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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바새계경

20. 정삼귀품(淨三歸品)

작성자안심정사-2|작성시간13.12.10|조회수308 목록 댓글 3
20. 정삼귀품(淨三歸品)  

 

20.1. 선생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기를, 와서 구걸하는 자가 있으면 삼귀의를 먼저 가르쳐서 받게 한 후에 베풀라고 하셨는데, 무슨 인연으로 삼귀의를 받으며 어떤 것을 삼귀의라고 하나이까.”

20.2. “선남자여, 삼귀의에는 모든 괴로움을 부수고, 번뇌를 끊어 없애고 위없는 적멸(寂滅)의 즐거움을 받는 인연이 있습니다. 그대가 묻는 삼귀의란, 선남자여, , , (佛法僧)을 말합니다. ()이란, 번뇌를 부수는 원인과 바른 해탈을 얻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이란 곧 이 번뇌를 부수는 원인과 진실한 해탈이며, ()이란 번뇌를 부수는 원인과 바른 해탈을 얻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그렇다면 이것은 일귀(一歸)이다고 말하나, 그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세상에 나오시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바른 법은 항상 있어서 분별함이 없지만, 여래가 나오시고서 곧 분별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따로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입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시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바른 법은 항상 있어도 받는 자가 없지만, 부처님의 제자들이 받기 때문에 응당 따로 승가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바른 길로 해탈하는 것을 법이라 하고, 스승이 없이 홀로 깨달은 이를 부처라 하며, 법대로 받는 자를 승가()라 하니, 삼귀가 없다면 어떻게 네 가지 무너지지 않는 믿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삼귀를 얻는 자에게는 구족함이 있거나 구족하지 않음이 있습니다. 구족함이라 하는 것은 이른바 불, , 승에 귀의함이고, 구족하지 않음이란 이른바 여래가 법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선남자여, 삼귀를 얻는 자는 구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계()와 같습니다. 선남자여, 부처와 연각(緣覺)과 성문(聲聞)이 각각 다르므로 삼보는 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다른가 하면, 발심할 때 다르고 장엄할 때 다르며 득도 할 때 달라서 성분(性分)이 각각 다르므로 다르다고 합니다.

무슨 인연으로 부처가 곧 법이라고 말합니까? 이 법을 알기 때문에 부처라고 하며, 분별하여 설함을 받으므로 승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부처도 승의 수(僧數)에 든다고 말한다면, 그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처가 승에 든다면 삼보와 삼귀의와 사불괴신(四不壞信)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남자여, 보살의 법이 다르고 부처의 법이 다릅니다. 보살에게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후신(後身)이고, 둘째는 수도(修道)입니다. 후신에 귀의하는 것을 법에 귀의한다고 하고, 수도에 귀의하는 것을 승에 귀의한다고 합니다.

