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연산군일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연산군일기(연산31권4년)

작성자山房山(榮國)|작성시간11.05.05|조회수290 목록 댓글 0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7),연산군일기

 

연산 31권, 4년(1498 무오 / 명 홍치(弘治) 11년) 9월 6일(신축)

 

선성 부원군 노사신의 졸기

선성 부원군(宣城府院君) 노사신(盧思愼)이 졸(卒) 하였다. 사신의 자(字)는 자반(子胖)이요, 재호(齋號)는 보진(葆眞)이다. 교하(交河) 사람인데,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물재(物載)의 아들이며, 우의정(右議政) 한(閈)의 손자이다. 젊어서 글을 읽으매, 하루에 수백 단어를 기억했으며, 경태(景泰) 계유년2060) 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에 제수되었다가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다.

을해년에 어머니 상을 만났으며, 복을 벗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어, 군자감(軍資監)에 분대(分臺)되었는데, 말[斗]을 되느라고 분요하여 먼지와 티끌이 눈을 가리니, 공은 책상에 쓰기를,

‘장부의 뇌락한 평생 뜻이

어찌 한 말 한 되 출납하는 속에 있을까 보냐.’

하였다.

무인년에 사간원 좌정언(司諫院左正言)에 제수되어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거쳐 세자 문학(世子文學)으로 전임되었다. 휴가를 얻어 진위현(振威縣)을 지나다가 투숙하고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출발하여 두어 마장을 갔는데, 소리(小吏)가 달려오며 불러댔다. 사신은 멈추고 기다리니, 소리가 말하기를 ‘갑 속에 둔 붓을 잃어버려 원님이 나를 시켜 찾아오라 했다.’고 하니, 사신은 웃고 차고 있던 주머니 속에서 붓을 내어 주었다. 임오년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뛰어올라 도승지(都承旨)로 전임되었다. 을유년에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제수되고 병술년에 발영(拔英)·등준(登俊) 두 시험에 합격하였다. 무자년에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복주(伏誅)하자, 추충 정란 익대 공신(推忠靖難翊戴功臣)에 책봉되었고, 누차 승진되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신묘년에 성종께서 협보(夾輔)한 공을 기록하여 순성 명량 좌리 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에 책봉되었다. 병신년에 선성 부원군(宣城府院君)으로 승진되고, 정유년에 우의정(右議政)으로 승진되고 임자년에 좌의정에 오르고, 갑인년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승진되고, 가을에 부원군(府院君)으로 체배(遞拜)되었으며, 12월에 치사(致仕)를 빌었는데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무오년 9월에 병이 위독하자 왕이 승지(承旨) 홍식(洪湜)을 보내어 하고 싶은 말을 물으니, 사신은 아뢰기를 ‘신은 말씀드릴 것이 없사옵고 다만 상과 벌을 적중하게 할 것과 부지런히 경연(經筵)에 납시기를, 원할 뿐이옵니다.’ 하였다. 나이는 72세였다. 시호를 문광(文匡)이라 하니, 박문 다견(博聞多見)을 문(文)이라 하고, 정심 대도(貞心大度)를 광(匡)이라 한다.

사신은 흉금(胸襟)이 소탈하여 겉치레를 일삼지 않고 규경(畦逕)을 생략하였으며 치산(治産)을 경영하지 않았다. 뜻이 활달하여 서사(書史)를 박람하여 관통하지 못한 것이 없었으며, 불경(佛經)·도서(道書)까지도 역시 모두 보았다. 만년에 거처하는 당(堂)을 천은당(天隱堂)이라 이름하고 옛사람의 서화(書畫)를 모아 그로써 스스로 즐겼다. 다만 세조가 일찍이 용문사(龍門寺)에 거둥하여 손으로 구름 끝을 기리키며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백의(白衣)를 입은 관음(觀音)이 현상(現象)하였다.’ 하니, 여러 신하들은 쳐다보기만 하고 능히 대답을 못하는데, 사신만이 크게 ‘관음이 저기 있다.’고 외치니, 사람들이 그 아첨을 미워하였다.

성종조에 정승이 되었으나 건명(建明)한 바는 없었고, 금상이 즉위한 처음에 수상(首相)이 되었는데, 왕이 대간(臺諫)에게 노여움을 가져 잡아다가 국문하려 하니, 사신이 아뢰기를 ‘신은 희하(喜賀)하여 마지 않는다.’ 하였고, 태학생(太學生)이 부처에 대해서 간(諫)하자 귀양보내려고 하니, 사신이 또한 찬성했으므로, 사림(士林)들이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그 성품이 남을 기해(忮害)하는 일은 없었다.

사옥(史獄)이 일어나자, 윤필상(尹弼商)·유자광(柳子光)·성준(成俊) 등이 본시 청의(淸議)하는 선비를 미워하여, 일망 타진(一網打盡)하려고 붕당(朋黨)이라 지목하니, 사신은 홀로 강력히 구원하면서 ‘동한(東漢)에서 명사(名士)들을 금고(禁錮)하다가 나라조차 따라서 망했으니, 청의(淸議)가 아래에 있지 못하게 해서는 아니된다.’ 하였다. 그래서 선비들이 힘입어 온전히 삶을 얻은 자가 많았다.

사신의 아들 공필(公弼)은 학식이 있고 또 경력이 많아서 세무(世務)에 숙달하였다. 그러나 그 살림을 하는 데는 사호(絲毫)라도 유기(遺棄)하지 않아 많은 선박(船舶)을 만들어서 세를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 또 서족(庶族) 노종선(盧從善)과 짝이 되어, 사방 공사간의 천인으로 누락되었거나 숨어 있는 자를 찾아내어 아전에게 소청하여 상을 받아서 나누었다. 또 유자광(柳子光)·임사홍(任士洪)과 더불어 통가(通家)2061) 의 벗을 맺으니 사람들이 이로써 그 심술이 부정함을 알았다.

[註 2060]계유년 : 1453. ☞

[註 2061]통가(通家) : 인척(姻戚).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