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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겨레의 철학

儒/佛/道와 風流

작성자The USH|작성시간06.06.19|조회수121 목록 댓글 5

.불.도와 풍류.

 

일찍이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은 난랑비서문(이는 이름이 鸞이라 하는 화랑의 비문을 말함이다)에 다음과 같은 말을 새겨 넣었다: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神史
實內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竺乾太子之化也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이른다. 그 가르침의 근원은 신사(神史)에 상세히 실려있거니와, 실제로 유불도 삼교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들 서로가 하나로 모여서 이루어지는데, 이처럼 들어가서는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나라의 사구(현대의 대법원장)였던 공자의 뜻이고, 무위의 방식으로써 말없이 행위 하라는 가르침은 주나라의 주사(현대의 국립 도서관장)였던 노자의 근본이며, 여러 가지 악들을 짓지 않고, 여러 가지 좋은 선한 일들을 받들어 행위한다는 것은 축건태자(천축국의 왕자)였던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같다.

 

 

비록 현대의 일부 학자들에 의해서 사대주의자로 비난당하곤 하는 최치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세계적 학자였던 그는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동양의 정신인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적 가르침 이전에 그것들보다 앞서있으면서도, 그것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면서 그것들을 총체적으로 통합시키는 보다 더 큰 가르침이나 철학이 이 땅에 있었음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우리 역사 속에서 불교나 유교, 그리고 도교(혹은 기독교)가 유입되었던 것은, 우리의 일상적 상식과는 다른, 즉 우리 문화가 열악하여 외래 선진문화를 수입할 수 밖에 없었다는 식의 생각과는 다른 이유에서 기인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우리 문화 속에 이미 그런 외래적 문화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적 역량들이 있었으며, 오히려 그 외래적 요소들 각각의 것들보다도 더 심원하며 더 근본적인 원형적 요소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의 역사 속에서 유불도로 대표되는 외래적 사상들이 받아들여진 이유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식민지적 문화이식의 행태와는 달리, 각기 시대마다 특별하게 요구 되었던 문화요소들을, 우리의 적극적 필요와 이해관계에 따라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외부로부터 수용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우, 새로 유입된 외래 사상은 기존의 우리나라의 문화적 배경들을 부정하지 못하며, 오히려 그런 선재하는 문화적 배경을 전제로 해서, 그것이 요구되고 필요한 지점에 놓여서 나름의 기능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사적으로 볼 때,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는 일반적으로 거대한 불교적 흐름에 놓여있었던 시대들이었고, 조선시대는 유교적 흐름의 시대였었다, 그리고 현재는 기독교 계통의 시대라고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최치원의 기록에 충실할 때, 이런 우리의 문화사는 사실, 외래문화의 수입사이기 보다는 우리의 본래적 정신의 자기 전개의 역사라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최치원이 말했던 ‘풍류’가 무엇이길래, 그는 이런 말을 했던 것일까? 현재, 우리는 ‘풍류’라는 말을 쓸 때, 우리는 그것을 좋게 말하면, ‘美的인 삶의 형태’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나쁘게 말하면, ‘퇴폐/향락적인 삶의 형태’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그 ‘풍류’라는 것을 현재는 그 어떤 식으로든 보편적이고 성스러운 道나 宗敎 혹은 이 세계를 총체적으로 설명해내는 존재론이나 세계관의 차원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취미나 여흥으로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누군가 “나의 종교는 ‘풍류’이다”라고 말한다면,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를 매우 특별한 종류의 ‘奇人’이나 ‘廢人’으로 이해할 것이며, 그때 ‘풍류’는 그 사람만의 지극히 사적이며, 내밀적인 유흥의 한 형태로서 이해될 것이다. 즉, 현대의 풍류는 종교나 사상, 또는 문화운동이 가져야 할 ‘성스러움’, ‘진지함’, ‘보편적 세계이해’, 그리고 ‘보편적 적용가능성’ 등을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치원은 최소한 세계적으로 가장 심원한 종교와 문화운동의 지평에서 ‘풍류’를 이해하고 있으며 사용하고 있다. 이는 어떤 이유에서 가능한 것이었을까? 그런데 이보다 먼저 다루어져야 할 것은, 설사 그 이름이 ‘풍류’이건 또는 다른 무엇이건 간에, 어떻게 불교와 유교, 그리고 도교 혹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서로 조화로이 통일/통합될 수 있는가 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 이름, 혹은 명칭은 중요하지 않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자 원리인 것이다.

