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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_일상이야기

2022.6.3. 청년 김대건의 길을 걷다. 은이성지에서 미리내 성지까지.

작성자들꽃향~~|작성시간22.06.05|조회수208 목록 댓글 1

김대건 신부님의 마지막 미사가 봉헌된 숨겨진 동네 ‘은이 성지’

 

은이는 '숨겨진 동네', '숨어 있는 동네'

라는 뜻이며 천주교 박해 시기에 숨어 살던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형성된 교우촌

소년 시절 김대건이 신앙을 익히고 사제

성소의 꿈을 키웠던 곳으로 당시 숨어 살던

교우들은 은이에서 사기를 구어 생계를

유지하던 요지가 산재하여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님의 마지막 미사가

봉헌된 성지입니다.

 

극심한 박해의 시대 오직 사랑하는 신자들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행하신 짧은 사목의 길 그 길을 걸어보았습니다.

가슴 벅찬 순간순간 신앙의 선조들이 가셨던 

그 길 위에서 한없이 작고 부끄러운 

신앙인이지만 부단히 닦고 담금질해봅니다.

 은이 성지 김가항 성당(천주당). 오른쪽 상단은 철거되기 전 상해 김가항 성당 모습.

 

김가항 성당은 김대건 신부님께서 서품 받은 역사적 장소

중국 상해 철거 이후 2017년 은이 성지 내 복원, 완공
은이 성지는 김대건 신부 성소의 요람이자 첫 사목지
용인시, 김가항 성당을 향토유적지로 지정.

은이성지 천주당 성전 내부

김대건 신부님 기념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상과 야외 제대

은이 성지 순례를 마치고 김대건 신부님의 발길을 따라 미리내 성지로.

꽃이 핀 길옆에 성모상

 

신덕고개를 내려오니 꽤 유명한 사찰 '와우정사' 가 있네요.

오랜 가뭄에도 벼들이 잘 자라고 있어 다행입니다.

터널공사로 인하여 파 헤쳐진 길 다이너마이트도 터지는 위험한 곳으로 이곳을 통과하는 동안 

안내자의 안전한 보호 아래 위험지역 통과 꽤 높은 돌 언덕을 올라가야 합니다.

위험지역을 벗어나 조금 더 걷고 있는데 다이너마이트 터지는 소리가 꽝 하고 들려와 깜짝 놀랐습니다.

망덕 고개에서 컵라면과 맛있는 쌈장으로 쌈을 싸 꿀맛 같은 점심.

비빔국수에도 쌈을 싸 먹고 라면도 쌈에 싸 먹는 쌈 마니아.

옆지기는 그런 나를 보고 별난 식성이라고...

망덕 고개를 내려와 마을길을 걷다 보니 예쁘게 핀 꽃길.

은이 성지에서부터 8.5km 걸어왔고 1.8km만 더 걸으면 미리내성지.

이제 미리내성지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애덕 고개 뒤로 조금만 내려가면 미리내 성지예요.

꽤 가파른 길이라서 조심조심.

미리내 성지 도착.

미리내 성지 성당.

미리내성지 내부.

피에타(Pieta)-십자가에서 내린 그리스도의 시신을 무릎에 안고 슬퍼하시는 성모 마리아상.

성 김대건 안드레 아상 

 

어머니와의 마지막 미사

“어머니, 이제 가야겠습니다.”

“벌써! 곧 주님 부활 대축일인데 며칠 더 머물다 부활 침례를 하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신부님.”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선발돼 헤어진 지 10년 만에 신부가 되어 돌아온 아들에게 어머니는 집에 며칠 더 머물다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함께 하고 떠나라고 간곡히 붙잡는다.

어머니는 신부인 아들이 언젠가 순교할 것이라 직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10년 만에 만난 아들을 쉬이 보낼 수 없었다. 의젓하게 장성한 아들을 한 번 더 쳐다보며 눈에 새기고, 손 한 번 더 잡고 체온을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이게 마지막이다 싶어 따뜻한 밥 한 그릇 더 먹여 보내고 싶고, 버선 하나, 노자도 한 닢 더 챙겨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는 눈물로 아들을 잡았다.

어릴 적부터 효심 깊던 아들 김대건 신부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혈육의 정을 모질게 끊으려 했지만 차마 홀로 계신 어머니의 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 1836년 기해년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가 순교한 후 넋을 놓고 살고 계시다는 어머니의 소식을 그는 익히 듣고 있었다. 1845년 부제 때 홀로 한양에 들어와 현석 문을 비롯한 교우들에게 어머니 소식을 듣고 피눈물을 토했던 그가 아닌가. 그래서 김 신부는 은이 상뜸이 곧 은이 윗마을 골배마실 집에서 어머니와 며칠 더 머문 후 은이에서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한 후 다음 날 페레올 주교가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 김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매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를 입국시킬 해로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기념 성당 내부

김대건 신부는 순교 22일 전인 1846년 8월 26일 옥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편지를 쓰고, 어머니 고 우르술라를 맡겼다. “제 어머니 우르술라를 주교님께 부탁드립니다. 10년이 지나 며칠 동안 아들을 볼 수 있었으나 다시 곧 아들과 헤어져야 했습니다. 부디 슬퍼하실 어머니를 위로해 주십시오.”

김대건 신부는 이 편지에 앞서 1846년 6월 8일 옥중에서 스승 신부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며 끝에 벗인 최양업 부제에게 어머니를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토마스, 잘 있게. 천당에서 다시 만나세. 나의 어머니 우르술라를 특별히 돌보아 주도록 부탁하네.”

이 글을 남기면서 김대건 신부는 은이 교우촌에서 어머니와 함께 드렸던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은이 상뜸이 골배마실 집에서 안아주시던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아들의 효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어머니 고우르술라는 김대건 신부 순교 소식을 듣고는 교우들에게 “아들 신부가 군문효수하여 치명했다”라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예수님도 신부님도 어머니를 부탁하고 그 길을 떠나십니다.

"벗들이여 천국에서 만나자"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의 길이 잘 조성되어 있어 천천히 머무르며 기도하시기에 참 좋은 성지입니다.

묵상- 이태석 신부님 작사, 작곡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
세상엔 죄인들과 닫힌 감옥이 있어야만 하고

인간은 고통 속에서 번민해야 하느냐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 말씀 하셨지

사랑, 사랑, 사랑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 평화 위해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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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햇살타고, 마리아 | 작성시간 22.06.06 고맙습니다.
    덕분에
    나중에 컴으로 다시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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