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예종실록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예종실록(8권1년)[9]

작성자山房山(榮國)|작성시간11.05.05|조회수94 목록 댓글 0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5. 예종실록[9]

 

예종 8권,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12월 18일(정묘)

경인 2월에 대행 대왕을 창릉에 장사하다. 그 애책문(哀冊文)·애사(哀詞)와 묘지문[誌文]

경인1328) 2월에 대행 대왕을 창릉(昌陵)에 장사하였다. 그 애책문(哀冊文)은 이러하였다.

“유세차(維歲次) 성화(成化) 5년1329) 기축 11월 신사삭(辛巳朔) 28일 무신에 예종 흠문 성무 의인 소효 대왕이 정침(正寢)에서 훙하고, 다음 해 2월 초5일 갑인에 자리를 창릉으로 옮기니, 예(禮)로서 찬궁(攢宮)1330) 을 처음으로 열고 조연(祖筵)1331) 을 곧 거두었도다. 소혁(素奕)이 주년(周年)에 거두었고 옥루(玉漏)가 절서를 일깨웠도다. 천궐(天闕)의 높다란 곳으로 향하고 천대(泉臺)의 아득한 데를 가리켰도다. 산풍(酸風)이 사사(絲絲)1332) 하니 처량한 소리요, 고월(苦月)이 비꼈으니 담담(淡淡)한 빛이로다. 사왕(嗣王)이 순위(蜃衛)1333) 를 부여잡고 못가게 하고, 예로(鷖輅)1334) 를 어루만지며 슬피 우네. 시월(時月)의 제한이 있음을 슬퍼하고 유명(幽明)이 길이 막힘을 애통하노라. 옹용(雍容)한 말이 난전(鸞殿)에서 내렸고 성주(聖主)의 공렬(功烈)이 봉책(鳳冊)에 나부꼈네.”

그 애사(哀詞)는 이러하였다.

“탕탕(蕩蕩)1335) 한 성덕(聖德)이여, 오직 우리 예종이로다. 일찍 신극(宸極)에 오르니, 진실로 이중(离重)에 합하도다. 백성을 감무(監撫)하기에 전념하니, 구가(謳歌)1336) 가 사방에서 일어나도다. 하루에 세 번씩 조근하여 대비를 공경하고, 만가지 기무(機務)에 참여하여 결정하였도다. 하늘이 낳은 영주(英主)로서 학문도 또한 민첩하였도다. 요임금이 갑자기 정사를 싫어하니, 성왕(成王)과 같이 사복(嗣服)하였도다. 이윽고 세조의 상사를 만나니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많았도다. 신묘한 계책을 홀로 운행하니 요망(妖妄)한 분위기가 길이 사라졌도다. 을야1337) 에 도(道)를 생각하고 짐독(鴆毒)과 같이 연락(宴樂)을 경계하였도다. 수찰(手札)로 구언(求言)하였고, 허금(虛襟)으로 간쟁(諫諍)을 받아들였도다. 농사를 힘쓰게 하고,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며, 상주기는 밝게 하고, 벌주기는 삼가하였도다. 무비(武備)를 거듭 엄하게 하고, 유술(儒術)을 성하게 일으켰도다. 크게 나타난 문모(文謨)요, 막강한 무열(武烈)이로다. 법도로 다스리는 융성한 소문이 늪이 나타났도다. 길이 융성한 태평이 오기를 바랐더니, 덕이 있는 자에게 수(壽)를 주지 아니하여 꿈도 오래 가지 못하였도다. 아! 슬프도다. 어진 성격은 마음에서 인하였거니와 큰 효도는 이름하기 어렵도다. 초상에는 예를 다하였고, 제사에는 정성이 지극하였도다. 그래도 효사(孝思)를 살펴보고 사모함이 갱장(羹墻)1338) 과 같이 간절하였도다. 상로(霜露)1339) 를 느낀 지 얼마 안되는데, 갑자기 연복(練服)과 상기(祥期)가 이르렀도다. 애훼(哀毁)가 진실로 지나치니, 질진(疾疹)이 이에 일어났도다. 양암(梁闇)1340) 은 삼기(三紀)를 다하지 못하였는데, 옥궤(玉几)가 갑자기 하루 저녁에 비겼도다. 아! 슬프도다. 요망한 기운이 대관(臺觀)에 고(告)하니 점쳐 보는 희망도 끊어졌도다. 만세(萬歲)에 숭악(嵩嶽)에서 환호를 부르려고 하였더니, 구천(九天)이 갑자기 기국(杞國)에 무너졌도다. 우레와 같은 곡성은 면구(綿駒)1341) 의 노래보다 더하고, 비와 같은 눈물은 장락궁(長樂宮)에 뿌렸도다. 아! 슬프도다. 진세(塵世)를 싫어하여 신선 세계로 떠나니, 예정(霓旌)1342) 은 제향(帝鄕)과 멀어졌도다. 만승(萬乘)을 버리기를 휴식(休息)과 같이 하였으니, 백령(百靈)의 조회(朝會)를 어디서 받을 것인가? 상설(象設)의 엄함이여, 수원(壽原)이 새롭고 용어(龍馭)가 버려졌으니, 깊은 밤 길기도 하다. 오직 지극한 덕이 사람에게 있으니, 만고에 통하도록 하루와 같으리라. 산(山)은 가히 옮기고 바다는 가히 마를지언정, 명성이 어찌 다하고 도가 어찌 없어지랴!”

