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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관계

[스크랩] 백제..일본한국인

작성자치우천황(이종식)|작성시간16.08.09|조회수167 목록 댓글 0

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왜왕가의 정체는?(펌)믿거나말거나[1]조회 1,917 | 추천 10 | 2013.03.07 (목) 14:52

죠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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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왜 왕가 정체는? 670년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기 전 왜는 백제와 어떤 관계인가?

 

본 글은 장문이라 아래와 같이 3부로 나뉘어 연재됩니다.
(1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한 왜왕가의 정체는?
(2부) 칠지도와 응신을 통해본 왜왕가의 비밀은?
(3부) 백제의 분국인 왜의 위치는 어디인가?


강력한 해양대제국 백제는 당나라 소정방의 13만 대군과 신라의 기습으로 의자왕이 붙잡히고 660년 한순간에 나라가 망한다. 그러나 왕족인 복신과 도침 흑치상지 등이 주도한 부흥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200여성을 차지함으로서 백제성의 거의 대부분을 회복하자 당나라는 40만 대군을 출병시킨다. 복신은 왜왕에게 의자왕의 비보를 전하고, 부여풍왕자의 귀국을 청하면서 원병을 요청한다.

왜국에 가있던 왕자 부여풍이 돌아와 왕위에 올라 백제는 다시 부활하는 듯 했다. 그러나 백제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까지 죽이려다 오히려 복신이 부여풍에게 처형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결국 왜병은 백강 어귀에서 당나라에게 4번 싸워 다 패하고 만다. 배 400척이 불타고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덮어 해수가 붉어졌다고 <삼국사기>는 적고있다. 전투에 패한 부여풍 왕은 고구려로 도망을 간다. 이 때가 663년으로 <일본서기>는 이 해를 백제 멸망의 해로 적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왕자가 왜국에 있다가 돌아와 백제왕이 되고, 복신이 왜국에 원병을 청하자 조건 없이 군대가 왔고,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백강에서 전투를 벌인다. <구당서>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의 왕자가 왜군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대에 투항했다는 내용이 있다. 백제 왕자가 뭐길래 왜군을 거느리고 지휘하는가?

그리고는 <일본서기>에 이상한 기록을 남겼다. “백제 주유성이 마침내 당에 항복하였다. 이 때에 국인이 서로 말하길 “주유가 항복하였다. 일을 어떻게 할 수 없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또 갈 수가 있겠는가? (이하생략)”(百濟州柔城, 始降於唐, 是時, 國人相謂之曰, 州柔降矣, 事无奈何, 百濟之名, 絶于今日, 丘墓之所, 豈能復往...)

그리고 668년 고구려까지 멸망하고 고구려의 부흥운동까지 실패하자, 670년 12월 왜국(倭國)은 일본(日本)으로 국호를 고친다. 그들 말이 “해돋이와 가까운 곳이어서 그와 같이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고 <삼국사기>에 적혀있다.

백제와 왜국과의 관계가 도대체 어떤 사이이기에, 백제의 요청에 의해 아무 조건 없이 원병을 보내고, 백제의 왕자가 왜군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대에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고, 백제가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이라는 이런 기록을 <일본서기>에 남긴단 말인가? 지금부터 백제와 왜국과의 관계를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인 주류성(周留城). 일본서기에는 州柔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부흥운동과 왜국의 지원

백제 멸망 시인 660년의 왜왕은 제명(齊明)여왕이었다. 제명여왕은 백제에서 온 사신으로부터 의자왕이 잡혀갔다는 비보를 접하자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즉각 군대파병을 결정하고 이를 위해 군선을 건조하게 한다. 우선 수천 명의 왜병을 보내 복신의 군대에 합류시킨다.