유위법에 모든 죄과가 많음을 보고 혼자서 수행하여 감로미(甘露味)를 얻으므로 부처()라고 하고, 일체의 번뇌가 없는 무위법계(無爲法界)이므로 법()이라고 하며, 금계를 받아 지니고 십이부경을 독송하고 해설하므로 승()이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여래는 멸도하였는데, 부처에 귀의한다는 것은 이것이 어떠한 귀의인가?’ 묻는다면, 선남자여, 이와 같은 귀의는 과거 모든 부처님 무학의 법에 귀의함이라고 합니다. 내가 제위장자(提謂長者)에게 먼저 가르치기를, ‘그대는 마땅히 미래세의 승에 귀의하여야 합니다. 과거의 부처에 귀의함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복전(福田)의 과보에 많고 적음이 있으므로 차별하여 셋으로 합니다. 세상에 계시거나 열반한 뒤에라도 부처님께 공양하면 과보에 차별이 없으며 귀의를 받은 자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시면서 모든 제자를 위하여 모든 필요한 법을 세우셨으며, 부처님은 비록 과거에 계셨지만 범하는 자는 역시 죄보를 받습니다. 과거불에 귀의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마치 여래가 열반에 다다를 때, 모든 인간과 하늘이 열반을 위하여 많은 공양을 베풀면, 그 때 여래는 아직 열반에 들지 않고 세상에 계시면서도 멀리 미래세의 공양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과거불에 귀의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의 부모가 먼 데 있을 때, 때로는 성내거나 욕하여 죄를 얻고, 때로는 공경하고 찬탄하여 복을 얻음과 같이, 과거불에 귀의함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세상에 있거나 열반한 뒤에 공양을 베풀면, 베푼 자가 받는 복은 같아서 차별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20.3. “선남자여, 남자나 여자가 세 번 삼귀의를 말하는 자를 우바새라고 하고 우바이라고 합니다. 모든 부처님이 비록 법에 귀의하지만 법은 부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나오는 것이므로 마땅히 먼저 부처님께 귀의하여야 합니다. 몸과 입과 뜻을 맑게 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여야 합니다. 염불을 하고 나면 곧 두려움과 무서움과 괴로움과 번뇌를 여의므로 당연히 먼저 부처님께 귀의하여야 합니다. 지혜로운 이는 부처님께 먼저 귀의합니다. 왜냐하면, 여래의 지혜와 해탈이 가장 뛰어나고 해탈의 원인을 말씀하며 위없는 고요한 자리를 말씀하고 생사 고뇌의 큰 바다를 말씀하며 위의(威儀)가 정중하고 삼업이 적정함을 깊이 관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이는 생사의 법이 큰 괴로움 덩어리임을 깊이 살펴보아, 위없는 바른 도(無上正道)로 영원히 끊으며 생사의 법에 목마른 애욕의 굶주림을 위없는 감로미로 충족시키며 생사의 법의 무섭고 험난함을 위없는 바른 법(無上正法)으로 끊어 없앱니다. 생사는 잘못된 길이라 삿되고 바르지 못하여서 항상함이 없는 것을 항상한 것으로 보고, 나가 없는 것을 나가 있는 것으로 보며, 즐거움이 없는 것을 즐거움이 있는 것으로 보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깨끗한 것으로 보는 것을 위없는 바른 법으로 모두 끊어 없앰을 깊이 관찰합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당연히 법에 귀의합니다.

지혜로운 이는 마땅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외도의 무리들은 부끄러움도 없고 염치도 없으며 법답게 사는 것이 아니어서, 비록 도행(道行)을 한다하더라도 바른 도를 알지 못하고, 비록 해탈을 구하나 바른 요체를 얻지 못하며, 비록 세속의 작은 선법을 얻으나 아까워하고 인색하여 전하여 설하지 못하며, 선행성(善行性)이 아닌 것에 선행의 생각을 하는 것을 마땅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불교의 승려는 고요한 마음으로 연민하는 마음이 많으며 욕심이 적고 족함을 알아 법답게 살며 바른길을 닦아서 바른 해탈을 얻으며 얻고 나서는 다시 남을 위하여 설하므로 다음으로 승에 귀의해야 할 것입니다.”

20.4. “이와 같은 삼보께 예배하고 옴에 마중하고 감에 배웅하며 존중 찬탄하고 법답게 살며 믿어서 의심하지 않으면, 이것이 곧 삼보께 공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삼보께 귀의하고는 비록 계를 받지 않았더라도 온갖 악을 끊고 모든 선()을 닦으며 비록 재가자라 하더라도 법답게 살면 이 또한 우바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먼저 불, , 승보에 귀의하지 않으면, 이 사람은 계를 얻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그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먼저 말하기를, ‘잘 왔습니다, 비구여하였는데, 이는 필경 삼보께 귀의함을 얻지 못하였어도 그 계율을 모두 구족하였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구족계(具足戒)를 받지 않으면 계를 얻지 못하며 팔계재법(八戒齋法)도 마찬가지라고 한다면, 그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족하게 받지 않으면 계를 얻지 못한다고 한다면, 우바새가 되려고 할 적에 어떻게 계를 얻겠습니까? 실로 이 계는 얻으나, 다만 팔계재법만 구족하지 못합니다. 구족하게 받지 않으면 재()라고는 할 수 없어도 선()하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선남자여, 몸과 입과 뜻의 업을 정결하게 하고 우바새계를 받으면 이것을 오음(五陰)이라고 합니다. 오음이라는 것은, 사견(邪見)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견을 말하지 않으며, 정견(正見)을 믿고 받아들이며, 정견을 설하며 바른 법을 수행하는 것, 이를 오음이라고 합니다.”

