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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공 박여해 선조 생애 복원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문암 역사작가의 보금자리-2024-05-11]

작성자문암|작성시간24.05.17|조회수34 목록 댓글 0

1830년은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불과 22세라는 젊은 연령에 훙서한 해이다.

이러한 해에 필자의 5대조부가 되는 박제렴 선조가 생가인 판서공파에서 양가인

활당공파로 출계하면서 새로운 역사가 전개되었다.

활당공 박동현 선조는 판서공의 형님이 되시는 문정공 박상충 선조의 후손이 된다.

1375년 당시 친명파와 친원파가 대립하는 시기였는데 친명파는 친원파의 수장인

이인임 세력에 의해 탄압을 받게 되어 유배를 가게 되는데 여기에 문정공, 판서공

형제가 포함되었다.

이와 관련해 문정공은 유배중에 세상을 떠나 셨으며, 판서공은 유배가신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는 통탄스러운 상황이 전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암은 본래 활당공파로 알고 있었는데 그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히 모르나 본래

생가가 판서공파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누가 알려준 것이 아니고 스스로 족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터득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가의 의미는 혈통의 의미가 강한 것이고 양가는 가계를 계승하였으니

결국 법통을 계승하였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문암은 양가인 활당공파의 역사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혈통의 근원인 판서공파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 또한 제3자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 스스로 깨달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어느 순간 본 칼럼의 주인공인 감찰공을 족보를 통해 최초로 뵙게

되었으니 이는 44년전 역시 족보를 통해 종조부를 처음으로 뵈었을 때와 같은 심정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종조부와 감찰공의 차이가 있으니 종조부는 그나마 탄생연도라도 나와 있다는 것인데 감찰공은 심지어 탄생연도도 누락되어 있다는 것이다.

문암의 기억으론 1980년에 간행된 반남박씨세보에 감찰공의 유일한 기록은 감찰이라고만 되어 있다는 것인데 정말 문암의 기억이 정확한 것인지 다시 확인할 생각이다.

감찰이란 조선시대 사헌부에 속한 정6품의 관직인데 그 성격으로 볼 때 현재의 검사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비록 품계로 볼 때 높지는 않지만 업무의 성격상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 누구나 등용할 수 있는 관직은 아니었다는 것인데 분명한 것은 문암의 21대조부가 감찰의 관직을 수행하였다는 것이다.

덧붙이면 개인적인 스타일이기는 한데 평소 검찰관련 뉴스에 관심이 많은데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이러한 성향이 감찰공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족보를 자주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러번 확인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족보를 볼 때마다 생가의 계보까지 늘 확인한 것은 아니나 그래도 여러번 본 것으로 기억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족보에는 감찰만 나와 있지만 서서히 감찰공의 행적이 밝혀져 가고 있었다.

감찰공의 모친은 문화류씨인데 문암에게는 22대조모가 되시는데 당시 사촌남매가 되는 분이 청백리로 유명한 하정 류관 선생이다.

하정 선생은 지봉 이수광 선생이 '지봉유설'에 일화를 남길 정도로 청렴한 관리로 널리 명성을 떨친 분이신데 공교롭게도 '관(寬)'이라는 성함이 문암의 '관(寬)'과 한자가 일치한다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너그러울 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우연치고는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세월은 어느 덧 2020년이 되었는데, 문중 카페에 촌수로는 할아버지뻘이 되시는 분을 통해 감찰공의 부인이 강릉김문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으며, 당시에 관련 글을 카페에 직접 올리기도 하였다.

생각해보면 4년이란 세월이 어떻게 보면 짧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긴 세월이라 말하기도 어렵다고 본다.

당시에 그런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면 어떤 식으로든지 그 사실을 바탕으로 후속 연구를 진행하였을 터인데 당시에 무슨 이유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후속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다.

그래도 전혀 안한 것은 아니었고 문암의 21대조모의 친정 부친이 고려말의 충신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연구가 진행되지 않으면서 4년동안 잊혀 졌다가 며칠전, 강릉김씨족보에 박여해의 배위가 강릉김씨라고 되어 있다는 한줄의 기록에 눈이 번쩍 뜨여서 그 기록을 발견한 것이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어 자료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미 4년전에 관련 내용을 올린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정리하면 감찰공의 장인되시는 운암 김윤남 선생은 고려말에 낭천감무라는 관직을 수행하고 있는 중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면서 이 벼슬에서 과감히 물러나 파주에 은거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진 고려왕조를 생각하였다고 하는데 그래서 운암 선생이 은거한 곳의 지명을 국사봉이라 하였으니 참으로 의미심장한 뜻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감찰공이 과연 어떤 선조이시길래 이런 충신 가문의 사위가 될 수 있었는지 그 내력이 궁금한데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는 점에 통탄스러운 심정 금할 수 없다.

문암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이번에 중요한 기록을 발견하였다.

감찰공 선조의 부인이 강릉김씨라는 팩트를 근거로 직접 인터넷을 통해 족보를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강름김씨대종중에서는 운암 선생이 감무공파주파의 후손으로 소개하였으나 인터넷 족보에 감무공파주파 족보가 없었다.

그러한 가운데 족보 리스트를 점검하다가 강릉김씨한림공파문헌록이 눈에 띄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문헌록을 조사하였다.

보통 문중에서 간행하는 문헌록에는 족보의 계보보다는 선조들의 사적 즉 행장을 비롯해 신도비명, 묘갈명,묘지명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문헌록을 확인하는 중에 놀랍게도 운암 선생의 행장을 발견하는 수확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다만 그 행장을 당시에 지은 것이 아닌 1994년에 대동보를 간행하면서 문헌록에 소개한 것이었다.

이러한 행장을 바탕으로 운암 선생이 한림공파에도 속한다는 새로운 정보를 입수하고 리스트를 조사하던 중에 강릉김씨한림공파대동보를 발견했는데 8권까지 있는 족보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권에서 감찰공이 운암 선생의 사위로 기재된 공식적인 기록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구체적으로 감찰공은 운암 선생의 4남 4녀중에 첫번째 사위라는 것을 확인하였으니 참으로 감개무량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이제 감찰공이 강릉김문의 사위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하였으나 앞으로 밝혀야 할 내용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사실 기본적으로 감찰공은 언제 어디에서 탄생하였는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언제 별세하셨으며, 또한 묘소는 어디에 안장되어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감찰공의 환경은 종조부보다 더 열악하다고 할 수 있는데 오랜 세월 종조부의 행적을 추적한 심정으로 사실상 대부분의 행적이 베일에 싸여 있는 감찰공의 행적을 기필코 밝혀서 그 생애를 복원할 수 있도록 혼과 정성을 다할 것이다.

2024년 5월 11일(토) 문 암 올 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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