백제부흥군의 군세가 얼마나 강했던지 신라군은 연패하여 많은 장수들이 처벌을 당한다. 급기야는 무열왕 김춘추마저 전사한다. <삼국사기>에는 661년 무열왕의 죽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6월 대관사의 우물물이 변하여 피가 되고, 금마군에서는 땅에서 피가 흘러 넓이가 5보쯤 되었다. 왕이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무열왕 김춘추가 죽고, 한달 뒤 왜의 제명여왕도 68세의 나이로 죽는다. 제명왕은 백제 복국을 유언으로 남기고 이를 위해 왜에 와있던 부여풍 왕자를 귀국케 한다. 662년 1월 왜국은 복신에게 화살 10만본, 군복용 면포 1천필, 군복용 견사 1백근, 솜 1천근, 가죽 1천장, 종자용 벼 3천석을 보내 부흥운동을 돕는다. 부여풍은 662년 5월 군선 170척과 군사 17,000명을 이끌고 귀국한다.

부여풍 왕은 복신을 반역혐의로 참형하고 그의 목을 소금물에 절이는 해형(醢刑)에 처한다. 부흥군의 내부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이 때 당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던 왕자 부여융이 당나라로부터 백제왕을 제수 받고는 나타난다. 부여융은 당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기면서 제후국이라도 백제라는 국호와 사직을 보존하려고 했으나 나중에 당나라에게 철저히 이용당했음이 들어난다.

흑치상지는 복신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가 부여융의 설득을 받자 당군에 투항해 버린다. 이로서 백제부흥군은 급격히 힘이 약해진다. 한편 왜국에서는 군선의 건조가 완료되자 왜군 27,000명이 400척의 군선에 나누어 타고 백강으로 향한다. 당나라 군선 170척과 4차례의 수전을 치뤘으나 참패를 당하고 400척이 전멸하고 만다.

<일본서기>에는 백강이 백촌강(白村江)으로 나오며, <중국장수전전>에 보면 백강이 양자강이남 호남성 기양으로 나온다. 지금은 상강(湘江)으로 부르고 있으며, 기양과 백수 사이로 동정호로 흘러드는 큰 강으로 호남성의 대표적인 강이며 가장 큰 강이다. 이곳은 당시 왜가 위치하고 있던 광동성과 가까운 곳이고, 또한 호남성은 아마 백제의 서도(西都)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어 이 기록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기록으로 보인다. 당시 백강은 산동성 백마하와 지금의 상강 두 군데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동도(東都)인 산동성의 백강이란 이름을 서도(西都)인 호남성으로 가지고 간 것이 아닐까 한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 중국장수전전에는 백제와 왜의 연합군과 전투를 벌인 백강이 호남성 기양으로 나온다. 이곳은 왜의 근거지인 광동성과도 가깝고, 흑치상지의 고향인 백제서부하고도 가까워, 백제의 서도(西都)로 추정되는 곳이다.
665년 당 고종은 유인원장군을 보내 웅진성에서 신라의 문무왕과 백제의 부여융을 모이게 하여 백마의 피로서 서약을 맺게 한다. 이로써 백제는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지고 당과 신라의 식민통치에 환멸을 느낀 많은 백제인들이 중국과 왜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된다.

왜왕가는 백제와 어떤 관계인가?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든다. 아니 왜 왜국은 온 국력을 기울여 아무 조건 없이 백제를 도왔을까? 당나라가 왜로 직접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백제가 멸망한다고 당장 왜국에 위기가 오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런 대가도 없는 그리고 국익에 전혀 보탬도 되지 않는 백제의 전쟁에 왜국은 왜 대군을 보내 참여하게 되는 것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다른 이유가 없다. 단 한 가지 이유라면 왜왕가는 백제왕가의 혈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본왕가의 혈통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2001년 일본의 아키히토(明仁)왕이 “옛 칸무(桓武: 781~806)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라고 공식 발언한 것이다.

