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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강론 묵상

[스크랩] 3월 1일 사순 2주 금요일/ 마태 21,33-43.45-46 <소유와 질투의 부메랑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성자stellakang|작성시간24.03.01|조회수125 목록 댓글 4

사순 2주 금요일/ 마태 21,33-43.45-46

 

제1독서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저 녀석을 죽여 버리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7,3-4.12-13ㄷ.17ㄹ-28
3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었으므로, 다른 어느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긴 저고리를 지어 입혔다. 4 그의 형들은 아버지가 어느 형제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정답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12 그의 형들이 아버지의 양 떼에게 풀을 뜯기러 스켐 근처로 갔을 때,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네 형들이 스켐 근처에서 양 떼에게 풀을 뜯기고 있지 않느냐? 자, 내가 너를 형들에게 보내야겠다.” 17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뒤따라가 도탄에서 그들을 찾아냈다.
18 그런데 그의 형들은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 그가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19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20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21 그러나 르우벤은 이 말을 듣고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 낼 속셈으로,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하고 말하였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다시 말하였다. “피만은 흘리지 마라. 그 아이를 여기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져 버리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마라.” 르우벤은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 내어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낼 생각이었다.
23 이윽고 요셉이 형들에게 다다르자, 그들은 그의 저고리, 곧 그가 입고 있던 긴 저고리를 벗기고, 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졌다. 그것은 물이 없는 빈 구덩이였다.
25 그들이 앉아 빵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보니, 길앗에서 오는 이스마엘인들의 대상이 보였다. 그들은 여러 낙타에 향고무와 유향과 반일향을 싣고, 이집트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26 그때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27 자, 그 아이를 이스마엘인들에게 팔아 버리고, 우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자. 그래도 그 아이는 우리 아우고 우리 살붙이가 아니냐?” 그러자 형제들은 그의 말을 듣기로 하였다.
28 그때에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가다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내었다. 그들은 요셉을 이스마엘인들에게 은전 스무 닢에 팔아넘겼다. 이들이 요셉을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3-43.45-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45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46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마태 21,38)
 

 

소유와 질투의 부메랑 ♣

 

사람들은 자유롭고 행복하길 바라면서도 그것을 위해 결정적인 걸림돌인 소유와 질투를 버리지 못한 채 살아간다. 어쩌면 역설의 늪을 헤매며 때로는 사랑하고, 보람을 느끼고, 감사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의 실존적 혼동과 역설 자체가 십자가요 십자가의 죽음을 부르는 근원적인 이유임을 깊이 헤아려보는 것은 어떤가. 소유는 구속을 부르고, 질투는 왜곡과 소외로 되돌아오는 이 지극히 평범한 인생의 부메랑의 늪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제1독서에서 요셉의 형제들은 질투의 죄를 저질렀다. 그들은 요셉이 받는 총애 때문에 의기소침해졌고 심지어 분노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요셉의 행복한 처지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삶의 방향과 기준을 하느님께 두지 않고 정화되지 않는 욕망과 탐욕에 사로잡혀 요셉을 시기 질투하였고, 결국 요셉은 이집트에서 고통과 수난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자기중심적인 불순한 태도와 왜곡된 사랑을 통하여 당신의 창조를 이어가신다.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이집트의 재상 자리에 앉혀주신다. 시기 질투로 꼬이고 더렵혀진 관계를 창조의 순간으로 되돌리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포도밭은 하느님 나라요(21,43), 그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돌보고 그들로 하여금 정의의 결실을 맺도록 하시려고 당신 백성을 지도자들(소작인들)에게 맡기셨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사람들(예언자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 그들은 “저 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재산을 차지하자.”(21,38) 하고 말한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마지막으로 보낸 포도원의 상속자인 예수님마저도 단죄한 다음 사형선고를 내리고 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었고, 나아가 하느님의 것을 탐하고 질투심에 눈이 어두워져 결국 하느님을 보지도 못하였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는 거부당하고 마침내 죽음을 맞게 되셨다.

죽음을 부르는 질투는 이렇게 하느님이 아닌 다른 이들과 비교함에서 비롯되는 악이다. 그 악의 뿌리는 가난을 거스르는 애착이요, 소유욕이다. 애착과 탐욕과 이기심이 부르는 질투는 다른 이들에게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이 하느님에게서 오며 하느님의 것임을 망각한 데서 비롯된다. 누구나 다 예외 없이 소중한 존재이기에 하늘 아래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 안에서 그분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향기 있는 삶의 태도이다. 비교하려거든 오직 하느님하고만 비교해야 한다. 눈앞의 다른 누군가의 태도나 말씨, 감정표현에 신경을 쓰며 분노하고 판단하고 시기 질투하는 이는 하느님께로 향하는 순례길에서 방향 착오를 하고 있음을 뚜렷이 자각할 필요가 있다.

주님! 더는 주인인 양 착각하고 소유함으로써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도록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만을 바라보고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온갖 것을 당신께 돌릴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해주소서. 다른 이 안에서 선(善)을 이루시는 주님을 시기하지 않고, 함께 기뻐하고 서로의 좋은 점을 인정하고 칭찬해주는 기쁨의 나라로 인도하소서! 시기와 질투의 희생이 되어 고통을 당하는 경우에도 ‘새로운 창조’를 이어가시는 당신의 깊고 넓은 섭리의 손길과 자비를 굳게 믿고 기다리는 여유를 갖게 해주소서. 조금은 더 거룩해지기 위하여 몸과 마음으로 겪는 고통과 수고로움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이르는 구원의 여정에 일치시켜 나가도록 준비시켜주소서. ‘소유 없이’(sine proprio), 그리고 왜곡된 사랑의 표현인 질투와 시기가 꿈틀거리는 죽음의 계곡 너머 참 자유와 기쁨이 기다리는 부활을 ‘지금, 여기서’ 노래하게 하소서! 자신을 죽이고 하느님을 조롱하는 소유와 질투의 부메랑에서 벗어나...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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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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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아참 | 작성시간 24.03.01 자신을 죽이고 하느님을 조롱하는 소유와 질투의 부메랑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 작성자김광시 | 작성시간 24.03.01 아멘 💖💖💖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4.03.01 아멘 신부님 stellakang 님 고맙습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4.03.01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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