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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국의 만리장성은 고려가 쌓았다

작성자치우천황(이종식)|작성시간15.10.04|조회수33 목록 댓글 2

 

 

 

2) 高麗史6卷-世家-靖宗
是月築長城於''西北路''松嶺 東以扼邊寇之衝.

◀고려가 長城을 축조(築造). 長城=萬里長城 (扼:누를액,衝:찌를 충)

▶ 西北路 松嶺 - (중국고금지명대사전)
“松嶺 - 在奉天省 西境, 遼河 西岸. 其脈起於陰山(脈: 줄기).東南岐出.(중략).”

松嶺(송령)은 음산의 줄기로써 동남으로 뻗은 가지 山脈(산맥)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섬서
성 서북 황하 연변에 있는 음산의 줄기가 요하 서안까지 뻗어있다는 것이다.


봉천성은 바로 관내도 지역이었기 때문에 봉천성의 서쪽 경계지역이 되는것이며, 요하는 바로 황하를 말하는 것이다.이 요하 즉 황하의 서안에 “음산”이 있기 때문에 이 음산의 일부분이라는 말이다.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장성을 축조했다는 말이며, 이곳의 북쪽은 중원으로 오는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중원에 왕조에서는 이곳의 수비에 왕조의 운명을 걸다시피 했다.

 이 기록에서도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遼河(요하)”는 “황하”를 말한다는 것을 알수 있다.


또한 고려가 만리장성을 축조 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3)高麗史3卷-世家-穆宗
癸未改西京爲鎬京.


♦半島(반도)내에서는 不可能(불가능)한 사건이다. 즉 서경을 “호경”으로 바꿨다는 말이다. “호경”이 반도의 평양이라면 반도의 평양은 섬서성 장안이 되며 이 주위는 중원의 중심지였다는 말이며, 관내도였다는 말도 되는 것이며, 또한 이 지역이 “중국”이었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호경은 섬서성 장안현 서남에 있으며, 石(서도)라고도 하며 周(주)의 왕도 였다. 이러한 호경은후대의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에 “고구려의 평양성은 왕검성이며, 장안성이며, 호경이요, 유경이며, 낙랑군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원사지리지(그 전의 역사서는 불문에 붙이더라도)를 보면 “동녕로 본고구려 평양성왈장안성,(중략)낙랑지”라 기록하고 있다. 원사는 원나라때 편찬된 것이 아니며, 분명히 원을 멸망시킨 “명”나라때 편찬되었을 것이다. 이러함에도 상기의 “호경”에 대한 고려사의 기록은 정인지 대학자가 자존심을 세우려고 대륙 장안의 지명을 차용한 것일까 ?

**유경은 은나라 도읍지이며 호경은 주나라 도읍지로 섬서성 서안(장안)으로 보면 무난합니다

즉 만리장성은 진시황제가 쌓았다고 알려졌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쌓았다 할지라도 서북지방일부만 쌓았을 것이고  후에 고려가 중원대륙에 위치하면서 천리를 더 쌓은 장성이 일명  만리장성이다.

 

 

 

 

 

 

 

만리장성 끝(산해관)은 바닷가로 연결, 물길을 제외하고 육지통로를 차단하여 유목민들의 칩입에 효과적으로 대치했다.

 

주원장은 1368년  명나라 왕위에 오랐다고 하는데, 북으로 ?겨간 北元과 조선군의 결합을 주원장은 죽기 전까지 근심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요동(遼東, 감숙성과 섬서성인근 황하유역)에 나가 있는 요왕에게 주원장은 조선20만대군으로 쳐들어 온다면 우리군대가 어떻게 막겠는가! 우려하며 조선의 공격을 염두에 두고 철저히 대비하라 당부한다. 그러면서 만약 조선이 요동을 공격하여 차지한다면 이는 단기전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며 걱정하는 대목이 『명실록』에 전한다.

 

 조선이 세워지면서 점차 강력한 군사대국으로써 성장하기 시작했다.정도전이 가장 역점을 들인 부분이 병서였다.  정도전을 주축으로 진법 훈련과 수십년이 넘는 왜구의 침략으로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훈련이 매우 잘되어 있었다.  조선 초기 세종실록을 보면 약 30만의 군사를 모을 수 있었다한다.명(明)의 입장에서도 30만이란 숫자는 매우 위협적인 숫자였다

 

11세기초 고려의 북쪽 변계(邊界)에 쌓은 성.

