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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메시아

작성자구유|작성시간21.06.03|조회수124 목록 댓글 1

 

 

다윗과 메시아

토빗 11,5-17; 마르 12,35-37

2021.6.4.; 연중 제9주간 금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 당시에 상당히 미묘했던 상황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사이에 일어났던 갈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하느님이시고 참인간으로 오셨지만, 당시 유다인들은

물론 율법 학자들도 예수님의 신성을 몰라보고 대놓고 그분을 무시했더랬습니다.

숱하게 신적 능력을 드러내신 기적들을 보고 들었으면서도 그러했습니다.

이미 군중은 그분의 신성을 알아차리고 있었지만 배운 것이 많을수록,

종교적인 믿음이 굳을수록 예수님의 신성은 물론 인성조차도

몰라보았을 뿐만 아니라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오늘날 주일 저녁기도 성무일도에서 바치는

시 110편을 성전에 모여 당신 말씀을 듣던 군중에게 고백하다시피 말씀하심으로써

신적인 당신 신원을 드러내셨고, 군중은 이를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그 시편이 이렇습니다. 하느님이 내 주께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기까지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느님 시온으로부터 권능의 홀을 뻗치시며 “네 원수들 가운데서 왕권을 행사하라.

거룩한 빛 속에 네가 나던 날 주권이 너에게 있었으니 샛별이 돋기 전에 이슬처럼

내 너를 낳았노라” 하시리라. 하느님이 이미 맹서하셨으니 다시는 뉘우치지 않으시리라.

“너는 멜기세덱의 품위를 따라 영원한 사제이니라.”

 

예수님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하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합니다.

아시아의 불교나 유학에 젖은 종교인들은 물론, 한국에서도 불자들이나

유림들도 그러하며 민족종교인들이나 많은 지식인들과 젊은이들 역시 그러하고,

심지어 이미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서도 대놓고 냉담하는 이들이

다 그런 부류입니다.

그런데 부처나 공자 같은 성현들의 가르침에 비해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날 수 있는

가르침은 부활 신앙이요, 이를 증거할 수 있는 길은 일상에서 부활을 살아가는 것이며

종말을 앞당겨 실현하는 것입니다. 불교나 유학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이고 현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어서, 부활이나 종말에 대해서는 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부활과 종말에 대한 건전한 이해와 올바른 확신을 지니고

자신들의 삶으로 보여줄 때라야 비로소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사상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그러하며, 실존적으로도 마찬가지고 결정적으로는

사회적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특히 사회적인 차원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부활과 종말의 가르침과 신앙은 가톨릭 사회교리에 집대성되어 있습니다.

그 길은 종교 간 존중과 협력으로 민족 사회와 아시아 대륙의 공동선 증진에

나서는 것, 사랑의 문명 실현에 앞장서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오늘 독서에서 안나가 아들 토비야를 만나듯

진리를 다시 보게 될 것이며 무엇보다도 토비트가 멀었던 눈을 뜨고

하느님을 찬미하듯 메시아 신앙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안나는 헤어졌던 아들을 만난 것이고, 토비트는 멀었던 눈을 뜨게 되어

아들을 보게 된 차이가 있지만, 이 과정에서 은밀하면서도 친밀하게

이루어진 라파엘 천사의 도움은 결정적이었습니다.

 

선교 노력과 복음화 과업은 아주 단순히,

예수님의 신성을 우리들의 인성으로 드러내는 일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과 일로써,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워주고 삶의 수준을 향상시켜 주는 것입니다.

진리가 발산하는 매력을 보여주고, 정의와 평화가 가져다주는

기쁨을 나누어주는 것, 이것이 예수 성심이요 복음 선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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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요셉-막내165 | 작성시간 21.06.04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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