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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스크랩] 인천 제물진두

작성자Lee MY|작성시간24.04.08|조회수106 목록 댓글 1
한국의 성지 홈페이지에서:

병인박해 때 박순집의 외가 집안과

이승훈의 후손들이 치명한 순교터

 

 ■  순례지 정보
 ◎ 소재지 : 인천시 중구 항동 1가 5
 ◎ 연락처 : 해안 성당(인천 중구 선린동 26)

                TEL (032) 764-4191 FAX (032) 764-4194 
 ◎ 미사시간 [해안 성당]  평일 : (월) 오전 6:30 (화, 목) 오후 7:00

                                           (수, 금) 오전 10:00 (토) 오후 4:00, 6:00
                                   주일 : 오전 9:00, 11:00 오후 7:00
 ◎ 교통편 : [지하철] 지하철 1호선 종점인 하인천에서 내려 약 2분 거리에 있는 '기독교 100주년기념탑'으로 가서 그곳에서 남서쪽 약 50m 거리의 위치가 제물진두로 추정하고 있다. 철길과 부두 담장으로 들어가기가 어렵다.

 

문서상으로도 병인박해 때 제물진두에서 많은 이들이 순교하였다고 쓰여 있으나 정확한 위치가 고증되지 않았다.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고 김진용(마티아) 씨는 제물진두 연구에서 제물진두는 ‘인천광역시 중구 항동 파라다이스 호텔이 위치한 언덕에서 자유공원 방향으로, 인천교구 해안동 성당 뒤편 벼랑 아래에 이르는 장소’라고 추정하고 있다.

 

 

인천교구에는 교구내 다른 순교지보다 더 많은 순교자가 처형되었으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순교터인 제물진두가 있다. 이곳은 병인박해 때 프랑스와의 병인양요, 미국과의 신미양요 등을 치른 후, “외적과 내통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여 주민들에게 경계심을 심어 준다.”는 의도에서 대원군 정권이 서울 한강변의 양화진두(楊花津頭, 절두산)와 함께 천주교인들에 대한 공개 처형장으로 택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진두(津頭)는 곧 나루터로서 외국 선박과의 접촉을 시도하는 군중들의 왕래가 잦은 이곳에서 공개적인 처형을 함으로써 서양 세력에 대한 배척과 함께 천주교 금단(禁斷)의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하였다. 박순집 베드로의 외가쪽 집안과 이승훈 베드로의 후손들이 치명한 순교터다.

 

1868년 4월 15일에는 부평읍내에 살던 손 베드로 넓적이(박순집의 이모부, 1801∼1868, 베드로), 김씨(손 베드로의 부인, 박순집의 이모, 1811∼1868), 백치문(손 베드로의 사위, 1827∼1868, 사도 요한)은 포졸에게 잡혀 서울 포도청에서 신문을 받고 인천 제물포로 압송되어 제물진두에서 4월 20일 참수형을 받아 각각 68세, 58세, 4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인천 지역에서의 박해는 다시 신미양요(1871년)를 전후하여 세차게 일어났다. 1871년 5월 17일경에는 남양에 살던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의 증손자이며 이재의(李在誼, 1808∼1868, 토마스)의 두 아들 이연구(李蓮龜, ?∼1871), 이균구(李筠龜, 일명 筠鶴, ?∼1871)가 인천 바닷가에서 미군 함정을 살피다가 체포되어 미군 배에 들어가 길 안내를 하려고 하였다는 죄목으로 효수경중(梟首警衆, 목을 잘라 매달아 대중에게 경각심을 줌)을 받아 순교하였다.

 

 

1871년 5월 21일에는 인천에 살던 이재겸(李在謙, 이승훈의 손자, 이신규의 아들)의 부인 정씨(이승훈의 손부이며, 이신규의 자부이자 이재겸의 부인), 이명현(정씨의 손자), 백용석, 김아지(김애기) 또한 사학죄인으로 이곳에서 효수경중 되었다.

이와 같이 인천 제물진두에서는 기록상 나타난 것만 해도 천주교 신자 9명이 처형된 것으로 나온다.

이곳 주변에 있는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은 1885년 4월 5일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가 제물포 나루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바로 기념탑 주변이 나루터이며 순교터라고 추정할 수 있다.

 

■ 인천교구 : 인천교구, 제물진두 순교기념 경당 축복

인천교구는 인천시 중구 항동1가 1-13에서 교구장 최기산 주교와 정신철 보좌주교 등 사제단 공동집전으로 ‘제물진두 순교기념 경당’ 축복 미사를 봉헌했다.

 

경당이 세워진 곳은 병인박해(1866년) 때 손 넙적이(베드로)를 비롯한 이승훈 성현 증손자 이연구촵이균구 등 천주교 신자 10명이 처형된 제물포 제물진두 순교터다. 많은 순교자가 공개 처형된 곳임에도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2010년 교구 성지개발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고 김진용(마티아, 2012년 선종)씨가 위치를 규명해 이듬해 성역화 작업에 돌입해 경당을 세운 것이다.

 

 10개월 만에 완공된 경당은 대지면적 109.1㎡(33평), 건축면적 43.3㎡(13평) 규모 지상 1층 구조로, 인천 차이나타운 입구 한중문화관 바로 우측에 15m 높이로 건립됐다.

