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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간 목요일 - 묻지 않는 사제들, 보고 들을 수 있어 행복한 제자들 / 이기우 신부

작성자구유|작성시간22.07.20|조회수142 목록 댓글 1

 

묻지 않는 사제들, 보고 들을 수 있어 행복한 제자들

예레 2,1-13; 마태 13,10-17 /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2022.7.21.; 이기우 신부

 

  예레미야 예언자는 모태에서 빚어지기 전에 하느님께서 아셨다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신 분이시고, 민족들의 예언자를 넘어 구원자로 세워주신 분입니다.

공생활 동안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뿌리신 그분은 길바닥이나 돌밭, 가시덤불에는

뿌리지 않으셨고, 좋은 땅을 골라서 뿌리셨습니다. 그래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거두셨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사제들이 “주님이 어디 계신가?”하고 묻지 않았듯이, 예수님 당시의

사두가이파 사제들도 주님의 뜻이 궁금하지도 않은 듯이 성전 권력에만 집착하고 있었기에

그들에게는 말씀의 씨앗을 뿌리시지 않았습니다. 그저 성전 정화만 시도하셨을 뿐이고

아예 군중 속에서 새로운 말씀의 성전을 짓고자 하셨습니다. 군중 속에 숨어서 엿듣다가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오던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이치에 맞지 않는 시비를 걸어올 때마다 조목조목 반박해서 물리치셨을 뿐이었고,

제자들에게 그들의 위선을 조심하라고 기회가 될 때마다 당부하셨습니다. 

 

  말씀 선포의 현장에서 만난 군중 가운데에는 말씀을 듣자마자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수두룩했습니다. 요행히 머리로 알아듣는 경우에도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어쩌다가 깨달음을 얻는 경우에조차 세속적인 걱정거리가 더 커서 그 깨달음이

뿌리를 내릴 수 없었던 사람들도 제법 되었습니다. 이들 부류는 하느님의 자리가 아예

없었던 까닭에 그러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먼저 그리고 무상으로 자비를

베푸셨고, 이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 표현하는 것이 기본 관계질서인데,

이것이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도록 허락되는 조건이었습니다. 

 

  여기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고 하시던 화법은

예수님께서 발설하신 풍자요 해학이었습니다. 그분은 될 수 있으면 알아듣게 하시려고

듣는 이들의 체험을 고려하여 자유자재로 비유 소재를 바꾸어 말씀하신 터였기 때문입니다.

아리랑 노래나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에서도 나타나는 해학이지요. 

 

  하지만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예수님을 알아본 제자들은 그분이 파견하시는 대로

진정으로 복음을 갈망하던 이들에게로 가서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열매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후 처음으로 반포한 문서 「복음의 기쁨」에서 사제로 살아오면서

느끼고 깨달았던 바를 담아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반포하였습니다. 특히 매일 혹은

매주일 강론으로 신자들에게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사제들에게 강론의 중요성에 대해서

대단히 강조하셨습니다. 강조점은 여러 가지였지만, 핵심은 신자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징표를 식별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예수님을 통해서도 말씀하셨지만 아직도 시대의 징표를 통해서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징표를 식별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배경으로 하고 예수님의

삶을 기준으로 삼아서 해석해야 교회의 강론입니다. 

 

  시대의 징표에 대해서는 신자들도 물론 알 수 있고 볼 수 있으며 들을 수 있습니다.

단지 길바닥이나 돌밭 또는 가시덤불처럼 여러 가지 장애들이 있어서 이미 신자들

각자가 식별하고 있는 시대의 징표에 대해서, 사제들이 강론으로 식별한 시대의 징표를

비교해서 올바른 해석으로 이끌어주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들이

각자 식별한 시대의 징표는 정치적 입장이나 경제적 이해관계 또는 인생의 연륜이나

종교적 영성의 수준에 따라서 너무나 다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시대의 징표를 식별한 바를 감별하는 기준도 필요해집니다. 첫 번째는 십자가의

기준입니다. 식별 메시지가 당사자에게 이익과 편리함을 주는가 아니면 손해와 불편함을

주는가를 살펴야 진정성이 일차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각오로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부활의 기준입니다. 부활은 현세에로 인간의

운명을 가두지 않고 내세에로 열어젖힐 뿐 아니라 지금 이 현세에서도 세속적 가치가

아니라 천상적 가치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신앙의 핵심 신비입니다. 세 번째는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 기준입니다. 부활의 신비는 시간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공간적 차원에서

도 보편적으로 복음 진리를 열어 젖힙니다. 지식을 배우거나 권세나 재물을 가져서 힘을

과시할 수 있는 강자들에게만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포함한 모든 약자들에게도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이 세 가지 감별 기준도 통과하여 예수님처럼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고

해석해 줄 수 있었던 덕분에 하늘 나라의 신비를 볼 수 있었고 들을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도 미사 때마다 “신앙의 신비” 환호를 외치고 있습니다만, 이 환호가 하늘 나라의

신비와 같아지려면,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라는 하늘의 공리를

전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늘 나라의 신비를 볼 수도 들을 수도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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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귀임 마리아 | 작성시간 22.07.20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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