이 발언은 만세일계(萬世一係)라고 믿고 있는 일본왕가의 혈통에 대해 일왕 자신의 입으로 고대에 백제왕족의 피가 왜왕가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확인시켜준 것이었다. 즉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의 직계후손 중 화을계는 일본조정에서 기록을 담당하는 중신이었고, 화을계의 딸이 고야신립으로 칸무왕의 생모라는 것이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 2001년 기자회견에서 일왕가의 혈통을 밝힌 아끼히도 일왕. 오른쪽은 일왕의 가족으로 백제의 후예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일왕의 발언대로 칸무왕의 생모가 백제 무녕왕의 자손이라는 것하고, 백제부흥운동을 도운 제명/천지왕하고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그 정도의 혈연관계 때문에 제명/천지왕이 군수물자도 저렇게 많이 보내고 대병을 보내 무조건 백제를 구원하려 했을까? 독자들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필자는 아끼히도 일왕이 거짓말을 한 것으로 본다. 분명 일왕이 한 말 이외에도 백제왕실의 피가 일본 왕가에 있다. 그것을 규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백제부흥운동을 도운 제명여왕과 그녀의 아들 천지(天智)왕인 것이다. 지금부터 제명여왕과 천지왕의 혈통을 찾아 가보기로 한다.

우리에게 의자왕의 누이로 알려져 있는 제명여왕은 2번이나 왜왕위에 오른 인물로 이름은 보황녀(寶皇女)라고 <일본서기>에 기록이 되어있다. 남편인 서명(舒明)왕의 뒤를 이어 여왕에 올라 황극(皇極 642~645)왕이 되었다가, 시동생인 효덕(孝德)왕에게 양위했다가, 효덕의 사후 다시 37대 제명(齊明 655~661)왕에 오른다. 백제를 구원할 전쟁 준비를 하던 중 661년 68세의 나이로 죽자 아들인 천지(天智)왕이 그 뒤를 잇는다.

<일본서기>에서 제명여왕을 보황녀(寶皇女)라 한 것은 황제의 딸로 이름이 보(寶)란 말이다. 백제황가는 대대로 외자 이름을 쓴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제명여왕의 이름은 부여보(夫餘寶)이다. 여하튼 그녀는 남동생인 백제 의자왕이 당나라에 잡혀갔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고 복신의 지원요청에 의해 무조건 군대파병을 결정한다.

이 때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 왕자는 백제에서 파견한 일궁부(日宮府)의 대사로 있으면서 655년 1월 고모를 다시 왕위에 올려놓은 후 측근에서 보좌하기 위해 일궁부대사의 자리를 아우인 부여용에게 맡기고는 실질적인 야마토왜(大和倭)의 행정부를 이끌던 인물이었다. 백제 의자왕이 잡혀가자 부여풍은 왕위에 오르기 위해 왜병을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제명여왕의 남편인 서명왕은 민달왕의 손자이고, 민달왕은 계체왕의 손자이다. 일왕실의 직계계보를 정리해 보면 즉 26대 계체(繼體)왕 --> 29대 흠명(欽明)왕 --> 30대 민달(敏達)왕 --> (彦人大兄王子) --> 34대 서명(舒明)왕 --> 38대 천지(天智)왕으로 혈통이 이어지고 있다. 즉 실질적으로 왜군을 백제에 파견한 천지왕은 계체왕의 5세손이며, 민달왕의 증손자이며, 서명왕의 아들로 백제왕족이었던 것이다.

일본 고대왕실의 족보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의 황족항목에 따르면, “대원진인(大原眞人)은 민달왕의 손자이며 백제왕족이다.(大原眞人, 出自 諡敏達孫 百濟王也).”라는 기록이 있다. 대원진인이 백제왕족이면 민달왕도 백제왕족이다. 따라서 민달왕의 조부되는 계체왕과 손자되는 서명왕도 백제왕족인 것이다. 천지왕은 서명왕의 아들이므로 그도 당연히 백제왕족이다.

신찬성씨록에는 26대 계체왕 때 왜왕실의 성이 바뀐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에도 계체왕은 어느 왕의 몇째 아들이라는 기록도 없이, 그저 막연하게 남대적(南大迹=계체)왕은 응신왕의 5세손이며 언주인왕(彦主人王)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찬성씨록의 기록대로 왜왕실의 성이 계체왕 때 바뀐 것이다.

