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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 강론

[스크랩] 2024년 3월 2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되찾은 아들의 비유, 화를 내는 큰아들의 비유』송영진 모세 신부

작성자stellakang|작성시간24.03.02|조회수86 목록 댓글 4

<사순 제2주간 토요일 강론>(2024. 3. 2. 토)(루카 15,1-3.11ㄴ-32)

복음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 화를 내는 큰아들의 비유』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루카 15,1-3).”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29-32)”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진짜 주인공은 ‘큰아들’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은 ‘회개한 죄인’이고,

큰아들은 ‘회개해야 할 죄인’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은 의인이라고 자처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고, 무시하고, 멸시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죄인이라고 낙인찍은 사람들의

회개와 변화를 인정하지 않았고, “한 번 죄인이 되면

그걸로 끝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2절의 ‘투덜거렸다.’는 뜻으로는 ‘비판했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비판하면서 한 말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보니 당신도 죄인이다.”

라는 뜻입니다.>

 

비유를 보면, 작은아들은 회개하고 돌아와서 ‘안에’ 있고,

아버지가 베푼 잔치에 참석하고 있는데, 큰아들은 화를

내면서 ‘밖에’ 있고,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는, 작은아들은 ‘이미 되찾은 아들’이고,

큰아들은 아직 되찾지 못한 ‘잃은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을 찾으려고 가는데, 그 모습은

‘잃은 양 하나’를 찾기 위해서 가는 목자의 모습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가 큰아들을 타이르는 말로 끝나기 때문에,

아직도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큰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해서 ‘안으로’ 들어가고,

잔치에 참석해서 함께 기뻐해야만 이 이야기가 완성됩니다.

그 완성은 곧 예수님의 구원사업의 완성입니다.

‘나의 일’로 좁혀서 생각하면, ‘나 자신’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은 그 완성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입니다.

만일에 내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예수님의 구원사업이 마무리될 때,

남들은 모두 안에 있는데 나만 밖에 있게 될 것입니다.

 

29절과 30절에 있는 큰아들의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당신’이라고 부르고 있고,

동생을 동생이라고 하지 않고 ‘저 아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은, 내용으로도 아버지가 잘못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말이고, 표현으로도 아버지를 비난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칭 의인들이 “죄인들을 회개시키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당신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비난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인간이 감히 하느님을 비난할 수 있을까?>

“여러 해 동안 종처럼 당신을 섬기며” 라는 큰아들의 말은,

자기를 종처럼 부려먹었다고 아버지를 비난하는 말인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전락시킨 말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라는 말은,

“나는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았다.” 라고 주장하는

자칭 의인들, 즉 위선자들의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진짜 의인이 있을까?

진짜 의인이라면 그런 말 자체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위선자들이나 그런 말을 합니다.

“이러한 저에게 당신은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라는 말은, 자기는 최선을 다해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마땅히 주셔야 할 것을 주시지

않는다고 하느님을 감히 비난하는 위선자들의 말입니다.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라는

말은, “죄인들은 그들의 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도 처벌을 하지 않고,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하느님을 비난하는 위선자들의 말입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큰아들을 꾸짖지 않고

‘사랑으로’ 타이르기만 합니다.

큰아들도, 작은아들도 모두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라는 말은, 뜻으로는 “내가 늘

너와 함께 있고”인데,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 자체가

가장 큰 복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그렇게 큰 복이 아닙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라는 말은, 작은아들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주었다고 해서 큰아들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하나도 없음을 나타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집은 정원 제한이 없는 집입니다.

들어가기를 원하고,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기만 한다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집입니다(요한 14,2).

자리가 모자라서 못 들어가는 일은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32절의 아버지의 말은, 함께 기뻐하자는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지금 작은아들처럼 살고 있든지 큰아들처럼 살고 있든지 간에

모든 사람이 회개해야 하는데, 회개는 함께 기뻐하자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출처] 사순 제2주간 토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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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아참 | 작성시간 24.03.02 회개는 함께 기뻐하자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4.03.02 아멘 신부님 stellakang 님 고맙습니다.
  • 작성자가을비 | 작성시간 24.03.02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4.03.02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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