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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온 한 마음 - 남하한 영원한도움의 성모 수도회 수녀님들의 회고 -

작성자아름다운|작성시간21.07.24|조회수247 목록 댓글 2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첫허원과 자립

 

1940년 6월 27일 우리 희의 첫허원자가 11명 있었다.

허원식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객실로 들어가기도 전에

이제부터는 악니다 수녀님을 도와서 한국 수녀님들이 

많이 일해야 되겠다고 하셨다.

그 말씀 속에 너무도 엄숙한 태도가 보였다.

마치 이제는 독립 수도회로 자립하라는 명령과 같이 느껴졌다.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베드로 수녀를 수련장 보좌로 임명하셨다.

수일 후 신의주 마전동 본당 두 수녀 파견.

제일 가까운 관후리 본당에는 아퀴노 수녀와 파물라 수녀가 가고,

거기 계시던 바오로회 수녀님들이 아주 서울로 가셨다.

학교 일과를 마치면 본당 일도 도아야 하기 때문에

양로원과 유치원을 아주 맡아보는 말가리다 수녀와 3인이

관후리로 이사 갔다.

신의주 마전동에는 다위 수녀와 앙네스 수녀가 메리놀 신부를

돕게 되고 비현에도 두 수녀가 가게 되었다.

 

그해 8월부터 우리는 선교리와 서포에도 주일학교에 파견되었다.

이것은 전에 메리놀 도 신부님이 하시던 자리에 양 베드로 신부님이

새로 학교와 성당을 건축하시고 고생하시던 때였다.

우리가 청원기에도 모두 다 주일학교에는 다녔는데

아침에 버스로 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면 석탄재에 발리 새까맣게 되고...

선교리는 공장 지대였다.

양로원에 때로는 더 훌륭한 선물까지 얻을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살살 기어다니는 이였다.

이 해 수련자 요왕 수녀가 허원하고 수련기에 천당에 갔다.

 

제2대 원장 실베스텔 수녀님도 1941년 10월에 귀국하시고

후임으로 유제니아 수녀님이 오시었다.

시국은 점점 험악해졌다.

지난 사변 이후 우리 신경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41년 12월 8일 대동아전쟁이 일어났다.

메리놀회는 신부 수녀 할 것 없이 전부 한곳에 수용되었다.

 

상수구리에 있던 우리 수녀들은 신부님들이 계시던

서포 집을 관리하기 위하여 몇 사람밖에 안되는 수련자들을

데리고 이사하였다.

상수구리는 관후리에 있던 수녀들이 돌보게 되었다.

이때는 몇 사람의 기숙생을 수녀원에 두고 집을 보게 했다.

평양교구는 홍 방지거(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신부님이

책임자가 되셨다.

 

42년 4월 신의주 본당에서도 분원을 열고

영유에도 수녀들이 가게 되었다.

메리놀 수녀님들이 있었던 영유는

수녀원에 수녀 두 명만 파견되었다.

3월 22일 홍 신부님은 감목이 되셨다.

이해 5월 11일에 평양 시내에 야지요 마지도 분원을 열었다.

'야지요 마지'는 본래 메리놀 신부님이 일본사람들을 위해서

지어 놓으신 집이고 본당과 유치원이 있었다.

신부님 댁은 벽돌로 된 지하실이 있는 이층집인데

수녀 둘이 살기는 너무 컸다.

후에 여기 자리가 아까워서 병원을 열었다.

이것이 본 수녀원의 첫 번 시작한 사업이었다.

 

이와 같이 각지에 분원이 생기자 본래 수녀가 없는데다가

헤어져 살게 되어 분주하였다.

6월에는 메리놀 수녀들이 신부들과 선교사들과 같이

미국으로 가셨다.

그해 마지막으로 우리 식구는 불과 37명 밖에 없었다.

서포에 옮겨간 우리 수녀들은 소채만 먹었고

땔것 때문에 악니다 수녀님과 베드로 수녀님은 많은 신경을 쓰셨다.

 

 

        중략

 

악니다 원장 수녀님은 가끔 서울 본가에 가셔서 미술가이신 작은 오빠

장발 선생님 집에 머루르셨다.

우리들의 묵주나 복장 등에 대해서 좋은 의견을 청하곤 하셨다.

그리고 인재 양성과 여러 가지 의견에 대해서 이야기하셨다.

노기남 주교님의 착좌식에 가셨을 때 명동 뒷골목에서 꽃을 사서 꽃병에

아름답게 꽂아가지고 식당에 놓아드리도록 사람을 시켜 보내셨다.

이것을 보신 작은 오빠께서는 촌놈처럼 왜 그렇게 했느냐고 꾸중 하셨다.

정정당당히 주교님께 갖다 드렸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세밀한 점까지 솔직히 잘 지도해주시고 하셨다. (1942년 12월)

 

노 주교님 착좌식은 한국인 주교로서는 처음이었다.

원 주교님과 야마구치 주교님이 노 주교님께 품을 주셨다.

 

1943년 1월 릿다 수녀님, 글러라 수녀님, 아네 수녀님이 착복을 하셨다.

베드로 수녀님은 정식으로 이때부터 수련장 수녀님으로 임명 받으셨다.

 

 

***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의 원로 수녀님들의 회고록이 비매품으로 발간 되었다.

오래된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모두 사라지고 만다.

 

1839년 기해박해를 기록한 기해일기의 저자 현석문 가롤로도 

선교사제의 권유를 듣고 박해를 기록했다.

그리하여 기해일기의 기록으로 성인들이 시성될 수 있었다.

 

영.도.회 수녀님들의 일제강점기 이야기를 계속 보게 되어 기쁜 마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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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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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pine1215 | 작성시간 21.07.24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아름다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7.25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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