 

사실, 현재 우리나라를 뒤덮고 있는 수 많은 갈등 중에는 ‘종교적 갈등’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일종의 종교박물관 또는 종교전시장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조그만 나라에 세계적인 종교들이 거의 다 들어와 신봉되고 있으며, 거기에 더해서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 사회는 세계의 그 어느 나라보다도 

그 다양한 종교들이 매우 근본주의적으로 혹은 원리주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를 가건, 절을 가건, 혹은 다른 종교의 집회소를 가건, 아니, 그런 메이저 종교가 아닌 온갖 신흥종교의 집회소를 가건 간에, 그 분위기는 단순히 실용주의적이기 보다는, 비록 왜곡된 양상들이 많을지라도, 한결같이 진지하고 종교적이다.

 

사실 현대에, 종교의 종교성 내지는 근본성이 그나마 살아있는 나라는 티베트, 인도, 그리고 중동지역과 우리나라 정도인데, 그 중에서 오로지 우리나라만이 단일 종교가 아닌 모든 종교들이 번창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시사해주는 바가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다양한 종교들이 매우 진지하게 번창하고 있음과 동시에, 우리나라는 서로 다른 종교들 간의 갈등으로 소란스럽기도 하다. 유교와 불교, 그리고 기독교로 대표되는 현재의 메이저 종교들간의 갈등은 서로 평행선을 달리면서 화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최치원이 말하는 바이기도 하지만, 유교의 근본종지는 효와 충이다. 부모에게 효를 다하고, 나라에 충성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의 근본종지는 업 사상과 만물에 대한 자비사상이다. 선을 권장하고 악을 멀리하라는 것도 다 이 사상들에 기반하는 것들이다. 한편, 도교의 근본종지는 무위의 다스림(無僞之治)와 영생불사(물론 도가와 도교는 분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서로 결합되어있다)의 이념이다.

 

유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그를 낳은 부모에 대한 효를 다하는 것, 그리고 그런 부모와 유사한 왕과 스승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도리의 처음과 끝이었다. 그래서 유교의 근본적인 실천윤리인 오륜에도 효와 충이 중심적 위치에 놓여있다. 그런데 유학자들의 견해에서는 이런 오륜 사상은 어떤 논증의 결과이기 보다는 인간으로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전제였다. 그래서 인간이 왜 효를 다해야 하는가? 라는 식의 질문은 의미가 없는 난센스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실, 그 어떤 철학과 사상, 종교도 완전히 무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지는 않다. 모두다 모든 논증의 기초에 논증되지 않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전제들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만일 그 전제들을 부정하는 다른 이론이나 사상들이 다가올 경우, 거기에는 그 어떤 대화나 합의, 그리고 이해는 불가능하다. 이는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도 인정한 것이며, 이는 파괴적인 무한소급의 블랙홀에서 우리의 이성을 지켜주는 안전판이기도 하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현재 서로 반목하는 유교나 불교, 기독교 혹은 도교의 경우, 그들의 가장 기본적 전제들에 대해서는 서로가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불교라고 효의 근본을 부정하지 않으며, 기독교라고 선행을 부정하지 않으며, 유교라고 해서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그들은 서로 그렇게 반목함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근본들에 대해서는 서로가 일정 정도 공유하고 있다. 사실 그들의 반목의 근원은 그들의 근본 전제들 그 자체에 있기보다는 그것들 간의 상호 위계와 가치서열에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기독교의 전래는 남인계열의 유학자들에 의해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었다. 그들은 서인계열들이 독점한 유학의 이데올로기와 그로 인한 권력 독점에 대한 반발과 대안으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인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유학 속에 내제하는 옥황상제천명개념이 기독교의 하느님 사상과 공존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기독교에서의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 경우 이는 유학의 근본종지인 와 다를 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편, 불교의 경우, 우리의 근대조선 사회에서 그렇게 거부당하고 억압당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왕실에서조차 끊임없이 신봉되어진 이유는 불교가 우리나라에 수입된 이래. 그것이 한번도 국가주의를 노골적으로 거부한 적이 없었으며, 불교의 자비와 애민 사상은 유교의 인과 애민 사상과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서구화와 자본주의화되면서 우리사회는 범 유물론의 물결 속에 쓸려가고 있으며, 그 결과 인간의 근본적인 윤리와 질서들조차 무너지고 망각되어가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부모에 대한 효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기도 하며, 국가의 가치도 부정하며, 더 나아가 사회 구성원 전체에 대한 무차별적 증오를 갖기도 하며, 자연파괴는 끝을 모르고 진행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의 사람들은 에 대해서 부모가 자기들 좋을라고 아이 낳는 것인데, 왜 고마워해야 하는가?라고 부정하며, 국가와 사회에 대해서 국가는 폭력적이고 강제적인 억압장치일 뿐이며, 공동체라는 것은 그런 억압장치를 은폐하고, 인간의 근원적 자유를 박탈하는 이데올로기 장치이며, 타인들이란 나의 자유와 이익을 방해하는 무리들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적개심을 보이며, 하느님에 대해서는 과거 원시시대의 무지몽매한 인간들의 환상의 결과이며, 그 역시 허구적인 민족주의의 어리석은 산물이다 하면서 조소를 보낸다. 이들에게 종교철학 같은 것들은 비실재적인 관념의 결과들이며, 따라서 무가치한 전근대시대의 청산해야 할 이데올로기들일 뿐이다. 이들에게 실제적인 것은, 개인의 물질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으로서의 개인의 자유일 뿐이다. 현대사회를 양분하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유일한 차이는 이런 물질적 이익을 전적으로 개인의 차원으로 종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특정 계급의 차원에 종속시킬 것인가에서만 나누어질 뿐이며, 원리적으로 그 어떤 차이도 없는 극단적 유물론들일 뿐이다.

