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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성종실록(95권9년) [3]

작성자山房山(榮國)|작성시간11.05.05|조회수39 목록 댓글 0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6. 성종실록

 

성종 95권, 9년(1478 무술 / 명 성화(成化) 14년) 8월 10일(기해)

 

우승지 홍귀달에게 이시애의 난에 대해 물어보다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임금이 홍귀달(洪貴達)에게 이르기를,

“경이 이시애(李施愛) 난(亂) 때의 일을 알거든 시험삼아 말해보도록 하라.”

하니, 홍귀달이 아뢰기를,

“정해년8842) 5월에 이시애가 절도사(節度使)·관찰사(觀察使) 및 수령(守令)과 만호(萬戶)를 죽였는데, 글로 아뢰자 세조께서 곧 명하여 허종(許琮)을 절도사로 삼고 신을 평사(評事)로 삼아서 먼저 들여보내고, 또 이준(李浚)8843) 과 조석문(曺錫文)을 도총사(都摠使)로 삼고 강순(康純)·박중선(朴仲善)·어유소(魚有沼)를 장수(將帥)로 삼아 가서 토벌하게 하였는데, 허종과 어유소가 매양 선봉이 되어 북청(北靑)에 이르니,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산에 올라가서 피하고 관사(官舍)에 사람이 없었습니다. 장차 진(陣)을 치고 자려고 하다가 이시애가 밤에 싸우려고 한다는 것을 듣고 급히 목책(木柵)을 설치하게 하였는데, 그 둘레가 경복궁(景福宮)의 성(城)보다 크고 매우 견고하였습니다. 과연 밤중에 적병이 와서 남쪽 모퉁이를 침범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진을 굳게 지키고 싸우지 아니하다가 새벽이 되려고 하자 비로소 서로 싸워서 적이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많았고, 한낮에 이르자 적이 쓰러지거나 물러갔으나 우리 군사도 피로하여 뒤쫓지 못하였습니다. 북청을 떠나서 이성(利城)으로 향하다가 적이 또 우리를 향해 와서 길에서 만났는데, 우리 군사는 작은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서쪽에 있고 적은 영(嶺)에 의거하여 동쪽에 있어 서로 마주 대하고 싸웠습니다. 해가 이미 서쪽에 기울었으나 승부가 나지 아니하다가, 우리 군사가 화차(火車)를 가지고 오니 적의 무리는 피해서 달아나고, 우리 군사가 쫓아서 베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마침 해가 저물어서 돌아왔는데, 이시애가 달아나서 오진(五鎭)으로 향하는 것을 우리 군사가 따라가자, 이시애는 그 부하에게 사로잡힌 바가 되어 군전(軍前)에 이르렀으며 즉시 참(斬)하였습니다. 이것이 그 대강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 우리 군사 가운데 죽은 자는 몇 명이나 되는가?”

하니, 홍귀달이 말하기를,

“우리 군사의 전사자는 많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도(道)의 인심이 어리석고, 미혹하여 먼저 들은 말을 주장하므로, 신 등이 아무리 거역과 순종의 의리로써 거듭 타일렀으나, 저들이 겉으로는 거짓 허용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실제로 불신(不信)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시애가 이미 복주(伏誅)되자 그 백성 가운데 또 신 등을 모해(謀害)하려는 자가 있었는데, 허종(許琮)의 관대(寬大)함에 힘입어서 능히 인심을 진정시킨 까닭으로 요동되는 데에 이르지는 아니하였습니다.”

하였다.

[註 8842]정해년 : 1467 세조 13년. ☞

[註 8843]이준(李浚) : 귀성군(龜城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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