·최호원(崔灝元)은 대답하기를,

“산세가 능침(陵寢)에 적당하나 다만 주혈(主穴)이 기울어져서 보토(補土)하여야 쓸 수 있습니다.”

하고, 홀로 조수종(曹守宗)은 말하기를,

“백호(白虎) 안에 작은 언덕을 없애면 더욱 좋습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에게 묻자, 모두 말하기를,

“없애는 것이 좋습니다.”

하고, 안효례 등은 아뢰기를,

“있어도 무방합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유견(兪堅)의 무덤은 어떠한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쓸 수 없습니다.”

하였다. 서거정·임원준에게 묻기를,

“상지관의 말한 바가 경들의 뜻에 어떠한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산세가 매우 기이하여서 바로 원릉(園陵)에 적합합니다. 그 국내(局內)의 작은 언덕의 길흉은, 청컨대 여러 책을 상고하여 계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또 종친과 재추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경들을 인견(引見)한 것은 품은 뜻을 진술하게 하려고 한 것이니, 각각 모두 말하라.”

하니, 어효첨·김예몽이 대답하기를,

“신 등도 이 산이 매우 아름답다고 들었습니다. 작은 언덕을 없애지 아니하는 것이 도리어 좋은지를 어찌 알겠습니까?”

하니, 정인지에게 묻기를,

“경이 좋지 못하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광평 대군(廣平大君)·평원 대군(平原大君) 두 대군(大君)과 문종(文宗)의 묘자리를 살펴 볼 때에 신이 산을 보니, 청룡(靑龍) 밖에 산수(山水)가 등을 져서 흐르고 주혈(主穴)이 기울었으며 또 돌이 많기 때문에 쓸 만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산릉은 내가 이미 정하였으니, 27일 후에 친히 가서 보겠다.”

하였다.

  

 

                                                                  - 繼 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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