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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 강론

[스크랩] 2024년 1월 3일 수요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작성자stellakang|작성시간24.01.03|조회수85 목록 댓글 4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강론>(2024. 1. 3. 수)(요한 1,29-34)

 

복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9-34
그때에 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29ㄴ-31).”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2ㄴ-34).”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과월절의 어린양과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어린양이 합해진 상징입니다.

즉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집트를 탈출할 때 어린양이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서

죽은 것과, 이사야서 53장의 어린양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는 것을 합해서,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을(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뒤집어쓰고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이라는 말은,

인간 세상에서 ‘죄 자체’를 없애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인들을(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죄인들 대신에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고,

구원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바로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세상의 죄’는 일차적으로 ‘나의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것은,

‘죄인인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라는 말과 ‘세상’이라는 말 뒤에 숨어 있으면서,

“남들은 다 죄인이어도 나는 죄인이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메시아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예수님이 없어도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바로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들의 생각입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그것을 몰랐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알려 주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것은,

인간적인 지식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입니다.

무슨 연구나 공부를 통해서 얻게 되는 지식이 아니라,

또 어떤 수련이나 수행을 통해서 도달하는 깨달음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엘리사벳 집안과 성모님 집안은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은 어린 시절부터 개인적으로는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러나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는,

하느님께서 직접 알려 주시기 전까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라는 말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오직 ‘믿음’으로만 하느님과 예수님을 알 수 있고,

하느님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경우에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서,

또 그 계시를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우리에게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있고, 또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증언도 있고, 그분들의 증언은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계시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 증언들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간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에는 ‘믿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믿음 없이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는,

성경은 재미없는 옛날이야기책이 될 뿐입니다.

신앙생활은, 지식을 쌓기 위해서 공부하는 생활이 아니고,

또 어떤 깨달음을 얻으려고 수행하는 생활도 아니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새로운 마음으로 성경 공부와 성경 읽기를

시작하는 이들이 많이 있을 것 같은데, ‘성경 공부’ 라고

표현하든지 ‘성경 읽기’ 라고 표현하든지 간에, 지식을 쌓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살기 위해서,

또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또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려고,

성경을 읽는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라는 증언은,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라는 증언이고, 이 말은 곧

“예수님은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는 말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뒤의 3장에서 요한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4-36).”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출처]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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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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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4.01.03 아멘 신부님 stellakang 님 고맙습니다.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4.01.03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쉬리* | 작성시간 24.01.03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4.01.03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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