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가 생겨난 또 하나의 기원
창세 22,1-19; 마태 9,1-8 / 2021.7.1.;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이기우 신부
이스라엘 백성이 속죄양을 태워 바치는
번제의 기원에 대해서는 일전에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에서는 하느님께 바쳐지는 제사의 또 다른 기원을 들려 주었습니다.
당시 우상숭배에 물든 이민족들은 전쟁 포로나 사회적 약자의
아기들을 불태워서 제사를 바치는 인신 공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인신 공양 제사라는 몹쓸 제사 풍속을 없애시고자
아브라함과 이사악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백 살에 얻는 귀하디 귀한 아들 이사악을
당신에게 제물로 바치라는 시험을 해 본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소중하기도 하셨겠으나,
정작 더 중요했던 것은 사람들에게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의 형식을 올바르게 가르쳐주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명령에 순명하는 마음으로
아들 이사악을 묶어 칼로 찌르려던 순간에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시켜 말리시고는 근처에 있던 양 한 마리를 잡아서 바치도록 명하셨습니다.
즉 제사의 기원이 모세 전승으로는 우상숭배를 근절시키려던 동기도 있지만, 아브라함
전승으로는 인신 공양을 근절시키려던 동기도 있었음을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천 년 이상 내려오던 번제의
제사 풍속을 예수님께서는 더욱 근본적으로 혁신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존재 자체가 제사적인 실존을 사신 분이셨으므로,
생애 전부를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제사적 실존의 주요한 동기 중의 하나는 용서하는 삶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께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끼리도 서로 서로 죄를 짓고 삽니다.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죄로 인한 상처와 원한과 복수심 등 악한 마음이 꼬일 대로 꼬인 결과로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각종 갈등과 질병과 정신 질환 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엉켜 있는 매듭을 풀어주시고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들으셨듯이 죄를 지은
결과로 걸리는 병으로 알려져 온 중풍 병자를 말씀 한 마디로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입니다. 용서하는 삶은,
용서를 청하는 기도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제사적 실존입니다.
하느님과 소통하는 삶이 영혼에 생기를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