 

이런 현대인들의 세계관은 전통사회의 그것과는 아주 상이한 것인데, 전통사회의 경우, 인간의 삶의 의미는, 서로 상이한 무수한 종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인간의 정신적 완성에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어떻게 하는 것이 물질적이고 동물적인 단계에 빠져있는 인간들을 보다 높은 단계의 존재자들로 진화시킬 수 있는가가 동과 서를 막론한 전통세계의 근본 화두였으며, 이에 따라 모든 종류의 문화/철학/종교는 이런 이념을 추구해왔던 것이다.

 

이렇게 인간을 정신적 차원으로 진화시키는 것, 그것은 인류사회의 근본과제였으며, 그 과제를 실현하는 가르침이나 사상은 인간에게는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과 사상이었기에. 동양사회에서는 宗敎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유교에서는 인간 모두 각자 자신이 태어난 근본을 망각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인간완성의 참된 길로 본 것이며 그 결과 자연스럽게 부모에 대한 효와 나라에 대한 충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에 반해 불교는, 그 역시 근본적 앎을 추구한 결과, 부모라는 존재 역시 우리 자신의 근본이 될 수 없으며, 진정한 근본은 이고 이에 따라 자비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또한 도교나 기독교의 경우는, 우리 전체의 근본은 바로 창조주로서의 하느님 또는 옥황상제라고 보는 것이며, 이분으로부터 그 모든 것들이 나온 것이므로, 인간의 앎은 반드시 이 분에 대한 참된 이해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종교들이 보이는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효와 사회적 책임, 그리고 만민에 대한 사랑과 절대자에 대한 믿음 등을 서로 가족유사성적 관계로써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들 모두를 제각각 긍정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 간의 관계의 지형도가 서로 다르며, 가치서열에서 서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유교의 경우, 사회적 책임과 타인에 대한 사랑, 그리고 하늘에 대한 순종 등은 고귀한 가치들로서 인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실천하는 출발점은 바로 大學에 명시되어 있는바 修身齋家이다. 따라서 한 인간의 참된 완성의 길은 가 되는 것이며, 여기서부터 출발한 길은 에서 완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유학의 가르침이 근본에서 벗어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교는 우리역사 속에서 최종적으로 立身揚名이라는 세속적인 출세지상주의라는 비참한 결과를 양산하기에 이르면서 스스로 몰락의 길을 가게 되었다.