20.5. “삼귀의를 받고나서도 치업(痴業)을 지어서 외도의 법, 자재천의 말을 받아들이면, 이 인연으로 삼귀의를 잃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참되고 정직하여 인색함과 탐욕이 없고 항상 참괴(慚 愧)심을 닦으며 욕심이 적고 만족함을 알면 이 사람은 오래지 않아서 적정신(寂靜身)을 얻습니다. 갖가지 업을 짓되 즐거움을 받기 위하여 착한 일을 한다면 장사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마음으로 중생을 가엾이 여기지 못하니 이러한 사람은 삼귀의를 얻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집과 몸과 목숨을 보호하기 위하여 모든 신들에게 제사하더라도, 이 사람이 귀의법을 잃었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이 온갖 무서움을 구원한다고 믿고 외도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한다면 이 사람은 삼귀의법을 잃는 것입니다. 일찍이 모든 천신들이 부처님의 공덕이 수승함을 보았다는 것을 듣고 나서 예배 공양한다면 법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자재천왕에게 예배하되 마땅히 세간의 모든 왕이나 장자나 귀인이나 연로한 어른이나 덕이 있는 이에게 예배하는 것과 같이 하면 이러한 사람도 역시 귀의의 법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

 

20.6. “비록 예배는 하되 설한 삿된 법은 삼가서 이를 수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늘에 공양할 때도 인자한 마음을 일으켜서 몸과 목숨과 재물과 국토와 백성을 두려움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할 것입니다.

설해진 사견(邪見)은 왜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지혜로운 이는 마땅히 외도가 말하는 바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재천이 온갖 모든 것을 지었다고 하지만, 이것이 자재천이 지은 것이라면, 왜 내가 이제 이 선업을 닦아야 합니까? 누군가는 또, 물에 빠지고 불에 들어가며 스스로 굶어서 목숨을 버리면 곧 고통을 여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곧 고통의 원인인데 어떻게 고통을 멀리 여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일체 중생이 선과 악의 업을 지어서 이 업연으로 스스로 과보를 받는 것이다하고, 일체 만물과 시간과 장소는 자재천이 지은 것이라고 하나, 이와 같은 삿된 말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 현재에 업을 짓고 또한 과거에 지은 바 업의 과보를 받을 것인가?’하고 말합니다.

지혜로운 이는 분명히 이 업의 과보를 알거늘, 어떻게 시간과 장소를 자재천이 지은 것이라고 말합니까? 시간과 장소의 인연으로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는다면, 천하에는 같은 시간과 장소가 많이 있는데 어떻게 또 한사람은 괴로움을 받고 한 사람은 즐거움을 받으며 한 사람은 남자이고 한 사람은 여자일 수 있겠습니까?

천신, 아수라에게도 동시생(同時生)과 동수생(同宿生)이 있는데, 천신이 이기고 아수라가 지기도 하며 아수라가 이기고 모든 천신이 지기도 하며 또 모든 왕도 동시동수로서 함께 정치를 하여도 한 사람은 나라를 잃고 한 사람은 국토를 보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외도들은 말하기를, ‘좋지 않은 시기, 좋지 않은 장소가 나타날 때에는 마땅히 중생에게 가르쳐서 선법을 닦게 하여 막아내야 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착한 일을 함으로써 해와 별을 어떻게 없앨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인연으로 지혜로운 이가 어떻게 외도의 삿되고 잘못된 말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업행(業行)을 따르니, 정견을 닦으면 안락함을 받고 사견을 닦는 자는 큰 고뇌를 받습니다. 선업을 닦기 때문에 자재함을 크게 얻고 자재함을 얻고 나면 중생이 친근해 합니다. 또 선업의 인연을 설하면 선업의 인연 때문에 안락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 해와 별 때문이 아닙니다.

