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기타 강론 묵상

[스크랩] 1월 21일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말씀의 힘을 믿고 다시 시작하는 삶♣>

작성자stellakang|작성시간24.01.21|조회수171 목록 댓글 4

연중 3주일/마르 1,14-20

 

복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르 1,18)
 

 

 

내 인생의 그물을 버리고 ♣


오늘날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무감각’인 것 같다. 세상적인 것들에 맛들이고 길들여져 마냥 영원히 살 것처럼 느낌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일상화 되어버린 범죄, 심각한 인간 존엄성의 박탈, 부정부패, 사고 등에 대해서도 놀라지 않는다. 제1독서에서 요나는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3,4)고 선고한다. 바오로 사도는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7,29-31)라고 권고한다. 우리는 결정적인 구원의 ‘때가 차서’(마르 1,15)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음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이제 ‘예수 추종의 길’에 대해 성찰해보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의식하면서, 자신을 비우고,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가며 “사람 낚는 어부”(1,17)의 길을 걷도록 부름 받았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1,17) 하시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20절)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때는 ‘곧바로’ 지금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현재’ 이 시간을 통하여 은총을 주시며 '지금' 나를 도구삼아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려면 먼저 자기를 버리고 비워야 한다. 시몬과 안드레아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그물을 버렸다’는 것은 단순히 생계도구를 버렸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근거와 습관과 경험, 자기애, 인간적인 지식 등을 버리고 삶의 중심을 철저히 예수님께로 돌렸다는 뜻이다. 회개란 우리의 체험 속에 흔히 변증법적인 모습으로 부각되는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차리고 그분과 나를 동일화시키며, 삶을 믿음 안에서 자기화하는 것을 말한다.

따르기 위한 회개의 모습은 지금까지의 가치관을 버리고 그 빈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채우는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말씀은 ‘고기 낚는 어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도록 부르셨음을 뜻한다. 이 말씀은 인간적인 성취들을 부정하고 제거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이 세상이 하느님의 구원 경륜이 드러나야 하는 현장임을 엄숙히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인간관계나 다른 나라와 맺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관계를 그리스도의 마음과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과 용서라는 통치 이념이 지배하도록 투신하는 자세를 말한다.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것은 사라져 없어질 껍데기에 눈멀지 않고 사람이나 사건 속에 숨어있는 내면을 바라볼 때 가능해지는 삶이다.

예수님을 따름은 편협하고 폐쇄적인 사고와 행동을 거부하는 것이다. 요나서의 저자는 귀양살이 이후 시대에, 국가를 재건하겠다는 집념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이 선민의식과 배타주의에 빠져 있음을 개탄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다고 해서 하느님의 자유를 제한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요나 예언서를 통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야 하는’ 참된 회개의 모습과 더불어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되지 않는 하느님의 구원 경륜의 보편성을 볼 수 있다. 제자들의 길은 이렇게 구원의 진리와 하느님 사랑에 그 어떤 제한도 두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따름의 길은 자기 본성을 거스르는 지속적인 투쟁의 길이기도 하다. 동물에게 귀소본능이 있듯이, 우리들도 자주 옛날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으로 돌아가려는 강한 움직임이 있다. 사람들은 그렇게 본능과 본성에 끌려 살아간다. 그런데 제자의 길은 근본적으로 본능과 본성을 거스르는 길이다. 그래서 따름은 본성을 거스르는 자기와의 투쟁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버릴 내 인생의 그물은 무엇인가? 나는 왜 그다지도 하느님이 아닌 그물에 애착하는 것일까? 요나는 주님의 파견을 피하려고 도망치다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이나 있다가 나왔다(1-2장). 이 사회에 불의와 불신이 팽배해 가지만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요나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피해 가며 살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름의 길은 겸손의 길이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라는 말씀처럼, 겸손은 제자에게 덕이 아니라 제자의 본질이다. 따름의 길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길인데, 배의 주인처럼 처신해서는 안 된다. 주인공은 늘 스승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에는 늘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나는 튀고 싶고 인정받고 싶으면서도 남이 튀는 것은 봐주지 못하는 고약한 마음은 제자답지 못하다. 어부는 고기를 열심히 낚기만 하면 된다. 또한 따름의 길은 십자가를 향한 길인 동시에 나를 그리스도로 채워 나가는 기쁨과 행복의 길이다. “따르라”는 부름은 수난의 선포와 밀접히 얽혀 있다. 예수님의 수난은 수난의 모든 가치와 명예까지도 박탈당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버림받는 일”이다. 곧, 예수님의 수난은 철저한 불명예의 수난이었다. 십자가는 쉽사리 인정되듯 일상의 괴로움, 번민, 어려움 등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아니 더욱 본질적으로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이요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인 것이다. 따라나섬은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고 이 결합은 십자가의 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오늘도 끊임없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는 우리는 ‘바로 지금이 구원의 때’임을 분명히 의식하면서, 애착을 둔 '인생의 그물'을 과감히 버리고, 그분과의 친교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채우도록 하자. 지나가 버릴 세상 것에 현혹되지 않고, 모든 사람과 사건 안에서 그분을 주인공으로 드러내는 겸손과 수난의 길을 걸어가자.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평화의 사도들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하늘 바래기 | 작성시간 24.01.21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평화의샘 | 작성시간 24.01.21 오늘도 고맙습니다 🙏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4.01.21 아멘 신부님 stellakang 님 고맙습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4.01.21 아멘. 감사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