 

이런 유교에 대해서, 다른 여타의 종교들, 이를테면, 불교와 기독교는, 정확하게 유교가 가지고 있는 내재성의 한계 즉 세속주의적 한계를 정확히 지적해낸다. 즉 우리의 근본은, 물론 우리들 각자의 부모와 우리가 태어난 나라이다. 그렇지만, 보다 더 원리적으로 생각을 해보면, 부모나라 역시 최종적인 근본이 될 수 없는 것들이며, 그것들 모두 최종적 원리나 근본들에 의해 발생한 차후의 것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나 국가의 가치들이 소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다 더 심오한 지점으로 나아가야 하며, 여기서 눈에 보이고 역사적인 차원으로부터의 일종의 초월, 즉 형이상학적 단절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은 현대의 경우처럼 단순히 부정되고 거부되어야 할 것들이 아니라, 그 본래적인 가치들을 고스란히 보존하면서 동시에 더 놓고 넓은 차원으로 초월되어야 할 것들이라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止揚과정에의 요청인 것이다.

 

그렇게 내재적인 것으로부터의 초월을 이루어내려 할 때, 불교나 기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기존에 속한 지역/장소/영역들로부터의 강제적인 이탈을 요구하는데, 이것들이 바로 불교의 出家이며, 그렇게 출가한 자들이 머물러야 하는 곳은,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曠野이다. 바로 인간이 단순히 물질적이고 동물적인 존재자가 아닌 한에서 인간의 근본성은 결코 내재적인 차원을 근거로 해서는 밝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로지 이런 초월적 지평에서야 비로소 참된 보편적 사랑과 절대적 지평으로서의 신을 만날 수 있으며, 오로지 이 지점에서라야 인간은 그 정신적 완성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불교나 기독교, 혹은 도교의 초월주의는 유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하는데, 먼저, 그 초월지상주의는 바로 비현실주의이며 현실부정주의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각자의 마음 속에 이미 초월성이 내제하고 있으며, 이 마음은 인간이 구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 공동체와 인간의 역사 속에 그대로 온전히 발현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위적이고 반사회적인 초월을 수행함 없이도, 자신의 부모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와 현실 속에서 각자 자신의 마음을 다한다면(성실하게 산다면), 그는 이미 근원적 도를 이루어낸 것이라는 것이다. 유학자들은 간단히 어떻게 자기 부모를 버리고서, 하느님을 찾을 수 있으며, 제 나라를 버리고서 하늘나라를 찾을 수 있으며, 조상들의 歷史를 버리고서 어떻게 하느님의 役事를 이해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이런 전통 종교들 간의 반목은 현재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풍류 혹은 풍류도의 지평에서 볼 때, 각자의 한계 속에서 더욱 악화되어가고 있다. 유교적 현실주의는 자본주의와 식민지 역사의 굴레로 말미암아, 속물적 출세지상주의와 외모지상주의로 왜곡되고 있으며, 불교나 기독교의 초월주의 역시, 퇴폐적 향락주의와 공동체 부정의 개인주의나 집단이기주의와 국가부정주의로 왜곡되어 나타나고 있다.

 

우리의 전통과 사상을 구성해왔던,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의 현대적 화신으로서의 기독교(도교와 기독교는 그 외면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원리적으로, 절대자에 대한 숭배와 그로 인한 영생불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상동성을 공유하는 종교들이다)는 분명히 매우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며, 결코 부정될 수 없는 고귀하고 본질적인 가치들을 각자의 방식으로써 담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것들은 서로 이른바 문명의 충돌의 효과들을 내고 있음과 동시에 각자의 방식으로 왜곡되고 모순들이 악화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현대의 지식사와 문명사적 흐름 속에서는 점차적으로 반-종교적인 이데올로기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들은 공리주의, 과학주의 그리고 공산주의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전통 철학과 종교에서의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성격들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으며, 존재하는 모든 실재를 내재성의 틀 안으로 한정시켜서 이해하는 유물론들이다.