또 그 지문(誌文)은 이러하였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예종 대왕(睿宗大王)의 휘는 이황(李晄)이고, 자는 평보(平甫)이다. 세조의 둘째 아들로서, 자성 왕비(慈聖王妃) 윤씨(尹氏)가 경태(景泰) 원년1343) 정월 정축(丁丑)에 왕자의 저택에서 낳았는데, 천자(天姿)가 기의(岐嶷)하고 성품이 영예(英叡)하였다.

처음에 해양 대군(海陽大君)에 봉하였는데, 천순(天順) 원년1344) 9월에 왕세자가 졸(卒)하였으므로, 세조가 왕을 세워 세자로 삼았다. 왕이 안으로는 성훈(聖訓)을 받들고, 밖으로는 세자 빈객(賓客)과 더불어 절차(切瑳)하니, 세자의 덕이 날로 성취되었다.

성화(成化) 2년1345) 봄에 세조께서 학궁(學宮)1346) 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에게 제사를 지낼 때 왕이 아헌례(亞獻禮)를 행하고, 물러나와 연령의 차례에 의하여 박사(博士)를 어른으로 삼고 경서를 가지고 도(道)를 강하였는데, 그 자리를 돌고 읍(揖)하는 것이 모두 규도(規度)에 맞았으므로, 보고 듣는 사람이 서로 경축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3년1347) 봄에 세조께서 몸이 편치 않아 왕에게 명하여 여러 국무를 참여하여 결정하게 하였는데, 청단(聽斷)하는 것이 명확하고 합당하였다. 세조께서 기뻐하며 이르기를, ‘나라의 일을 부탁(付托)할 만한 사람을 얻었으니, 나는 이제 근심할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 이듬해 8월에 세조의 병이 대단해지자 왕에게 명하여 위를 잇게 하고, 유명(遺命)으로 석실(石室)을 쓰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뒤에 이르러 대신들이 석실을 쓰자고 청하니, 수찰(手札)로 답하여 이르기를, ‘산릉(山陵)의 모든 일은 비록 전보다 낫게는 못할지언정 전보다 감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나의 본마음이다. 다만 유교(遺敎)를 생각해보니 엄하여 어길 수 없고, 성심을 다하지 못한 일이 많다. 아들로서 효도를 생각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생각하는 것은 하늘과 땅이 다하도록 어찌 다 말하랴. 그러나 다시 유촉(遺囑)을 생각하니,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이기지 못하겠도다. 이제 경 등이 석실 쓰기를 청하는 것은 이것도 또한 지성에서 나왔으나, 그러나 선왕의 말명(末命)이 황연(怳然)히 귀에 남아 있는데, 감히 마음에 잊어버리겠느냐? 태비께서도 천성이 인자하시어 유교를 어기지 않으려고 하시는 것은 경 등도 잘 아는 바이다. 마땅히 이 뜻을 몸받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10월에 전라도 관찰사가 하직하니, 왕이 이르기를, ‘국사가 다사(多事)한데, 친민의 요체(要諦)는 모든 일을 진정시킬 것이나, 백성을 괴롭게 하는 것은 불가하니,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사람였다. 재위(在位)한 지 겨우 1년을 넘겼지만, 대개 호령(號令)에 나타난 것이 작연(焯然)히 기록할 만하였으므로, 바야흐로 중광(重光이 있으면 법문에 구애하지 말고 편이하게 구처하라.’라고 하였다. 그때에 부상(富商)과 대고(大賈)들이 국가에 공부(貢賦)하는 물품을 대납(代納)하고, 그 값을 백성들에게 받았으므로, 백성들이 심히 괴롭게 여기었는데, 왕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엄중히 금지시켰다. 적신(賊臣) 남이(南怡)와 강순(康純)이 가만히 무뢰한(無賴漢)들과 결탁하여 난을 일으키려고 하므로, 금병(禁兵)을 내어서 체포하여 처참하고, 난이 평정된 뒤 익대 공신(翼戴功臣) 39인을 책봉하였다.

