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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 지사기

信川康氏 信川府院君 領議政 壯慜公 康純 之史記

작성자山房山|작성시간09.05.16|조회수181 목록 댓글 0

 

 

              信川康氏 信川府院君 領議政 壯慜公 康純 之史記      

 

 

 

 

朝廷을 지키며

나라를 위해 산 名臣 康純 (1390-1468)

 

 

         조선초엽의 용맹한 무인이었다.

 

      자는 태초(太初), 본은 신천(信川), 판삼사사(判三司事)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윤 성(允成)의

      증손이며 병마 절도사 `진(鎭)의 아들로 남포에서 출생 어렸을때는 효행이 지극하여 효자로

      소문났었고 덕이 있고, 마음씨가 정직해서 음보(陰補)로 무관에 등용되어 (1450년) 문종(文宗)

      때에  조전(助戰)절제사올랐으며 단종(端宗)1년(1453)엔 회령부사를 거쳐 의주목사를 지내

      게된.  다음 해엔 지중추원사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여 명(明)나라에 다녀와선 (1460)엔

      판녕북진도부사가 되어 여진정벌에 참가하여 높은 공으로 종성(鍾城)절제사가 되었다.

      세조13년(1467) 이시애가 난(亂)을 일으키자, 임금이 구성군 이준 으로 도청사를 삼고,

      호조판서 조석문으로 부총사를  삼고, 허종을 기복(起復)시켜 함길도절도사를 삼고, 강순을

      진북장군 으로 어유소, 남이등과 평안도병을 이끌고 난을 진압 시키러 홍원, 북청, 만령, 

      등 지로 행하였다.

      세조의 동생(임영대군) 의 아들인 도청사 구성군은 당시 나이18세인 젊은이 였다.

      강순은 도총사 구성군이 말하기를 『무인은 정사에 나서지 않는게 좋겠다고한유하게 말

      .

      그는 대답하길 『 우리나라 무신의 목숨은 기둥과 같으나 그 기둥은 나라를 지키는 기둥

      입니다.

      무인의 목숨은 자기것도 아니고, 가족의 것도 아니며 더구나 씨족의 것은 더욱 아니며 오직

      나라 만이 소유한 목숨입니다.』 하고 대답 하였다.

      다시 도청사 구성군이 싸움에 분전하는 강순을 보고 그렇게 몸을 아끼지 않다가 전사라도

      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하자, 조금전에 말씀 드린대로 입니다.』 하고 다시 적을 무찌르러

      뛰어 나가는것이였다.

      반란군을 격파하고 이시애를 사로 잡아 목을 베어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으며

      공으로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 1등에 녹훈되고 우의정 승진되었다.

      이어  건위주 이만주가 반 하매 명나라에서 응원군을 보내어 양쪽에서 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어유소를 좌장군 남이를우장군으로 삼고 진북장군 강순으로 주장을 삼아서 정병 1만명 

      을 거느 리고 압록강을 건너 길을 나누어 바로 건주 동북쪽 발저강 올미부 여러 영채를 두드려

      여러부락 소탕하고                                             

      모년 모월일에 조선국 정서대장 강순과 좌대장 어유소 등이 올미부를 쳐서 멸하였다. 고

      기념비를 세우고 회군하여 승첩한 것을 들며 일등공신에 녹훈하여 세조 무자년 (1468)

      신천부원군봉 하였고 우상 이되고 이어 영의정 으로 승진 하며 오위도총관에 임명되였으며

      이 공으로 명나라  헌종으로 부터는 은 20냥과 비단을 하사 받았다.

      같은 해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하매 유자광이 『 남이가 모반을 한다』.고 고하여 안주

      하는데 남이가 국문을 받을적에 그가 영의정으로 국청에 참여하였다.

      남이가 형벌에 정강이 뼈가 부러지매 드디어 항복하고 

      강순이가 시켜서 그리 하였다. 하매 

      강순이 말하되  『신이 본래 한 백성으로서 다행히 밝은 임금을 만나 벼슬이 극품에 오르고

      나이 70이 지났으니 다시 무엇을 구하여 남이의 모반에 참여 하였겠습니까.하니

      임금도 그말을 옳게 여겼다.

      남이가 다시 말하길 『 임금이 아첨하는 말을 듣고 용서하여 주시니 어떻게 죄인을 잡을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다시 명하여 국문하니 강순이 나이 늙어서 고문을 견디지 못하여 자복 하였다.

      남이가 웃으면서  내가 불복한것은 혹시 다음날에 공을 세울까 함이었는데 지금 정갱이

      뼈가 부러져서 쓸데없는 사람이 되었으니 살면 무엇을 할것인가 나같은 젊은사람도 죽기

      를 아끼지 않는데 머리가 센 늙은이가죽으면 어떤가.』 하고 그를 비웃었다.

      남이와 함께 죽을때에 남이를 불러 말하하기를

    남이야, 네가 내게 무슨원망이 있기에 나를 무고 하느냐.』 하매

      남이가 말하길  『원통하기는 내나 너나 일반이야, 네가 수상으로 나의 원통함을 알면서

      한마디 말로 구원하지 않으니 너도 원통하게 죽는것이 옳다.』  하였다.

      그는 다시 남이를 돌아보며  『어린 것들과 서로 친하였으니 이런 화를 당하는 것이 마땅

      하다,』하고 탄식 하였다.

      처자가 다 죽고 가산이 관가에 몰수 되었다.

      무인의 목숨은 나라만이 가질수 있다는 평상시의 생각대로 80세 나이로 사형대에 오를때에도

      나라의 왕의 명령에 순복하여 옷을 벗고 죽어갈때 그 죽엄의 숭고함에 모두 탄복하였다 한다.

      일생동안을 나라의 안위를 위하여 뛰어다닌 그가 끝내는 죽엄에 이르렀을때 세조조카 구성군

      이준이말한대로 무인은 정사에 임하지 않는게 좋다는 말을 되새겼다 한다.

      그가 노년에 역적으로 몰리어 억울하게 죽었으나 그 후 순조18년(1818년)에 그의 선명함이

      알려지게 되여 신원되고  관작을 회복하였고 충신으로받들게되였다

      일생을 나라위해 산 용맹한 장군이였다.

 

      산소는 보령시 미산면 도흫리 산26번지(甲坐) 에 모셔져 있다.

      

 

                                                                                       16 代 宗孫   榮   國  옮김     

 

 

      보령시 향토사학관 자료

 

                                                                     -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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