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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백지(白紙)위의 사랑 하나 뿐 -이지민(=2004)-

작성자2천사|작성시간22.10.31|조회수67 목록 댓글 0

 

 

 나는 아주 특별하게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어쩌면 평범하거나 일반적이지 않고 특별했기에 지금까지 성실히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아니다, 이것도 모두 주하느님의 크신 은혜이다. 어디 내 힘이겠는가? 감사합니다. 감사뿅뿅!

 

 

20여 년 전 여중생이던 나는 학교 갔다가 집으로 오는 길에 횡단보도에서 초보 차량에 치여 죽었다. 우여곡절 끝에 부모님과 연락이 닿아 병원에서 뇌수술을 받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학교 선생님(박상자 헬레나)의 권유로 행여 죽더라도 하느님 나라 가라고 대세를 받게 되었다. 대세 덕으로 천당문 앞까지 갔다가 “가라, 가라! 너는 아직 올 때가 아니다”는 내침(?)을 받고 쫓겨나 새 생명을 얻어 55일 만에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병원에 계시는 수녀님(‘세실리아 수녀님’)과 친하게 지냈다. 병실에 혼자 있을 때는 바쁘신 수녀님 불러 성가 불러 달라고 조르고, 몸은 중학생이었으나 정신은 너댓살 정도였다. 새로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1년여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학교에 가고 싶어 똥오줌도 못 가리면서 퇴원하여 다니던 학교에 어렵사리 복학했다. 어머니가 운전 연수를 받아 승용차로 날마다 같이 등하교하며 치료도 받고 운동도 하러 다녔다.

 

 

 

신앙 생활은 ‘영세’를 받으려면 교리반에 들어가 공부를 하여야 했다. 황순자안젤라 자매님의 봉사로 어머니와 둘이 6개월 교리를 완수하고 영세를 받았다. 그 때의 설렘과 기쁨과 감사함은 말로 이루 다 할 수 없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받은 ‘영세’가 아니라, 어렵게 어렵게 이루어졌기에 다시 한 번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체험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로사리아’라는 세례명으로, 나는 반짝반짝 빛나다는 뜻을 지녀 이 세상의 빛이 되어라는 의미로 ‘클라라’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나는 사실 몸이 불편하여 ‘레지오’도 ‘봉사 활동’도 못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건 더없이 많은데 하느님 억울하게(?) 나는 하느님을 위한 일을 못한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하느님께 찍힌 게 좀 많다. ‘아유, 부끄럽게~’

그래서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아침․저녁 기도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2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해오고 있다. 때때로 어머니께 자랑을 하면 대뜸,

“당연히 해야 하는 걸 가지고 뭘 자랑하냐?”

하신다.

 그리고 요즘은 또 하나의 활동을 덧붙였다. 만나는 이웃들을 위해 기도를 한다. ‘주님, 자매(형제)님께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하고. 그러니 나만 알고 기도를 받은 이는 모른다. 그래도 나의 이 작은 기도로 그(녀)가 은총을 받았음을 믿는다.

걸음도 삐뚤삐뚤, 그래서 때때로 걸어가다 넘어지기도 하고 레지오나 봉사 활동도 일절 못하는 한없이 부족한 나이지만 그래도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 하나만 믿고 지금까지 걸어왔다. 마치 하얀색 도화지에 “사랑”이라는 두 글자만 적은 체.

어쩌면 나는 선택되었으니 하느님 실망하시지 않게 신앙 생활 해나가야 하지 않겠나. 분명히 말하지만 이도 내 뜻은 아니다.

 

나는 아주 특별하게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어쩌면 평범하거나 일반적이지 않고 특별했기에 지금까지 성실히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아니다, 이것도 모두 주하느님의 크신 은혜이다. 어디 내 힘이겠는가? 감사합니다. 감사뿅뿅!

 

 

20여 년 전 여중생이던 나는 학교 갔다가 집으로 오는 길에 횡단보도에서 초보 차량에 치여 죽었다. 우여곡절 끝에 부모님과 연락이 닿아 병원에서 뇌수술을 받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학교 선생님(박상자 헬레나)의 권유로 행여 죽더라도 하느님 나라 가라고 대세를 받게 되었다. 대세 덕으로 천당문 앞까지 갔다가 “가라, 가라! 너는 아직 올 때가 아니다”는 내침(?)을 받고 쫓겨나 새 생명을 얻어 55일 만에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병원에 계시는 수녀님(‘세실리아 수녀님’)과 친하게 지냈다. 병실에 혼자 있을 때는 바쁘신 수녀님 불러 성가 불러 달라고 조르고, 몸은 중학생이었으나 정신은 너댓살 정도였다. 새로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1년여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학교에 가고 싶어 똥오줌도 못 가리면서 퇴원하여 다니던 학교에 어렵사리 복학했다. 어머니가 운전 연수를 받아 승용차로 날마다 같이 등하교하며 치료도 받고 운동도 하러 다녔다.