11월에 교서를 내리어 구언(求言)하였다.

5년1348) 윤2월에 명나라 황제가 세조에게 사제(賜祭)하고 또 왕에게 고명(誥命)을 보내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어 그 은혜를 사례하였다. 이달 병자에 우설(雨雪)이 때 아니게 내리니, 손수 교서(敎書)를 써서 내리어 죄가 가벼운 수도(囚徒)를 석방시켰다. 제도 관찰사에게 하유하여, 훌륭한 재주와 특이한 능력이 있는 선비로서 산림(山林)에 엄체(淹滯)한 자를 각기 천거하게 하고, 또 제도에 하유하여 효자와 열녀들을 수방(搜訪)하여 계문하게 하였다. 당시에 흰 까마귀가 금원(禁苑)으로 모여 들었는데, 대신들이 서첩(瑞牒)을 조사하여 축하하기를 청하니, 왕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7월에 오랫동안 가물었다. 왕이 감선(減膳)하고, 죄수를 염려하여 소방(疎放)하고, 몸소 영창전(永昌殿)에 나아가 비를 비니, 이에 비가 왔다. 대고(大賈)가 죄를 지어 유배(流配)에 처하게 되었는데, 왕의 보모(保母)에게 칭탁하여 죄를 모면하려고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임금은 사사가 없는 법인데, 네가 감히 보모의 청탁으로 나라의 법을 굽히려고 하느냐?’ 하고, 마침내 곤장을 때리고 유배시켰다.

처음에 세조께서 병에 걸렸을 때, 왕이 시선(視膳)하고 상약(嘗藥)하였으며, 밤낮으로 시병(侍病)하여 잠을 자지 못한 지가 여러 달이었다. 세조가 훙함에 미쳐서는 슬퍼함이 예제(禮制)에 넘어 작음(勺飮)도 마시지 않아서 드디어 절선(節宣)을 어기었다. 겨울에 이르러서는 병이 생겨서 날로 심하였는데, 11월에 무신에 경복궁(景福宮)의 정침(正寢)에서 훙하니, 향년 20세였다.