신찬성씨록으로 본 백제왕족인 왜왕들

1) 26대 계체왕 (繼體 507~531)
왜왕가를 백제왕족으로 새로 연 인물이다. 일본의 국보 2호인 인물화상경의 남제왕(男弟王)의 주인공이다. <일본서기>에 82세로 죽었다고 되어있어 무녕대왕의 동생인지 여부는 분명치 않으나, 일본학자들도 남제왕이 계체왕이라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형제국관계의 동생나라의 왕인 것임은 틀림없다 하겠다.

2) 29대 흠명왕 (欽明 539-572)


백제 26대 성왕은 직접 백제와 왜국을 넘나들었으며, 554년 이후에는 왕자인 위덕왕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고 완전히 백제를 떠나 왜국으로 건너가 왜왕인 킨메이왕(欽明, 흠명왕)으로 군림했다는 주장도 있다. (홍윤기교수 ‘일본 고대사 문제점의 새로운 규명’ [일본학] 24집, 동국대 일본학연구소 발행 논문집, 2005.12.)

3) 30대 민달왕 (敏達 572-585)
즉위하자마자 백제의 대정(大井)에 궁을 지었다. 홍윤기교수에 따르면, 일본의 우에다 박사는 2007년 5월 14일 자택에서 815년 일본왕실에서 편찬한 <신찬성씨록>을 직접 꺼내서 보여주며 “일본 제30대 민달왕의 생부는 백제 제26대 성왕이며, 민달왕은 백제 제27대 위덕왕의 친동생이다. 백제 제24대 동성왕과 제25대 무령왕은 두 분 모두 일본에서 모국 백제로 귀국하여 백제왕이 되었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고 증언했다 한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 33대 추고왕의 백제관련 기록인 부상략기4) 33대 추고여왕 (推古 592-628)
흠명왕의 딸로 오빠인 민달왕의 왕후가 되고 나중에 추고여왕으로 등극한다. 스이코 여왕은 찬란한 백제의 불교문화인 일본 '아스카 문화'를 일으킨다. 13세기에 편찬된 <부상략기>에 따르면, “여왕 원년 1월, 한창 건축 중이던 아스카데라 찰주를 세우는 법요 때 만조백관이 모두 백제 옷을 입었고 구경하던 사람들이 기뻐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5) 34대 서명왕 (舒明 629∼641)
민달왕의 손자로 의자왕의 누이인 부여보(나중에 황극왕과 제명왕)를 왕후로 맞아들인다. 11년 7월 “금년에 대궁(百濟宮) 및 대사(百濟大寺)를 만들겠다.”고 말하였고, 백제천(百濟川) 곁을 궁처로 하였다.
13년 10월 백제궁에서 승하하고, 궁 북쪽에 빈궁을 설치하였다. 이를 백제의 대빈(大殯)이라 한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의 저명한 사학자인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교수는 "조메이천황은 '구다라천황(百濟天皇)'이라고 불리었을 것이다." 라고 1970년 '신찬성씨록연구'를 발표했다.





위에서 보다시피 왜왕실의 혈통이 계체왕 때부터 백제왕족으로 확실히 바뀐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계체왕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기록을 남겼을까? 지금부터 왜왕가의 혈통을 바꾼 계체왕에 대해서 인물화상경을 통해 알아보기로 하자. (계체왕 이전의 왜왕의 혈통에 대해서는 나중에 응신대왕을 설명하면서 하기로 한다.)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이란 무엇인가?