 

이 유물론자들에 의하면, 정신적이고 형이상학적 가치들은 그것들이 원리상 물리적으로 측정될 수 없는 것들이라는 이유에서,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한다 하더라도 오로지 인간의 주관적 관념의 영역 속에만 있는 한에서 실재적인 것들이 아니며, 동시에 사적인 것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실재적인 것들이 아니거나 사적인 것들인 이유로 그것들에 대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학문은 불가능하며, 그것들이 학문적 대상들이 아닌 이유로, 그것들에 대한 이성적 의사소통 역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그것들은 그저 구시대의 기만적인 이데올로기들일 뿐이거나 철저히 개인적 차원에서 향유되는 사적인 취미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현대의 지식사적 풍토에서는 실재는 물질이며, 이성은 그 물질에 대한 계산화된 인식능력이며, 인간이란, 물질을 그런 종류의 이성을 통해서 획득하고자 욕구하는 존재자일 뿐이며, 사회나 국가란, 그런 이성을 소유한 인간들 상호간의 물질적 이해관계들의 총체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 전통사회에서의 인간 이성의 근본이자 사회구성원리로서의 도덕이라는 것 역시 측정될 수도 검증될 수도 없는 이유로, 그것들은 보편적일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사회적 구성원들이 물질소유의 권리방식을 자의적/잠정적으로 합의한 으로 대체될 수 밖에 없으며, 이 경우 사회정의란 사회구성원들의 물질소유 관계에서 나름의 공정성이 지켜지는 한에서 발생하는 외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 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현대사회의 구성원들 모두는 잠재적으로 비도덕적일 수 밖에 없으며, 동시에 반국가주의자들이거나 아나키스트들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들에게 국가란 그저 각자의 물질적인 무한 욕구를 통제/조정하는 인위적 장치이거나, 극단적인 경우는 그런 물질소유욕구를 강제적으로 억압하는 폭력적 기구에 불과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최고가치로서의 인권의 기초로서의 자유란 결국, 개인의 물질소유 욕구를 무한히 추구할 수 있는 권리이거나, 혹은 개인의 필수적 물질 소유를 보장하는 기본적 권리를 의미할 뿐이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자유의 이념은 무한한 권력을 소유한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에 초점이 맞추어질 경우에는 제국주의, 독재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로 꽃을 피우게 되며, 개인이나 집단의 기본적 물질소유권리에 초점이 맞추어질 경우, 아나키즘이나 공산주의로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 모두의 경우, 국가의 존재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타자들의 욕구와 권리를 억압하는 폭력기구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래서 전자는 그 국가를 점령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하며, 후자의 경우는 그 국가의 의미를 부정함으로써 자신들의 생존권을 확보하려고 할 뿐인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현대에 수 많은 다양한 이론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정신적이고 초월적 가치들을 부정하고 있으며, 이 경우, 인간의 위상과 가치는 동물들이나 여타 생물들 또는 극단적으로 물질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으며, 이 경우, 존재론적으로는 그것들과 동종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인간은 그저 다른 생물들과의 야만적이고 잔인하고 폭력적인 약육강식생존경쟁의 최종적 승리자일 뿐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써바이벌 게임의 승자로서의 인간은, 비록 제아무리 지구의 최후의 승리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이 지구에서의 모든 이익들을 다른 존재자들에 비해서 배타적이고 독점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들과 동종적인 이유로, 인간의 정신적 초월은 불가능하며, 또한 보편적 진리이해의 특권적 권리를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종교와 철학, 그리고 근본적 예술현상은 인간에게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소수의 특별한 방식으로 가능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공적이고, 보편적일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과학주의, 공리주의 그리고 공산주의 등에서는 종교, 철학, 그리고 예술현상의 본래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거나 통제/억압하려는 것이며, 자본주의에서는 그것들마저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매우 특별한 종류의 수단이거나 또는 탐조(探鳥)와도 같은 매우 특별하고 사치스런 개인적 취미활동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한편, 인간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자연물과 동일시 하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현대 사회에서 인간과 자연의 대립적 관계 속에서 일어났던 자연파괴현상을 극복하려는 목적으로 생태학이 우후죽순 격으로 번창하게 된 것이다.

 

이런 현대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은 자연전체보다도 더 상위적이고 고귀한 존재자이다라고 말했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발언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아퀴나스의 이런 발언은 결코 자연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거나 또는 현대에 무차별적으로 자행되는 자연파괴를 옹호하는 것으로 이해돼서는 안 된다.