왕은 영의(英毅) 명단(明斷) 하고, 온문(溫文) 인검(仁儉)하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춘궁(春宮)에 있을 때부터 하루 세 차례씩 조근의 예를 행하였고, 즉위함에 미쳐서는 자성 모비(慈聖母妃)를 받들어 섬기기를 더욱 삼가하고, 구족(九族)에게 돈목(敦睦)하고, 군신(群臣)에게 예우(禮遇)하니, 궁위(宮闈)1349) 가 숙연(肅然)하였다. 세조의 풍성하고, 태평한 운(運)을 이어받아 능히 영성(盈盛)함을 경계하고, 위태(危殆)함을 생각하고, 문(文)을 숭상하면서도 무(武)를 해이하게 아니하고, 벌주기에 밝으면서도 상주는 데에는 참람하게 하지 않았고, 근본을 힘쓰고 쓰기를 절약하며, 요역을 가볍게 하고 부세를 적게 하며, 백성들을 아들과 같이 길러 날마다 겨를이 없었고, 정사를 다스리는 여가에는 전분(典墳)에 유의하여 전고의 치란(治亂)의 자취를 보아 《역대세기(歷代世紀)》를 몸소 찬술하였고, 또 문신들에게 명하여 《국조무정보감(國朝武定寶鑑)》을 찬술하였다. 왕이 매양 수찰을 내리면 모두 권권(惓惓)1350) 히 다스림을 원하는 형세였으며, 자주 군신들을 인견(引見)하고 윤대(輪對)하여 국정의 득실을 강구하고, 정치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고치게 하고, 제도(諸道)에 신유(申諭)하여 오리(汚吏)를 엄하게 징계하고, 지체된 죄수를 심리(審理)하고, 큰 것을 섬기고 작은 것을 사랑하며, 성신(誠信)에 힘쓰게 하)1351) 을 우러러보려고 하였는데, 갑자기 훙하셨으니, 아! 슬프도다.

금상 전하(今上殿下)께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으시고, 초상과 제사에 예를 다하고,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존시(尊諡)를 올려 ‘흠문 성무 의인 소효’라 하고, 묘호(廟號)를 올려 ‘예종’이라 하였다.

경인년1352) 2월 갑인에 고양현(高陽縣) 치소의 동쪽 봉현(蜂峴) 언덕에 장사하였다.

세조께서 처음 왕이 되어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의 딸을 빈(嬪)으로 삼아 1남(男)을 낳았으나, 빈과 아들은 모두 먼저 졸(卒)하였는데, 빈의 시호는 장순(章順)이다. 세조께서 병이 위급하였을 때에 왕에게 명하여 사위(嗣位)하게 하고, 청천군(淸川君) 한백륜(韓伯倫)의 딸 소훈(昭訓) 한씨(韓氏)를 올려서 왕비로 삼았으니, 곧 인혜 왕대비(仁惠王大妃)이다. 2남 2녀를 낳았으나, 1남과 1녀는 먼저 졸(卒)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註 1328]경인 : 1470 성종 원년. ☞

[註 1329]성화(成化) 5년 : 1469 예종 원년. ☞

[註 1330]찬궁(攢宮) : 빈전 안의 임금의 관을 둔 곳. ☞

[註 1331]조연(祖筵) : 마지막 보내는 제사. ☞

[註 1332]사사(絲絲) : 가늘고 길게 이어진 모양. ☞

[註 1333]순위(蜃衛) : 널과 상여. ☞

[註 1334]예로(鷖輅) : 상여. ☞

[註 1335]탕탕(蕩蕩) : 광대(廣大)한 모양. ☞

[註 1336]구가(謳歌) : 임금의 인덕(仁德)을 칭송함. ☞

[註 1337]을야 : 2경(二更). ☞

[註 1338]갱장(羹墻) : 순이 요를 사모하는 것. ☞

[註 1339]상로(霜露) : 세월. ☞

[註 1340]양암(梁闇) : 상주의 의려(倚廬). ☞

[註 1341]면구(綿駒) : 춘추 시대의 제(齊)나라 사람. 노래를 잘 불렀음. ☞

[註 1342]예정(霓旌) :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기. ☞

[註 1343]경태(景泰) 원년 : 1450 세종 32년. ☞

[註 1344]천순(天順) 원년 : 1457 세조 3년. ☞

[註 1345]성화(成化) 2년 : 1466 세조 12년. ☞

[註 1346]학궁(學宮) : 성균관의 별칭. ☞

[註 1347]3년 : 1467 세조 13년. ☞

[註 1348]5년 : 1469 예종 원년. ☞

[註 1349]궁위(宮闈) : 궁궐(宮闕). ☞

[註 1350]권권(惓惓) : 삼가는 모양. ☞

[註 1351]중광(重光) : 덕이 높은 임금이 잇달아 나옴. ☞

[註 1352]경인년 : 1470 성종 원년. ☞

 

                                                                     - 終 -

 

                                                           -이어서 성종실록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