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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 강론

[스크랩] 2024년 3월 3일 사순 제3주일 『종교 정화』 송영진 모세 신부

작성자stellakang|작성시간24.03.04|조회수29 목록 댓글 2

<사순 제3주일 강론>(2024. 3. 3.)(요한 2,13-25)

 

복음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3-25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23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2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25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종교 정화』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요한 2,13-17).”

 

구약성경 즈카르야서에 이런 예언이 있습니다.

“그날에는 말방울에도 ‘주님께 성별된 것’이라고 새겨지고,

주님의 집에 있는 솥들은 제단 앞에 있는 그릇들처럼

될 것이다. 예루살렘과 유다에 있는 모든 솥도 만군의

주님께 성별된 것이 되어, 제물을 바치려는 이들이

모두 와서, 그 솥들을 가져다가 고기를 삶을 것이다.

그날에는 만군의 주님의 집 안에

더 이상 장사꾼들이 없을 것이다(즈카 14,20-21).”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이 예언이 실현된 일입니다.

<‘그날’이 시작되었음을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그날’은 ‘메시아의 날’,

즉 메시아의 구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구원의 반대쪽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심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보면서

시편 69편 10절,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를 생각했습니다.

원래 시편 69편은 ‘의인의 수난’에 대한 시편이고,

초대교회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적용하던 시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시편 69편 10절을 생각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열정이 죽음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즉 성전 정화 때문에 수난과 죽음이 닥치게 될 것이라고

예감했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의 마당은 ‘안마당’과 ‘바깥마당’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안마당’은 유대인들만 들어갈 수 있었고,

‘바깥마당’은 이방인들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바깥마당’에서 장사꾼들이 제물로 바칠 짐승들을

팔았습니다. 아주 비싼 가격으로......

그리고 봉헌금을 바치려는 사람들이 가지고 온 외국 돈을

이스라엘 돈으로 환전해 주는 환전상들도 있었습니다.

평소에도 그렇게 사고파는 일이 이루어졌는데,

파스카 축제처럼 큰 축일에는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몹시 붐비는 장터가 되었습니다.

‘바깥마당’이라고 해도 그곳도 분명히 성전에 속한 곳이었고

거룩함이 지켜져야 하는 곳이었는데, 거룩함이 지켜지기는커녕

세속의 장터처럼 혼잡하고 탁한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본래의 거룩함을 회복시키신 일입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신 것은 사람들을 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짐승들을 성전에서 몰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채찍이라는 말만 보고서 예수님의 행동이 너무 지나치게

폭력적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사실상 종교 정화이고, 종교 개혁입니다.

장사꾼들의 뒤에는 사제들이 있었고, 장사꾼들은 장사를 해서

번 돈의 일부를 사제들에게 ‘자릿세’나 ‘뇌물’로 주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어쩌면 진짜 장사꾼들은

사제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일에 그랬다면, 장사꾼들은 물품 판매를 대행하기만 하고,

대부분의 이익금은 사제들이 차지했을 것입니다.>

어떻든 그 일은, 성전이라는 특정 장소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종교 전반에 관한 문제입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하느님을 섬기는 척 하는 것,

그것은 심각한 신성 모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안 된다.” 라고 가르치시는데,

유대인들은 “그래도 된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해 왔던 일이고,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던

일인데, 왜 갑자기 시끄럽게 소동을 일으키느냐고 따집니다.

어떤 일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는 이사야서 56장 7절의 말씀을

성전 정화의 근거로 삼으셨습니다(마르 11,17).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기준이 됩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잘못된 일을

하면서도, 즉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일을 하면서도

“그렇게 해도 된다.” 라고 주장했던 일들이 많았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에는 그런 일이 없는가?

정말로 없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가?>

 

‘성전 정화 이야기’를 대할 때, ‘파는 쪽’의 문제만

생각할 때가 많은데, ‘사는 쪽’에는 문제가 없을까?

돈을 많이 바치면 그것에 비례해서 복을 많이 받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비싼 값으로 물품을 사는 것에 대해서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돈을 받고 구원을 파는 것도 나쁜 범죄이고, 돈으로 구원을

사는 것도 나쁜 범죄입니다.

굳이 따진다면 사는 쪽이 더 나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잘못된 신앙과 잘못된 사고방식과 분위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더 종교생활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교회에서 소외당하는 것입니다.

 

[출처] 사순 제3주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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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4.03.04 아멘 신부님 stellakang 님 고맙습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4.03.04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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