 

아퀴나스의 사유에 따르면, 인간 역시 다른 기타의 자연물과 같이 물질적 존재자이다. 그래서 물질적 지평에서 볼 때, 인간의 가치는 자연과 동일한 위상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물질적 요소를 가짐과 동시에, 이 자연계 내에서 유일하게 영적인 능력을 가지는 특별한 존재자인 것이다. 그가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영적인의 의미는 정신적인 혹은 이성적인이며, 이 경우, 이것들의 의미는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열림(개방성)의 관계에 인간이 놓여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이 그의 이성으로써 존재하는 것들 전체와 총체적이고 전면적인 열림의 관계에 놓여있는 한에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자연 전체를 그 자체로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존재 그 자체로서의 존재인 하느님을 사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자신이 자연적이고 즉물적으로 놓여있는 제한적인 물질적 이해관계의 수렁에서 초월해서 보다 상위의 영역으로 비약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인간만이 유일하게 참된 보편적 이해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만이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은 자연에 대한 자율적 통치권을 가짐과 동시에 진정한 자연의 근거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복종과 숭배의 의무를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이성을 통해서 자연을 이해하고 통치하면서 동시에 창조주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며, 그 분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자연성의 실현이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종교와 철학, 그리고 예술과 도덕이 기원하는 것이다.

 

종교와 철학, 그리고 예술과 도덕이 그 본래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영적인 존재자로서의 인간의 본질에 대한 보다 심원한 이해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귀결되며, 여기서 우리는 인간성의 회복과 참된 공동체와 국가의 부활의 차원에서 이런 것들은 필수적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이런 것들을 부정할 경우, 인간은 단순히 물질적 욕구의 수행자가 되며, 이 경우, 공동체와 국가, 그리고 역사의 의미마저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모든 것들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유물론적 인간관을 거부해야 하며, 정신적인 가치들을 회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동양의 전통가치들로 돌아와서, 비록 유/불/도교의 전통가치들이 역사적으로 서로 갈등/대립해왔으며, 현대에 이르러 각자의 방식으로 왜곡/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런 가치들의 본래성을 부정해서는 안 되며, 그 어떤 식으로든 그것들의 본래성을 회복해야 할 역사/시대/문명/문화사적 소명을 부여 받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에 대한 전면적 부정은 인간/사회/국가/자연 자체에 대한 무차별적 부정과 파괴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이미 그런 파국 속에 우리모두가 내던져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의 전통가치들을 회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전통 가치들 각자의 장점들을 통합하고, 단점들을 제거하는 식으로 극복되어 이루어지는 것이 최상의 방법으로 보인다. 즉 유교의 효와 충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세속적 내재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불교의 출가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초월적 비현실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도교나 기독교의 경우, 하느님이라는 절대지평에 대한 경배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사회부정과 독선의 한계를 극복하는 식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깨달음을 위해서 출가독신고행의 극단적이고 반사회적인 폐단을 극복하고, 효를 위해 출세지상주의에 빠지거나, 충을 위해 독재정권을 옹호하는 폐단을 극복하고, 하느님을 명분으로 자기 자신만의 구원을 폐단을 극복하는 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간단히, 내재성과 초월성을 동시적으로 갖추고 있는 인간의 본래성을 회복하는 길을 의미하는 것이다.

 

최치원에 따르면, 우리 민족의 근본 사상으로서의 풍류는 유교/불교/도교들보다 먼저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것들 모두를 포함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외형상 상이해 보이는 그것들을 서로 통합하고 융합한 성격을 가진다고 했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이해할 때,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의 가르침들은 모두 풍류(도)의 일부들이며, 각기 그 일부분들이 독립/분화/발달한 형태들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풍류(도)는 이것들보다 더 본래적이며, 원형적이며, 따라서 전체적이며 통일적이라는 것이다.