천리장성의 축조는 일시에 축조된 성이 아니라 1014년(현종 5)에 동서북 방면 요새지에 부분적으로 성책을 쌓았던 것을 1033년(덕종 2) 8월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가 왕명을 받들어 변계에 관방(關防)을 처음으로 설치하는 연결작업으로써 완결된 것이다.

위치와 범위는 옛 국내성(國內城) 경계의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부터 시작해서, 동쪽으로는 지금의 의주 지역인 위원(威遠)·흥화(興化)·정주(靜州)·영해(寧海)·영덕(寧德)·영삭(寧朔)·정융(定戎)·영원(寧遠) 및 그 부근의 평로(平虜)·맹주(孟州;지금의 孟山), 그리고 삭주(朔州)·운주(雲州;지금의 雲山)·안수(安水;지금의 价川)·청새(淸塞;지금의 熙川) 등의 13성(《동국여지승람》과 《고려사절요》는 14성이라 함)을 거쳐 함경도의 영흥(永興) 지역인 요덕(耀德)·정변(靜邊)·화주(和州) 등의 3성에 연결되어 동쪽으로 바다에 이어진다.

그러나 이미 1014년에 서북방면에는 용주(龍州)·철주(鐵州;지금의 鐵山)·안의진(安義鎭;지금의 龜城)·청새진·위원진·인주(麟州)·영덕진 등의 성과 동북방면에서는 의주(宜州;지금의 德源)·영평진(永平鎭;지금의 永興?)·요덕진·상음현(霜陰縣;지금의 安邊)·현덕진(縣德鎭;지금의 永興)·용진진(龍津鎭;지금의 文川) 등의 성을 보축 또는 신축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이 성의 총길이는 1,000리에 걸치는 석성(石城)이며, 높이와 두께는 각각 25척이라 하였다. 본래의 명칭이 어떠했는지 기록상 분명치 않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속칭 ‘만리장성’이라 했고, 현재는 흔히 ‘고려장성(高麗長城)’, 또는 ‘천리장성’으로 불린다.

오늘또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현중국의 만리장성은 고려때 중원대륙이 고려영토였을때 쌓은 장성,즉 만리장성이었다. 천리장성은 말도 안된다.   바로 신증동국여지승람만리장성이라는 말이 나온다.

참 목말라하는 역사의 진실에 큰 보탬이 되었다.

 

 

萬里長城.. 진나라때 처음 시작해서 명대에 완성되었다는 장성...
돈황 서쪽의 옥문관에서 시작해서 산해관에서 끝이난다는 장성...

이게 왜 조선의 역사에 등장하는 것일까?

최두환님의 대동여지에서 낙타전쟁에서 이해하기 쉬운 것만 약간 뽑았습니다.


<< 세종장헌대왕실록 지리지 평안도에서 '옛장성을 세속에서는 만리장성이라고 했다'고 전해오며..

신증동국여지승람 의주목에서
'장성은 의주의 서쪽 바닷가에 있는 옛 국내성의 경계로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 흥화 정주 녕해 녕덕 녕삭 운주 안수 청새 평로 녕원 정융 맹주 삭주 등 14성을 걸치고 요덕 정변 화주 등 3성에 이르러 동쪽으로 바다에 가까이 붙어있다. 총 길이 1000여리로 돌로 쌓았는데 높이와 너비가 25자씩이며 속칭 만리장성이라고 한다' 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요즘의 감숙성 민현 서쪽에서부터 이어져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 하란산 음산에 이르며 거기서 동쪽으로 돌아 열하에 이르러 료수를 건넌다. 또 남쪽으로 동가강 압록강을 건너서 곧장 조선의 황해도에 이른다. 이것이 진나라 때의 장성이다.'

고려서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린주(麟州)는 옛 령제현이고 장성이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린주는 섬서성 북쪽에 만리장성이 있는 신목현 북쪽에 있다' 고 했다>>

조선시대문헌에서 주로 만리장성이라고 나오지만, 현중국에선 지금도 장성이라고 한다. 중국식 표현은 장성인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는 이 만리장성이라는 용어를 싹 빼리고 천리장성이라고 했지만 조선의 역사서에는 분명 만리장성이라고 되어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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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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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치우천황(이종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4.13 아시아연방 완성!!!!!!!!!!!!!~~~~~~~~~~~
  • 작성자치우천황(이종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4.13 안시성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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