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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 강론

2024년 1월 1일 월요일 (백)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세계 평화의 날) 『평화』

작성자stellakang|작성시간24.01.01|조회수96 목록 댓글 6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강론>(2024. 1. 1. 월)(루카 2,16-21)

 

복음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 뒤 그 아기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6-21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16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17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18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19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20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21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평화』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복’이 다르고,

‘받기를 원하는 것’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신앙인에게 ‘최고의 복’은 ‘주님의 평화’입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평화의 인사’를 하고,

서로 평화를 빌어 주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은 재물이나 권력 같은 것을 마음껏

소유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면서 그런 것들을

차지했을 때 큰 만족감을 얻는데, 그 만족감은

평화가 아니라 일시적인 즐거움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은 금방 지나가고,

가지고 있는 그것들은 멍에가 되고 족쇄가 되어버립니다.

평화를 누리기는커녕 평화의 반대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정말로 참된 평화를 누리기를 원한다면,

멍에와 족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들을 놓지 못하고,

즉 집착과 욕심을 버리지 않고 계속 움켜쥐고 있으려고 하면,

그 인생은 불행하고 허무하게 끝나게 됩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세속 사람들의

그런 어리석은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야고 4,1-4).”

신앙인은 세속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다른 것을 희망하고, 다른 것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복’을 빌어 주는 일도, 또 ‘복’을 받기를 바라는 일도,

당연히 세속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주님의 평화’를 얻어 누리지 못하면,

세상의 온갖 복은 다 쓸모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평화’를 빌어 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12-13).”

신앙인은 ‘평화를 빌어 주는 사람’입니다.

평화를 빌어 주는 것은 주님의 평화를 함께 누리자고 초대하는

일이고, 자신이 누리고 있는 평화를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이라는 말은,

“너희가 전하는 평화를 받아들이면”이라는 뜻이고,

‘마땅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거부하면’이라는 뜻입니다.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너희의 책임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을, ‘마땅하다.’ 라는 말에 초점을 맞춰서

다시 생각하면, 이 말씀에는 평화를 전하는 사람 자신이 먼저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한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도 들어 있습니다.

남에게 평화를 전해 주려면

자기 자신이 먼저 평화를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 없는 평화를 남에게 전해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주님의 평화’를 얻어 누리려면,

첫째, 주님을 믿어야 하고, 둘째, 회개해야 합니다.

<‘믿음’과 ‘회개’는 평화를 누리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호수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배를 저어 갈 때에 예수님께서는 잠이 드셨다. 그때에

돌풍이 호수로 내리 몰아치면서 물이 차 들어와 그들이

위태롭게 되었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곧 잠잠해지며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 하셨다(루카 8,23-25ㄱ).”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으면,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히거나

온갖 무서운 일에 압도되어서 금방 평화를 잃어버립니다.

반대로 믿음이 충만하면 평화를 누리게 되고,

그 평화를 잃지 않게 됩니다.

사도행전 12장에 기록되어 있는, ‘감옥에서 깊이 잠들어 있는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가 좋은 예입니다(사도 12,1-11).

사형 집행이 예정되어 있는데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아주 태평스럽게 감옥에서 자고 있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믿음’과 ‘평화’가 직결된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그리고 누구나 죄를 지었을 때, 또는 죄 속에서 살고 있을 때,

영혼의 평화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회개 없이는 평화도 없습니다.”

양심이 완전히 마비된 사람들 경우에, 죄 속에서 살면서도

죄의식 없이 마음 편하게 잘 지내는 것을 볼 때가 있는데,

그 마음 편하게 잘 지내는 것이 평화는 아닙니다.

임종을 앞둔 시점에서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지난 삶에 대한 후회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병자성사 집전할 때 자주 봅니다.

그래도 죽기 전에라도 고해성사를 볼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영혼은, 평화 없이 생을 마감하고,

평화가 전혀 없는 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 비참한 상태가 되는 것을 피하려면,

늦기 전에, 즉 ‘지금’,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출처]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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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4.01.01 아멘 신부님 stellakang 님 고맙습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 작성자쉬리* | 작성시간 24.01.01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하늘 바래기 | 작성시간 24.01.01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4.01.01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가을비 | 작성시간 24.01.02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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