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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신부 강론

2024년 1월 13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작성자푸른잎새|작성시간24.01.12|조회수447 목록 댓글 13

제1독서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 9,1-4.17-19; 10,1

 

벤야민 지파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키스였다.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고 츠로르의 손자이며, 브코랏의 증손이고 아피아의 현손이었다.
그는 벤야민 사람으로서 힘센 용사였다.
2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사울인데 잘생긴 젊은이였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그처럼 잘생긴 사람은 없었고, 키도 모든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컸다.
3 하루는 사울의 아버지 키스의 암나귀들이 없어졌다.
그래서 키스는 아들 사울에게 말하였다.
“종을 하나 데리고 나가 암나귀들을 찾아보아라.”
4 사울은 종과 함께 에프라임 산악 지방을 돌아다니고, 살리사 지방도 돌아다녔지만 찾지 못하였다.
그들은 사알림 지방까지 돌아다녔는데 거기에도 없었다.
다시 벤야민 지방을 돌아다녔으나 역시 찾지 못하였다.
17 사무엘이 사울을 보는 순간,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 내가 너에게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내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18 사울이 성문 안에서 사무엘에게 다가가 물었다.
“선견자의 댁이 어디인지 알려 주십시오.”
19 사무엘이 사울에게 대답하였다.
“내가 그 선견자요. 

앞장서서 산당으로 올라가시오.
두 분은 오늘 나와 함께 음식을 들고, 내일 아침에 가시오.
그때 당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일도 다 일러 주겠소.”
10,1 사무엘은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을 맞춘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그분의 소유인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
* 이제 당신은 주님의 백성을 다스리고, 그 원수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할 것이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2,13-17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르 2,14)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앵무새처럼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다람쥐처럼 행실로만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겉으로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가치관의 변화를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인격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전환입니다.

 

곧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의 방식이요, 용서와 자비의 삶의 방식이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마르 2,16) 방식입니다.

 

죄인이기에 단죄하고 처벌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눈의 방식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눈의 방식입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로마 8,29;필립 3,10)이요,

“그분의 형상을 지니는 것”(1코린 15,49)이요,

“그리스도를 입는 것”(로마 13,14;갈라 3,27;콜로 3,10;에페 4,24)을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 치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방을 넘어서는 신비주의적 차원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단죄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식사를 하신 것은 단순히 그들과의 타협도, 그들을 두둔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였습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인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비난하는 것은 마치 의사가 병자들과 함께 있다 하여 비난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을 나누는 것이요,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 놀라운 감격인가? 

 

이는 죄인을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보다 ‘먼저’ 당신을 건네주십니다.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해야 할 입니다.

오늘도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마르 2,14)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 2,17)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명 저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저도 그처럼 용서하라 하십니다.

그렇게 당신을 따르라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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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들꽃1 | 작성시간 24.01.13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atti | 작성시간 24.01.13 아멘.
  • 작성자아낄래요 | 작성시간 24.01.13 항상, 감사드립니다.~!
    이번 주말에도 건강하시고
    행복한 주말 되세요.~^^
  • 작성자쉬리* | 작성시간 24.01.13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4.01.13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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