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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위의 아니,지민이의 아니,어머니의 꿈 -이지민 -

작성자2천사|작성시간21.12.22|조회수95 목록 댓글 1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수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날을 함 께 해요.”

“오 예! 내 머리도 살아 있네, 살아 있어.”

드디어 다 외웠다. 서너 마디 불러 놓고 늘 잊어버렸던 나를 ‘에헤이! 지민이 니도 한물 갔다 갔어’ 라며 탓하시던 어머니 코를 확실하게 눌러버린 짜릿한 순간이다. 이참에 어머니와 나의 냉전 시대도 막을 내렸다. 어머니와 나는 어째 모녀지간인데도 이렇게 말없이 사이가 그다지 달갑지 못한지 걱정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모녀지간이기 때문에 이럴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이런 사이는 모자지간은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느낌이기에 감사하다.

요즘 이 노래 가사를 외운다고 아침저녁으로 가사를 들고 소리질러 대고 있는데, 드디어 다 외웠다. 같이 사는 부모님께는 미안한 일이지만 함께 사는 우리는 운명 공동체이기에 피할 수 없는 일이고 어쩔 수 없다.

‘거위의 꿈’. 내가 아주 좋아하는 노래이다. 이 노래를 부르는 인순이의 목소리도 좋고 가사도 정말 좋다.

특별히 내가 이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는 노랫말이 내 현재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거위’가 아닌 ‘나’의 꿈인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학창 시절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가 기적적으로 55일 만에 환생하여 새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기에 이 노래에 대한 느낌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나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이 노래는 전하는 바가 있다. 우리 모두는 어른이 되면서 삶에 찌들려 살다 보니, 순수했던 어릴 적 꿈이 사라지기 일쑤다. 소박한 꿈을 잃고 구만리를 헤매는 이들에게 ‘거위의 꿈’ 이 노래를 들어보라고 감히 권유해 본다. 나의 꿈이 무엇이었는지도 생각해 보는 건 덤이다.

죽었다가 새로 깨어나(태어나) 새 삶을 어머니와 같이 ‘이인동체(二人同體)’가 되어 살았다. 수시로 어머니께 ‘미안해요’ 내지는 ‘감사해요’라고 말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누가 엄마 보고 그런 말 한다더냐. 니가 내 딸이니까, 나는 니 엄마니까 괜찮은 거야.”

하면서 어떤 힘듦도 다 물리치신 어머니셨다.

지금와 돌이켜 하는 말이지만 덩치는 어른 만 한데, 생각이나 행동거지는 대여섯 살 먹은 어린이니 어머니로서는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환장할 노릇이었으리라.

하늘을 높이 나는(세상 속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건 거위의 꿈도, 지민이의 꿈이기에 앞서 ‘어머니의 꿈’이었던 것이다. 날 수 없다던 거위가 하늘을 높이 날아오르는 꿈을 이루었듯이, 사람 되기는 텄다던 내가 드넓은 세상에 나와 삐뚤삐뚤거리지만 내 스스로 걸어다니며 다닐 수 있는 데까지 왔다.

암만 들어도 마음에 쏙 와닿는 노랫말이다. 그 꿈을 이루며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렇다. 꿈을 이루지는 못했을지언정, 그 꿈을 꾸며 항상 노력하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다. 꿈은 이루는 것이 아니라 꾸는 것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최고’는 되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도 ‘최선’을 다하지 않은 순간은 없었다.

현실은 누구에게나 팍팍하고 힘겹기만 하다. 그러나 그런 팍팍하고 힘겹기만 한 삶을 끌어올리는 ‘윤활유’가 있다. ‘꿈을 꾸는 것’이다. 물론 ‘에이, 그거……’ 이러는 사람도 있을 테다. 꿈을 꾸며 살게 되면 하루하루를 신나게 힘차게 살 수 있다. ‘거위의 꿈’을 들으며 다시 한 번 꿈을 꾸어보자.

노래 중간에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를 부를 때는 거위가 나의 삶과 닮아서 울컥했다.

나는 사춘기 때 차에 치여 죽었다가 기적적으로 55일 만에 환생하여 새 삶을 살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죽었다고 이미 포기했었고 설사 운 좋게 깨어난다 하더라도 사람 구실 하기는 텄다는 막말을 들어야 했다. 병원에서 처음 걸음마 연습할 때나 팔 운동을 할 때도 ‘땀’은 기본이고 눈물콧물 흘려가며 남 모르게 더 악을 쓰며 훈련 받고 운동했다. 당시로서는 말도 안 되는 꿈이었지만 ‘학교에 간다’는 꿈이 있었다.

당시 치료실에 치료 받으러 갈 때면, 똑바로 옳게 서 있지도 못하는 환우가 ‘학교 간다’는 소리를 해대니, 다른 환자들과 보호자, 의사들조차도 비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민이의 꿈’을 향해 더 악바리가 되었다. 퇴원을 하고 오줌똥도 못 가리면서 어렵게 다니던 학교에 복학을 했다. 어머니와 같이 학교를 다녔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나는 매일 한 번 등하교할 때, 어머니는 매일 똑같은 길을 세 번 등하교하셨다.(아침에, 점심시간에 도시락 갖고, 수업 마치고) 나에게 ‘운동’과 ‘치료’는 공부보다 더 중요한 필수 항목이었다. 그때는 철이 없어 많이 힘들다고 어머니께 막 울고 짜증도 부렸었다. 그런 딸을 바라보아야 하는 어머니는 더 가슴이 찢어졌을 터이다. 중학교 3학년 때에는 교실에서 큰 실례(똥을 쌈)를 한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수학 여행 갈 때는 어머니와 같이 나도 합류했다.

‘거위의 꿈’에서 거위는 ‘하늘을 높이 나는 꿈’을 꾼다. 새 생명을 얻은 나도 처음부터 서고, 걷고, 말하고, 세상에 나아가 사람 구실 할 수 있다는 꿈을 꾸었다. 완전히 다 이루어지지는 않았을지라도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 노력했기에 뿌듯하다.

지금은 또 다른 꿈을 꾼다. 나는 언제까지나 평생 ‘꿈꿀 줄 아는 소녀’이다.

지금도 철이 없으니 너무 가벼워서 입으로 ‘훅’ 불면 날아갈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람이 아주 강하게 불 때는 날아갈까봐 외출을 삼가는 편이다.

감동적이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글을 쓰는 ‘문학 소녀 이지민’으로 남고 싶다.

마음이 간절하고 그에 따른 노력을 하면 이루어진다고 하였던가. 내가 응모한 졸작이 ‘국회의장상’이라는 최고상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나의 필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용기 잃지 말고 열심히 살아가라는 ‘격려’의 뜻이란 걸 나는 안다.

감동적인 글을 쓰기도 쉽지 않을 진대, 감동적인 삶을 살기란 더 어렵다. 그러나 그 삶에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 낸다면 남부끄럽지 않은 멋진 인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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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클라라윤 | 작성시간 21.12.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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