 

고려 때의 스님,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의하면, 우리민족의 국조이신 단군께서 조선을 창건하면서 그 이념으로서 弘益人間理化世界를 공표하셨다고 한다. 이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며 이 세상을 진리로 가득하게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후 이런 고조선의 철학 종교, 그리고 윤리와 법의 이념은 천부경, 삼일신고, 그리고 참전계경으로 정리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런 고조선과 단군의 이념들은 敬天愛人사상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하늘을 받들고 인간을 사랑한다는 이념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태초의 원형적 사유의 핵심인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이것이야말로 최치원이 말했던 풍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우리가 아는 한에서 동서고금의 그 어느 문명과 문화에서도 홍익인간, 이화세계로 대표되는 경천애인사상을 구체적으로 표방한 경우를 찾을 수가 없다. 서구의 역사에서도 유태-기독교의 경우는 반-지성주의에 기반한 절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과 복종을 그 근본 종지로 삼고 있는 반면에, 그리스-로마의 경우는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인간중심주의를 그 근본이념으로 삼고 있으며, 이후의 서양사는 이들 서로 모순적이며 대척되는 두 이념들간의 변증법적 투쟁의 과정으로 점철되어왔다. 그런 이유로 서양문명 속에서는 늘 신앙중심주의와 이성중심주의, 그리고 신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 초월중심주의와 내재성중심주의, 개인주의와 집단중심주의 등의 이원론적 구도 속에서 단 한번도 자유롭지 못했었다.

 

예를 들어, 유태-기독교적 관점에 따르면, 이 세상과 인간의 창조의 이유는 오로지 신의 영광을 빛내기 위해서이다. 그 결과, 인간들의 세속적 복지와 공동체, 국가의 의미는 최대한도로 축소될 수 밖에 없게 되며, 오로지 사적이며 초월적인 유일신에 대한 신앙만이 유일한 의미를 부여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유태기독교는 독단/독선적일 수 밖에 없었으며, 현실부정의 성격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 그리스적 이념은 정반대로 지나친 현세중심주의적 성격을 가진 탓에 세속주의적 한계 속에 빠질 수 밖에 없었으며, 이는 이성중심주의와 과학주의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서양의 역사는 언제나 인간과 신, 도시와 광야, 그리고 왕궁과 교회의 이원적이고 대립적 구도 속에서 단절적인 양상을 띠면서 진행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서양문명 속에 내제되어있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은 그 각각으로도 매우 불충분한 모습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서로가 그 어떤 공유점도 없는 까닭으로 언제나 융화하지 못하고 대립과 갈등의 구도 속에서 진행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양상은 동양의 가치들인 유/불/도의 가르침들간의 관계와는 매우 다른 것으로서, 동양의 가치들이 서로 공유하는 요소들간의 위상/위계차이에서 갈라지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궤도 위에서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홍익인간의 이념은 원리적으로도 불가능했으며, 이화세계 역시 가능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경천이면 오로지 경천이고, 애인이면 오로지 애인인 이유로 그것들이 서로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로마 철학의 최고봉인 스토아나 에피쿠로스 철학에서조차 인간 보편의 깨달음과 복리, 그리고 초월적-내재성의 동시적 긍정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고작해야 개인의 내면적 평화 혹은 소수의 특별한 친구들 간의 친교의 단계에 까지만 도달했을 뿐이다.

 

일찍이 고조선에는 국자랑이라는 청소년 수련/문화/군사공동체가 있어서 여기서 주로 청소년들의 집단적 교육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물론, 이런 교육은 청소년기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는 후에 고구려의 조의선인이나 신라의 화랑으로 이어지게 된다. 몇 년 전에 발견되어 번역 출간된 신라시대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에 의하면, 화랑도의 근원이 고래로부터 이어져온 仙徒였다고 한다. 이 仙徒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는 아직까지는 분명치 않으나, 현재 위서논쟁에 휘말려있는 한단고기에 의하면 바로 풍류를 교육했던 고조선의 국자랑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화랑의 교육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단체를 이루어서 명산대천을 유람하며 음악과 시를 짓고 같이 놀이함과 동시에 군사훈련까지 했었다. 화랑의 조직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졌는데, 먼저 左三部는 도의(道義), 문사(文事), 무사(武事)를 담당했고, 右三部는 현묘(玄妙), 악사(樂事), 예사(藝事)를 담당했고, 前三部는 유화(遊花), 제사(祭事), 공사(供事)를 담당했다는 것이다.