 

경당 외관은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꽃 모양이자 하느님께서 순교자들을 감싸는 두 손 모양을 형상화했다. 벽면에 적힌 순교자 10위의 명패를 따라 좁고 긴 입구로 들어가면 작지만 아담한 경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벽면 높이 십자가 모양의 유리화 사이로 내려오는 빛은 마치 순교자들을 은총으로 감싸 안는 하느님의 빛처럼 여겨진다. 또 한편에 걸린 그림 속에는 1845년 제물포를 통해 중국으로 사제품을 받으러 갔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1888년 이곳을 통해 조선에 온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의 모습이 순교자들과 함께 담겨 있다.

 

최 주교는 강론에서 “작지만 장대한 의미를 지닌 아름다운 경당에서 전 세계 신자들이 신앙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갈 수 있는 보석 같은 신앙의 장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교구 성지개발후원회(회장 신혜선, 담당 제정원 신부)는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에 건립 추진 중인 ‘이승훈 역사문화 기념관’ 건립 사업도 2016년 완성할 예정이며, 이 같은 성역화 사업이 하나씩 매듭을 지으면 강화 갑곶순교성지를 비롯한 인천 지역 모든 성지를 잇는 성지순례길을 조성할 계획이다. 교구는 이를 위해 현재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인천 답동성당에서 제물진두까지 걷는 ‘제물진두 순교자 현양 도보순례’를 해오고 있다. 성지개발 후원 문의 : 032-765-6961, 인천교구 사무처
평화신문 2014. 05. 25 발행 [1266호] 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

 

■  제물진두 순교터에 대한 수정 연구
-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 부위원장 김진용씨 논문 -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 9명이 처형된 제물포 제물진두(祭物津頭) 순교터는 인천광역시 중구 항동 파라다이스호텔이 위치한 언덕에서 자유공원 방향으로, 인천교구 해안동성당 뒤편 벼랑 아래에 이르는 장소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인천교구성지개발위원회 부위원장 김진용(마티아, 82, 사진)씨는 최근 양업교회사연구소를 통해 발표한 '병인박해 중 천주교 신자 순교성지 제물포 제물진두 위치에 관한 연구' 논문에서 이 같이 밝혔다.

 

김씨는 "「인천개항 120년사」 저자인 향토사학자 나채훈 교수의 소견과 「인천부사」(仁川府史, 1883∼1933)에 기록된 해안 매립사업(1899∼1931) 등을 고려해 볼 때, 순교터인 옛 제물포 나루터는 파라다이스호텔 부지 언덕 일대로 봐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로써 강화 갑곶진두 및 진무영과 더불어 인천교구 내 중요한 순교터인 제물진두의 보다 정확한 위치를 규명하게 됐다. 인천교구는 교구설정 50주년(2011년)을 맞아 제물진두 순교터를 순례지로 개발할 계획을 갖고 있다.

 

김씨는 제물진두 위치가 명시된 인천부 고지도와 순교자들 행적을 기록한 '박순집 증언록' 등 각종 사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2005년 4월 제물진두 위치가 인천 중구 항동1가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남서쪽 50m 지점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지속적 연구를 통해 일제 강점기 인천항 축항사업 이전, 즉 병인박해 당시 순교지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해안선에서 육지 쪽으로 좀 더 들어온 지점이라고 이날 정정했다.
[자료 : 평화신문 서영호 기자, amotu@pbc.co.kr, 2010. 05. 23 발행 1069호] 

 

▒ 제물포(濟物浦)
인천 중구 지역에 있던 조선 시대의 포구(浦口)이다. 수도의 관문으로 조선 시대에는 수군만호(水軍萬戶, 종4품)를 두었다. 한말 개항 당시에는 구미 열강(歐美列强) 및 일본 등의 함선이 여러 번 입항하여 조선 정부와의 개국 교섭이 행하여졌다. 1883년 1월 인천이 개항되면서 그때까지 인천의 일부로서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제물포는 급격히 인천항의 근거지로 부상하였다.

 

부산항이 주로 일본을 상대로 한 항구임에 대하여 제물포항은 구미 여러 나라를 상대로 하는 문호였으며, 1902년 12월 제1차 하와이 이민선(121명 출발)이 여기에서 조국 땅을 떠났고, 이듬해에는 러시아·일본군 간의 충돌 사고가 부두에서 발생하는 등 다사다난한 역사를 기록하며 1983년에 개항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 인천 자유 공원의 ‘아픔’
인천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인 ‘자유 공원’이 있다. 1888년 인천 응봉산 일대에 조성된 이 공원은 처음 ‘각국 공원’으로 명명되었다가 ‘만국 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일제 강점기인 1924년 이후에는 ‘서공원’으로, 1957년 인천 상륙작전을 기념하는 동상이 건립되면서 ‘자유 공원’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명칭의 변화는 바로 만국 공원의 역사, 나아가 인천의 역사 그리고 한국의 근대사가 갖는 격변과 굴절을 단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이 공원은 1884년 체결된 ‘각국 조계 장정’에 의해 탄생했다. 러시아 측량 기사이자 건축가인 사바찐에 의해 설계된 만국 공원은 서울의 탑골 공원보다 9년이나 먼저 조성됐다. 각국 조계지에 있는 만큼 그 조성 목적은 조계지에 거주하는 외국인(일본인 포함)의 휴식 공간 확보였다. 만국 공원이 있는 각국 조계지는 ‘나라 속의 나라’였다. ‘장정’에 의해 조선인은 모두 철수되었고 조선인은 새로 건물을 지을 수도 없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모두 사라졌지만 이른바 ‘외국인의, 외국인에 의한, 외국인을 위한’ 건축물만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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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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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엠마우스 요셉 | 작성시간 24.04.08 수고하셨습니다
    건강한 월요일 되세요~^^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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