 

 

 

신앙 생활은 ‘영세’를 받으려면 교리반에 들어가 공부를 하여야 했다. 황순자안젤라 자매님의 봉사로 어머니와 둘이 6개월 교리를 완수하고 영세를 받았다. 그 때의 설렘과 기쁨과 감사함은 말로 이루 다 할 수 없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받은 ‘영세’가 아니라, 어렵게 어렵게 이루어졌기에 다시 한 번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체험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로사리아’라는 세례명으로, 나는 반짝반짝 빛나다는 뜻을 지녀 이 세상의 빛이 되어라는 의미로 ‘클라라’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나는 사실 몸이 불편하여 ‘레지오’도 ‘봉사 활동’도 못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건 더없이 많은데 하느님 억울하게(?) 나는 하느님을 위한 일을 못한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하느님께 찍힌 게 좀 많다. ‘아유, 부끄럽게~’

그래서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아침․저녁 기도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2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해오고 있다. 때때로 어머니께 자랑을 하면 대뜸,

“당연히 해야 하는 걸 가지고 뭘 자랑하냐?”

하신다.

그리고 요즘은 또 하나의 활동을 덧붙였다. 만나는 이웃들을 위해 기도를 한다. ‘주님, 자매(형제)님께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하고. 그러니 나만 알고 기도를 받은 이는 모른다. 그래도 나의 이 작은 기도로 그(녀)가 은총을 받았음을 믿는다.

걸음도 삐뚤삐뚤, 그래서 때때로 걸어가다 넘어지기도 하고 레지오나 봉사 활동도 일절 못하는 한없이 부족한 나이지만 그래도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 하나만 믿고 지금까지 걸어왔다. 마치 하얀색 도화지에 “사랑”이라는 두 글자만 적은 체.

어쩌면 나는 선택되었으니 하느님 실망하시지 않게 신앙 생활 해나가야 하지 않겠나. 분명히 말하지만 이도 내 뜻은 아니다.

 

나는 아주 특별하게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어쩌면 평범하거나 일반적이지 않고 특별했기에 지금까지 성실히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아니다, 이것도 모두 주하느님의 크신 은혜이다. 어디 내 힘이겠는가? 감사합니다. 감사뿅뿅!

 

 

30여 년 전 여중생이던 나는 학교 갔다가 집으로 오는 길에 횡단보도에서 초보 차량에 치여 죽었다. 우여곡절 끝에 부모님과 연락이 닿아 병원에서 뇌수술을 받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학교 선생님(박상자 헬레나)의 권유로 행여 죽더라도 하느님 나라 가라고 대세를 받게 되었다. 대세 덕으로 천당문 앞까지 갔다가 “가라, 가라! 너는 아직 올 때가 아니다”는 내침(?)을 받고 쫓겨나 새 생명을 얻어 55일 만에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병원에 계시는 수녀님(‘세실리아 수녀님’)과 친하게 지냈다. 병실에 혼자 있을 때는 바쁘신 수녀님 불러 성가 불러 달라고 조르고, 몸은 중학생이었으나 정신은 너댓살 정도였다. 새로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1년여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학교에 가고 싶어 똥오줌도 못 가리면서 퇴원하여 다니던 학교에 어렵사리 복학했다. 어머니가 운전 연수를 받아 승용차로 날마다 같이 등하교하며 치료도 받고 운동도 하러 다녔다.

 

 

 

신앙 생활은 ‘영세’를 받으려면 교리반에 들어가 공부를 하여야 했다. 황순자안젤라 자매님의 봉사로 어머니와 둘이 6개월 교리를 완수하고 영세를 받았다. 그 때의 설렘과 기쁨과 감사함은 말로 이루 다 할 수 없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받은 ‘영세’가 아니라, 어렵게 어렵게 이루어졌기에 다시 한 번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체험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로사리아’라는 세례명으로, 나는 반짝반짝 빛나다는 뜻을 지녀 이 세상의 빛이 되어라는 의미로 ‘클라라’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나는 사실 몸이 불편하여 ‘레지오’도 ‘봉사 활동’도 못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건 더없이 많은데 하느님 억울하게(?) 나는 하느님을 위한 일을 못한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하느님께 찍힌 게 좀 많다. ‘아유, 부끄럽게~’

그래서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아침․저녁 기도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2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해오고 있다. 때때로 어머니께 자랑을 하면 대뜸,

“당연히 해야 하는 걸 가지고 뭘 자랑하냐?”

하신다.

그리고 요즘은 또 하나의 활동을 덧붙였다. 만나는 이웃들을 위해 기도를 한다. ‘주님, 자매(형제)님께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하고. 그러니 나만 알고 기도를 받은 이는 모른다. 그래도 나의 이 작은 기도로 그(녀)가 은총을 받았음을 믿는다.

걸음도 삐뚤삐뚤, 그래서 때때로 걸어가다 넘어지기도 하고 레지오나 봉사 활동도 일절 못하는 한없이 부족한 나이지만 그래도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 하나만 믿고 지금까지 걸어왔다. 마치 하얀색 도화지에 “사랑”이라는 두 글자만 적은 체.

어쩌면 나는 선택되었으니 하느님 실망하시지 않게 신앙 생활 해나가야 하지 않겠나. 분명히 말하지만 이도 내 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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