일본 와가야마현 하시모토시에 있는 스다하찌만(隅田八幡)신사에 보관되다가, 1951년 일본정부로부터 국보 2호로 지정되어 현재 동경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인물화상경’이라는 유물이 있다. 이 거울에는 9인의 인물상과 48자의 명문이 뚜렷이 새겨져 있는데, 이 명문은 한일 고대사의 사실(史實)을 밝히는 중요한 금석문 자료의 하나이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 일본의 국보 2호인 '인물화상경'이 보관되어 있던 스다하찌만 신사
명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으며, 이 명문에 대한 일본 학계의 통설인 후꾸야마(福山)교수의 판독은 다음과 같다. “癸未年 八月 日十, 大王年, 男弟王, 在意紫沙加宮時, 斯痲念長壽
遺開中費直 穢人今州利 二人等, 取白上同二百旱, 作此竟”

“대왕년 계해년 팔월 십일에 사마(斯痲)는 의자사가궁에 있는 남제왕(男弟王)의 장수를 위해, 개중비직 예인 금주리와 다른 한 사람을 시켜 양질의 백동 이백간으로 이 경을 만들었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 백제 무녕대왕이 남제왕에게 장수를 기원하며 하사한 인물화상경. 한일고대사의 비밀이 담겨져 있었다.
일본 학계에서도 남제왕은 26대 계체왕이 확실시된다고 했다. 후꾸야마교수는 고사에 나오는 계체왕의 휘(이름)인 남대적(南大迹)는 놀랍게도 남제(男弟)의 훈인 ‘오오도’로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 계체왕은 남대적(南大迹 오오도)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타 사서에는 ‘오오도’와 발음이 비슷한 ‘오호도’의 여러 한자표기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이는 기타 사서의 기록에서 남제(오오도)를 고의로 지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후꾸야마교수는 계미년을 A.D 503년으로 단정했다. 그러나 거울을 남제왕(오오도)에게 하사한 대왕인 사마가 누구인지를 밝혀내지는 못했었다. 그러던 중 원광대학교 정치학과 소진철교수가 거울의 사마(斯痲)는 1971년 공주에서 발견된 백제 무녕왕릉의 지석에 있는 사마(斯痲)와 같은 이름이라는 것을 밝혀냈고, 이 거울은 무녕대왕이 남동생 격인 계체왕에게 하사한 일종의 신임장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무녕대왕의 즉위 다음해인 계미년(A.D 503년)에 무녕왕은 아우격인 남제왕(계체왕)에게 거울을 하사하면서 장수를 기원한 것이다. 무녕왕은 자신의 연호를 쓰지 않고 간지기년(干支紀年)을 사용했다는 것이 무녕왕릉의 지석과 인물화상경에 동시에 나타났다. 당시 거울(鏡)이나 칼(刀)을 하사함은 오늘날의 임명장이나 신임장과 같은 의미로 봐야 한다.

거울이 만들어진 503년으로부터 4년 후인 507년 남제왕의 신상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왜의 25대 무열왕이 후사없이 타계하자, 백제계 호족들에 의해 계체왕이 옹립되고, 수백향황녀를 왕후로 맞아들인다. 재야사학자 문정창씨는 이 수백향왕후의 출자(出自)를 <일본서기>에 자세히 적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그녀를 무녕왕의 딸로 보아 계체왕이 무녕왕의 사위이고, 흠명왕이 외손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하튼 계체왕으로부터 시작된 일본왕실의 혈통은 만세일계(萬世一係)의 전통을 세워가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현 일왕실의 혈통은 결국 백제 왕실의 혈통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2001년 아끼히도 현 일왕은 “옛 칸무(桓武: 781~806)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라고 공식 발언할 수 있단 말인가! 분명 아끼히도 일왕은 일왕가의 핵심을 말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사학계의 가장 큰 금기사항은 일본의 역사를 언급하는 것으로 어떠한 경우라도 그것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왜냐하면 현 한국의 사학계는 일제 때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한 조선사편수회의 맥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아직도 이 나리 식민사학계는 일제치하이기 때문이다.

일왕실의 혈통을 밝히는 일은 백제의 역사를 밝히는 일로 지금까지 잘못된 역사왜곡을 밝히는 일이기도 하다.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없애버린 백제 왕실의 비밀은 언제쯤 제대로 밝혀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본의 건국은 백제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일본은 아직도 백제왕가의 비밀이 밝혀지기를 극도로 꺼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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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백현주기자사랑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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