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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에 서서

작성자구유|작성시간21.06.09|조회수101 목록 댓글 1

 

 

갈림길에 서서

2코린 3,15-4,6; 마태 5,20-26 / 2021.6.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이기우 신부

 

모세는 하느님을 뵈었지만 백성 앞에서는 너울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직접 뵈오면 죽는다는 속설(俗說)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믿으면서도 하느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에서 만난 이방인 신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그대로 드러내서 보여주고자 합니다.

너울 대신 거울이 되어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유다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을 율법 지식 속에 꽁꽁

가두어놓고 백성까지도 하느님 없는 어둠 속에 살게 방치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복음대로 사는 신자들에게 ‘바보!’라고 놀리거나 ‘멍청이!’라고

비웃었습니다. 이런 종교적 위선 속에는 하느님께서 계실 수가 없었기에

예수님께서는 그 위선을 능가하라고 제자들에게 요구하셨습니다.

있는 그대로 하느님 앞에 나서라는 깨우침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나서야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살인하지 마라.”는 계명을 비롯해서 열 가지 율법 조문을 담고 있는 십계명 전체가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는 너울이 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의 복음에서 나오는 영광의

빛을 통하면 그 계명은 자신의 참 모습을 비추어주는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열 가지 계명을 일단 두 계명으로 줄이셨습니다.

단, 육신의 힘을 다하면서 육신의 목숨까지 바칠 각오로

마음을 다하는 정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렇게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해야 살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이렇게 진심으로 사랑하려면 보이는 이웃에게

그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야 정작 그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실상 두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였습니다.

죽어다 깨어나도 구약 시대에는 그리고 사람의 수준으로는 이 진리를 스스로의

힘으로 깨우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진리요 길이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계시해 주신 이 진리를 기준으로 보면 세상에는 두 가지 유형으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으며, 우리가 가야 할 길도 두 갈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너울로 가려진 하느님의 광채를 먼 발치로 보면서 하느님의 계명을 형식적으로만

지키고 실제로는 자신들의 뜻과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부류가 먼저 눈에 뜨입니다.

먹을 것과 서식지를 확보하려고 힘을 쓰는 무리들이 기록해 놓은 인류 역사의

주인공들입니다. 이들은 사실상 우상숭배자들이거나 무신론자들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고 진리를 짓밟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하느님의 광채를 마음으로 거울처럼 비추어 자신도 하느님 안에서

살고자 하면서 자기 주변 세상의 이웃들에게 그 빛을 나누어주며 살아가는 부류도

숨어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도 중요한 줄 알지만 자기 근본을 잊지 않으려고

하느님을 찾는 이 소수의 사람들이 생명의 책에 기록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면서 진리를 실현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갈림길에 서서 망설이다가 이 두 번째 길에 들어선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생애의 마지막 가르침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당부하시고 부활하러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마음을 다해 서로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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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요셉-막내165 | 작성시간 21.06.10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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