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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강론 묵상

[스크랩] 2월 8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울타리 없는 믿음의 나라♣>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성자stellakang|작성시간24.02.08|조회수93 목록 댓글 3

2월 8일 연중 제5주간 목요일 / 마르 7,24-30

 

복음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24-30
그때에 24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29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마르 7,29)

 

울타리 없는 믿음의 나라♣

 

폐쇄적인 본토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들어 이교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뿐더러 이교도인 전도를 비판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개방적인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이교도인 전도를 활발히 전개했는데, 그것을 정당화할 근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드물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교도인을 고쳐 주신 기적들을 들어 이교도인 전도를 옹호했다.

시리아 페니키아는 티로와 시돈을 포함한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 유대인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이교도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로 이스라엘 땅에서 당신 백성을 상대로 활약하셨다. 외국으로 가신 때나 외국인을 상대하신 때가 있기는 하지만 매우 드물었다. 마르코 복음사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티로 지방에서 결코 낯선 인물이 아니었다(3,8).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한 부인이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7,25-26) 그것을 증명해 준다. 이 대목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예수님과 시리아 페니키아 부인의 대화 내용에 있다(7,27-29).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예수님께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청하였다(7,25-26).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어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7,27)하고 말씀하셨다. 이 비유의 핵심은 여인의 간청을 거절하는데 있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는 구원의 혜택이 우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부인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7,28). 그 부인은 마치 예수님의 말씀에 토를 달지 않고 재치 있게 응답함으로써 그분께 대한 자신의 신뢰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부인의 확고한 믿음을 보고서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네 딸에게서 나갔다.”(7,29) 하고 말씀하신다. 결국 그녀가 예수님의 인격과 능력을 전적으로 믿음으로써 그 부인의 딸이 더러운 영으로부터 해방되었다(7,30). 이처럼 예수님을 통해 얻게 되는 구원은 유대인 또는 이교도인이라는 외적인 관계보다는 철저한 믿음의 관계가 우선임을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적인 잣대와 울타리를 허무시고, 오직 믿음만으로 이교도까지도 치유해주셨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내가 만든 기준, 나의 경험과 감정에 따라 형성된 틀을 들이대며 내가 원하는 관계만 맺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겠다. 영적인 성숙도는 나의 물리적, 심리적, 정서적, 영성적 울타리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가에 달려 있다. 살아가면서 건전한 ‘경계선 형성’이 분명 필요하지만, 창조의 낙원, 복음의 터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고 울타리 없이 모두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축제의 자리여야 할 것이다.

오늘 나에게 시리아 페니키아 부인이 예수님에 대해 지녔던 한결같은 믿음이 있는가? 또 진실하고 겸손하게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개방성과 의탁의 자세가 있는가? 그녀처럼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서 예수님 말씀만 듣고 딸의 치유를 믿는 흔들림 없는 신앙과 수용의 자세가 있는가? 참된 믿음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모습을 감추신다 해도 결코 흔들림이 없이 내맡기고 의탁하는 것이리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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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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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4.02.08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4.02.08 아멘 신부님 stellakang 님 고맙습니다.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4.02.08 아멘 신부님 stellakang 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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