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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엣대주교님묵상

회생(연중 제32주일)

작성자빠다킹신부|작성시간22.11.06|조회수191 목록 댓글 4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회생(연중 제32주일)


복음 루카 20,27.34-38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현재 내가 존재하는 제한된 시간과 공간뿐입니다. 우리는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것이, 이해하는 것보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도, 잠시 후에 일어날 일도 모르는데 다음 생애는 더욱 알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삶은 영원하고 사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삶은 언젠가는 사라지는 삶입니다. 저 세상에 참여하고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 사람만이 더 이상 시집과 장가갈 일도 없으며, 천사들처럼 영원히 살아갈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에 동참하는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지금 세상의 한계를 알고, 다음 생을 안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달라질 것입니다. 자신을 마치 신이라고 생각하며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사람을 죽이던 안티오코스 4세도 그렇게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였지만 세상을 압도하는 데 실패하고 나서야 후회합니다. 침략과 탐욕에 젖어 살았기에 희망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통탄하지만 후회는 너무 늦었고 온갖 고통에 시달리다 죽음을 맞이합니다.“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 무죄한 유다 민족을 괴롭힌 죄의 대가로 고통 속에 죽어간다고 고백합니다. “그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네. 이제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이국 땅에서 죽어가네.” 불의와 욕심은 결국 불행을 낳는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이야기입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죽는다는 것은 영혼이 바뀌는 것일 뿐, 여전히 살아있다’고 믿습니다. 죽은 후에 다시 저 세상에서 살거라고 믿기 때문에 조상을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데 이런 믿음은 하느님의 교리와도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과는 다른 날들을 위하여,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지금의 힘들고 어려움을 참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의 질문에 진리를 설명하셨습니다.

‘선택된 사람만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음 세상은 누구나 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자격이 있고 선택된 사람만이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기준은, 산상설교의 ‘여덟 가지 참 행복’을 믿는 사람들로 첫째는 박애와 사랑입니다.

두 번째는 ‘하늘 나라의 선택을 받는 사람은 천사와 같아질 것이다.’

하늘 나라의 생활은 인간의 삶과 달라 더 이상 배고프지도, 목 마르지도 않으니 먹고 마실 필요가 없습니다. 시집이나 장가도 필요없습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때문에 대를 잇기 위해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다면 하늘 나라에 있는 나는 여전히 나일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까? 네, 나는 여전히 ‘나’ 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고 예쁜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엄마 뱃속에서 움직이던 태아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이 아이는 엄마 뱃속에서 움직였던 태아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90세의 늙은 할머니도 70년 전에는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지금은 늙어 옛날 모습과 다르지만 같은 사람입니다. 땅속에서 묻혀있던 못 생긴 애벌레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꽃 주위를 맴도는 나비가 되었지만 그 둘은 하나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전혀 다른 생활, 먹고 마시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나’입니다. 비록 다른 점이 있지만 그래도 계속되는 세상입니다.

세 번째 진리는 ‘나도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오랜 방황을 끝내고 부모에게 돌아가는 자식과 같습니다. 무한한 갈망을 찾아 헤맸던 갈증들을 주님께서는 행복으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은 당신을 위해 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 곁에 갈 때까지 제 마음이 항상 불안하고 근심스러웠습니다.”

주님의 자녀이기에 삼위일체의 삶을 이루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바오로 성인은 삼위일체 삶의 행복의 근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훗날 우리가 얻을 행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은 해방되는 날을 기다리며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희망입니다. 더 이상 속절없이 흔들리고 헛되지 않는 삶이 주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목적지는 바로 우리의 근원이신 아버지이신 주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고통스런 삶에 얽매이지 않고 주님의 자녀가 된다면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 속에서 영원히 자유롭게 살아갈 것입니다.

비록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1코린 15,43-44)

주님! 다음 생애의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오늘 하루를 주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이라고 합니다. 언제든지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2.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살기 위해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해야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3. 우리 모두의 꿈은 다음 세상에 주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하여 지금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말씀의 실천

1. 우리의 마지막은 스스로 정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뜻하지 않은 마지막을 맞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분들의 마지막과 하늘나라의 삶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So Kien 순교성지의 유해실 이전

이곳은1862-1924년까지 주교관과 주교좌 성당, 신학교, 인쇄소 등이 있었던 곳이다. 1934-36년 주교관이 하노이로 이전하였지만 여전히 이곳은 많은 순교자들의 유해를 보존하고 있는 베트남 가톨릭 역사의 산실이다. 2008년 하노이 대구교의 끼엣대주교는 이곳을‘하노이 대교구 성지순례센터’로 명명하였다. 그동안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던 곳이 협소하고 습도와 방충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한국에서 유해함을 기증하여 순교자들의 유해를 새로운 유해실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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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2.11.06 아멘~감사합니다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2.11.06 아멘 고맙습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2.11.06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들꽃1 | 작성시간 22.11.07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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