선남자여, 아쟈타삿투왕(阿闍 世王)과 데바닷타(提婆達多)가 모두 악업을 지은 인연으로 지옥에 떨어진 것이지, 해와 별 때문에 이 과보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울두남불(鬱頭藍弗)은 사견 때문에 미래에 대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선남자여, 모든 선법은 하고자 함()이 근본입니다. 이 하고자 하는 인연으로 삼보리와 해탈의 과보를 얻고 출가법에 들어가서 큰 악업과 모든 존재의 업을 부수며 계를 수지하고 모든 부처님을 가까이 하고 일체를 버리어 구걸하는 자에게 주며 정성(定性)을 짓고 악한 과보를 부수며 대악죄를 멸하고 결정취(決定聚)를 얻으며 세 가지 장애(三障)를 여의고 잘 번뇌를 부수는 길을 닦습니다. 이 하고자하는 인연으로 삼귀의를 받고 삼귀의로 인하여 계를 받고나면 견도(見道)와 수도(修道)를 행하여 성문(聲聞)보다 뛰어나게 됩니다.

사자나 호랑이나 이리 등 사나운 짐승들을 두려워하여 부처님께 귀의하여도 해탈함을 얻거늘, 하물며 착한 마음을 내어 세속에서 나오기를 구하는 자가 해탈을 얻지 못하겠습니까. 아나타삔다까 장자는 집안에 명령하여 태중에 있는 아들도 모두 귀의를 받게 하였으나, 이 태중의 아들은 성취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법은 꼭 입으로 제가 말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성취는 못하지만 또한 이를 보호합니다.

선남자여, 외도들은 일체 세간이 모두 자재천이 지은 바라고 하고, 미래의 세상에 백겁이 지나면 환()이 있어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른바 환이라는 것은 곧 부처인데 자재천이 부처를 만든다면 자재천에 귀의하는 법도를 부처가 어떻게 부술 수 있겠습니까? 자재천이 부처는 만들지 못한다면 어떻게 자재천이 일체를 모두 만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외도들은 또 말하기를, ‘대범천왕(大梵天王)과 대자재천과 비뉴천왕(毘紐天王)이 모두 하나다라고 하기도 하고, 태어난 곳은 각각 다르다라고도 합니다. 자재한 하늘이란, 자재천이라 하고 상()이라고도 하며 주()라고도 하고 유()라고도 하며 율타(律陀)라고도 하고 시바(尸婆)라고도 합니다. 이 하나하나의 이름에는 각각 다른 일이 있어 해탈을 구하기도 하고 곧 해탈을 하기도 한다고 하지만, 그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재천이 중생을 낳고 모든 존재를 만들었다면 선과 악의 업과 업의 과보도 지었을 것이고 탐, , 치로 얽매인 중생도 지었을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중생이 해탈을 얻을 때 모두 몸 가운데로 들어가므로 해탈은 이것이 항상함이 없는 법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항상함이 없다면 어떻게 해탈이라고 하겠습니까? 바라문의 아들이 도리어 수명을 얻는 것과 같으므로 자재천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천신이 또한 하나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나(阿周那)사람은 비뉴대천(毘紐大天)으로 해탈을 삼기 때문에 또한 하나일 수 없습니다. 해탈을 항상함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곧 환()이니, 부처를 환이라고 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진아(眞我)를 바르게 보면 이것을 해탈이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미진(微塵)을 보는 이를 해탈이라 하고 또, ‘성의 차이(性異)와 아의 차이(我異)를 보면 이것이 해탈이라고 말한다면 그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도를 닦아서 사성제를 보면 이 사람은 성품을 보고 나를 보게 되며(見性見我), 삼귀의를 받는다면 이 사람은 참으로 사제를 보게 되니, 이 삼귀의는 모든 셀 수 없이 많은 착한 법에서부터 아누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의 근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20.7. “보살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재가보살이고, 둘째는 출가보살입니다. 출가보살은 청정한 삼귀의가 어렵지 않으나, 재가보살로서 청정함을 닦기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재가보살은 많은 악연에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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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원준석 | 작성시간 18.02.16 부처님 감사합니다.
  • 작성자원준석 | 작성시간 18.03.27 감사합니다.
  • 작성자giftjudy | 작성시간 19.12.02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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