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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 신부의 교리] 여기에 물이 있다 ㅡ 회상

작성자박종해 스테파노|작성시간23.06.15|조회수131 목록 댓글 10


회상


회 상

어쩌면 나자렛 예수의 지상 여정의 최종 목표였을지도 모를 그 사건은 사람들에게는 절대적 최후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예수보다 더 큰 약속을 한 사람이 있던가?

그랬던 예수에게 이처럼 완전한 실패, 처참하고도 치욕스러운 죽음이라니...

모세도 석가도 공자도 무하마드도 모두 장수를 누렸습니다.
온갖 환멸을 겪기도 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고 제자와 지지자들에 둘러싸인 가운데 평화롭게 죽었습니다.

반면에 여기 이 사람, 활약 기간이래야 길게 잡아 3년, 겨우 약관 30대의 사나이,
이 사람은 사회의 배척, 제자와 지지자들의 배신과 부인, 적수들의 조롱과 조소를 받고
사람들과 하느님의 버림을 받은 채 잔인하게도 십자가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길이 기억될 삶의 모습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그는 그렇게 무력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던 것입니까?
더듬어 보면 저처럼 초라하게 죽은 예수는 우리의 기억과 마음에 영원히 남는 모범을 각인한 셈입니다.

첫째로 예수는 철저한 투신(投身)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분은 자신 삶의 목적이 뚜렷한 분이었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요한 4,34).

예수는 자기를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니 나를 믿으라"고 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 '자신' 은 오히려 예수의 '일' 곧 사명의 뒷전에 있었습니다.

예수의 '일'이란 한마디로 세상 안에서의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는 온몸을 다 바쳐 선포하고 가르치고 고쳐 주고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가장 큰 죄인이나 져야 하는 십자가의 죽음도 불사하며.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가족들과의 인연에도 연연하지 않은 채 어떤 타협도 하지 않고 어떤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은 채
끝까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그분의 발걸음은 철저한 투신 그 자체였습니다.

둘째로 예수는 사랑의 진수(眞髓)를 베푸셨습니다.
예수의 삶은 한마디로 사랑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사랑하라고 늘 가르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마태 22,37- 39).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 한 13,34).
그리고, 말씀으로만 사랑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은 사랑 그 자체를 사셨습니다.

그분의 삶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몸소 실천한 삶이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되고 작은 사람들을 아껴 주었습니다.

약자, 병자, 천한 사람들로 따돌려져 멸시받던 사람에게 다가가 영육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단순히 육적인 병만을 고쳐 준 것이 아니라 죄에 찌든 이들을 용서하시며
새로운 삶을 살도록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하신 당신의 가르침대로 목숨을 바쳐 그 사랑을 주셨습니다.

셋째로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의 어리석음'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요한 12,25).

고난과 십자가는 육화하신 삶의 절정입니다.
예수는 운명의 순간에 하느님과의 단절로 깊은 고통을 느끼시며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합니다.

십자가는 인간 예수의 일생에서 그가 누구였으며,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살았는가를 말해 주는 확증의 표지입니다.
십자가는 예수가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이 삶에서 당하는 모든 고난에 빠짐없이 연대하여 살았던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자리입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이 절망의 자리를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그 자리는 바로 하느님과의 단절의 자리이며, 죽음의 자리입니다.

예수는 바로 그 자리에까지 내려가셔서 인간의 삶과 연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는 철저히 하느님과의 단절을 체험했습니다.

예수에게는 십자가는 전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삶'의 표현입니다.
예수의 삶의 절정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연으로나 돌발적으로 예정된 것이라기보다 인간 예수의 삶의 마감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救援歷史)에서 '십자가'는 하느님과의 화해의 자리이며 속죄의 자리이자 새로운 희망의 문, 그 자체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Ⅰ고린 1,23).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Ⅰ고린 1,25).

이처럼 십자가는 어리석고 무력해 보이지만 최상의 지혜와 최강의 힘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희망이 있는 자리이고 우리 삶의 모범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희생적 삶, 자기를 내놓는 삶, 하느님께 순종하는 삶의 표현입니다.

인간의 현실적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며 살아가는 곳에서는 십자가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십자가의 삶은 악, 불의, 억압에 대해 저항하고, 의(義)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결단의 삶,
리고 가난한 자, 억눌린 자,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의 삶에 자신을 연대시키는 데서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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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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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박종해 스테파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6.15 고맙습니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하는 하루 되길 빕니다.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작성자하늘 바래기 | 작성시간 23.06.15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박종해 스테파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6.15 고맙습니다.
    사랑이 삶의 가장.큰 명제가 되길 원합니다.

    형님, 사랑합니다.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작성자김광시 | 작성시간 23.06.15 감사합니다 💖💖💖
  • 답댓글 작성자박종해 스테파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6.15 고맙습니다.

    언제나 믿음에 충실하며 주님께 충성하는 신앙인으로 생활하시길 빕니다.

    오늘 밤도 건강하시고 좋은 꿈 꾸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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