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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 강론

[스크랩] 2023년 12월 12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되찾은 양의 비유』

작성자stellakang|작성시간23.12.12|조회수111 목록 댓글 3

<대림 제2주간 화요일 강론>(2023. 12. 12. 화)(마태 18,12-14)

 

복음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2-14).”

 

여기서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라는 말씀은,

‘잃은 양’을 찾을 때의 목자의 애타는 심정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이고,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라는 말씀은, ‘잃은 양’을

찾았을 때의 목자의 기쁨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따라서 ‘아흔아홉’이라는 숫자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실 상황을 반영한다면, ‘잃은 양’과 ‘잃지 않은 양’의 비율을

‘1대 99’가 아니라, ‘99대 1’로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실제 인간 세상에서는 성모님 한 분을 제외하고,

인류 전체가, 즉 ‘모든 사람들’이 ‘잃은 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바로 ‘내가’ 잃은 양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찾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나의’ 목자이신 분이, ‘나에게’ 오신 날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입니다.>

잃은 양을 찾았을 때 목자가 크게 기뻐한다는 것은,

양을 잃었을 때 크게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인류 전체의 모습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크게 슬퍼하고 계실 것입니다.

물론 각 개인의 모습을 생각하면, 성모님처럼 예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도 분명히 있지만,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슬픔만 드리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의 기쁨인가? 슬픔인가?>

 

예수님의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잃은 양’을 찾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좋은 말처럼 보이긴

하지만, 자기 자신은 잃은 양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하는 말이기

때문에, 좋은 말도 아니고, 옳은 말도 아닙니다.

<위선자들이 그런 말을 잘합니다.>

‘내가 먼저’ 되찾은 양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회개하라고 권고할

때에도, “너, 회개하여라.”가 아니라 “우리, 함께 회개하자.”

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시선’이 바로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아주 생생하게(뼈저리게) 체험한 사람이

베드로 사도입니다.

“......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하고 말하였다. 그가 이 말을 하는 순간에 닭이

울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루카 22,60-62).”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말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 말을 모두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바라보셨을 때,

예수님의 시선과 베드로 사도의 시선이 마주쳤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베드로 사도가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 또는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베드로 사도는 자기 자신이 바로

‘잃은 양’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바로

‘잃은 양’이구나.” 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내가’ 잃은 양이라는 말을 14절의 말씀에 적용하면,

14절을 이렇게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너를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루카복음 18장에 있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1-14ㄴ).”

이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와 세리는, 둘 다 ‘잃은 양’입니다.

세리는 자기가 ‘잃은 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인정하고 있는

‘잃은 양’이고, 바리사이는, 자기는 절대로 ‘잃은 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잃은 양’입니다.

만일에 그 바리사이가 예수님의 ‘되찾은 양의 비유’를

해설한다면, 어떻게 해설할까?

“저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노력합시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 바리사이가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십일조도 잘 바친다는

말은 사실일 텐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마태 6,1)

하는 일이기 때문에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그의 말은,

즉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일까?

겉으로만 보면 사실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마음속을

꿰뚫어보시는 주님께서 그를 인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는 마음과 생각으로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교만’과 ‘위선’ 때문에 그는 ‘잃은 양’인데,

자기가 ‘잃은 양’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되찾은 양’이 되기는 무척 어려운 상황입니다.

 

[출처] 대림 제2주간 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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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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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3.12.12 아멘 신부님 stellakang 님 고맙습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12.12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가을비 | 작성시간 23.12.12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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