 

이런 화랑들의 교육방식과 내용은 매우 독특한 것으로서 이는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 더 나아가 군사교육까지 아우른 총체적 교육이었고,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풍류의 진면목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청소년들을 국가가 모집을 해서 단체생활을 하게 하면서, 전국의 명산대첩을 유람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삼교의 가르침들의 종지들을 골고루, 그리고 총체적으로 교육시켰던 것이다. 이는 주로 가정과 서당 중심으로 진행되어 가문중심적 출세지상주의로 빠져버린 유학의 오류를 극복하면서, 수행을 위해서 속세의 연을 끊고 홀로 산행을 해야만 하는 불가의 고립주의와 비현실주의를 극복하며, 절대자와 영생불사의 이기적이며 반사회적인 도교의 오류를 극복할 수 있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학문중심주의의 문약(文弱)의 오류마저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다시, 고조선과 그 이후의 삼국시대로 이어지면서 바로 이런 교육 과정과 내용을 통해서 홍익인간과 이화세계로 대표되는 경천애인의 이념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현재 이런 우리 민족 고유의 풍류사상을 가장 원형에 맞게 회복/유지하는 종교들로는 홍암 나철 선생이 창시한 대종교, 최재우 선생이 창시한 동학, 그리고 강증산 선생이 창시한 증산도, 박중빈 선생이 창시한 원불교 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종교의 특징들은 그들이 한결같이 우리 전통의 세 가르침들을 모두 적극적으로 긍정하면서 하나의 보다 근원적 지평에서 하나로 통합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한 나라와 민족의 참된 독립과, 우리민족의 광복은 바로 민족 고유의 정신세계의 완전한 확립과 복권을 통해서만 비로서 가능해질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우리 민족의 전통 사유 속에서 이 시대의 전지구적 문명사적 위기마저도 극복해낼 수 있는 단초들을 찾아낼 수 있다는 확신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관심을 기대한다.

 

 

추천자료(이는 가장 기초적이며 필수적 자료들이다)

1. 한단고기.

2. 화랑세기.

3. 규원사화.

4. 단기고사.

5. 신단실기.

6. 신단민사.

7. 조선상고사(신채호).

8. 조선사연구(정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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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The USH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6.06.18 스크랩은 자유롭게 하세요. 단, 다른 곳에 게시를 하실 때는 퍼온 글임을 꼭 밝히시구요^^ 과거에 다른 곳에서 보니, 펀 글임에도 자신이 쓴 것처럼 하는 분들이 있더군요.
  • 작성자월급쟁이 | 작성시간 06.06.18 풍류는 결국 인간학이다."종(倧)"과 "전(佺)"...사람으로써 머리(그리스도 부처 도)됨,그리고 사람으로서 온전(全)해짐..,모든 문명사의 종착점-오메가 포인트는 온전한 사람 하나 내 놓는 것이다.바람같은 사람~바람둥이 말이다.
  • 작성자hispuzzle | 작성시간 06.07.05 좋은 글입니다.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아쉽다면, 신라와 고려의 불교가 다른나라의 불교와는 다른 '불가풍류'임이 논증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의 유교도 '유가풍류'가 버티어 조선이 500년을 유지하였다고 봅니다만... 즉, 다른 어떤 나라도 불교나 유교를 국교로 하여 500년 나라를 유지한 바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불교나 유교에 대한 정서(민간 설화등)가 기실 그 태생국의 불교정서나 유교정서와 다르다는 것이 논증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또 하나 아쉬움은 '기독교'의 교리가 풍류와 너무나 유사합니다. 성령을 바람(風)이나 七星 혹은 말(馬)로 표현하고, 삼위일체와 삼신의 개념도 같은데^^
  • 작성자월계자 | 작성시간 06.07.06 고대 우리 민족의 나라에는 소도(蘇塗)라는 수도 장소가 있었고 그곳에 있던 경당이라는 교육기관에서는 미혼자제들을 대상으로 대개 독서(글읽기), 습사(활쏘기), 치마(말타기), 가악(노래와 춤), 권박(맨손 무예), 검술 등 여섯 가지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것을 합쳐서 풍월도니 풍류도니 하였는데, 후대에 와서는 다른 것들은 잊어버리고 오직 가악만이 남아 '풍류'라고 생각되었으니 풍류의 뜻이 크게 변질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 홍익인간의 이념을 남북통일이나 세계평화를 이루는데 이바지할 위대한 사상이요 철학이라고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홍익인간의 이념이 무엇을 말하는지, 현대에 그것은 어떻게
  • 작성자월계자 | 작성시간 06.07.06 이해되고 변용될 수 있는지를 규명하는 노력은 그다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앞으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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