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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 강론

[스크랩] 2024년 3월 24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마르 11,1-10) 『성지 주일, 성주간』송영진 모세 신부

작성자stellakang|작성시간24.03.24|조회수79 목록 댓글 3

『성지 주일, 성주간』

 

“그들이 가서 보니, 과연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바깥 길

쪽으로 난 문 곁에 매여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것을

푸는데, 거기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 몇 사람이, ‘왜 그 어린

나귀를 푸는 거요?’ 하고 물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말하였더니 그들이 막지 않았다. 제자들은

그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올라앉으시자,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다. 그리고 앞서가는 이들과

뒤따라가는 이들이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르 11,4-10)”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그 행렬에 참가한 사람들의

수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많은 이’ 라는 말이 루카복음에는 ‘제자들의 무리’로

표현되어 있습니다(루카 19,37).

‘제자들의 무리’는 사도들과 신자들을 가리키는데, 신자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행렬은 최고의회나 로마 당국에서 주목하지도 않았고,

관심을 갖지도 않았으니, 소규모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재판할 때, 예루살렘 입성 행렬은

전혀 언급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더라도 신앙인들에게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그 일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뒤에, 이 일이 예수님을

두고 성경에 기록되고 또 사람들이 그분께 그대로

해 드렸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요한 12,16).”

 

2) 예루살렘 입성 때 예수님의 앞뒤에서 ‘호산나!’를 외쳤던

사람들이 나중에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서 예수님의 재판 때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외친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입성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은 갈릴래아 사람들이고,

재판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한 자들은,

사제들의 부추김을 받은(마르 15,11)

예루살렘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입니다.

<물론 몇 명 정도는 배반자 유다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을

떠나서 박해자들 쪽으로 갔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수난 때의 상황을 보면,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고,

베드로 사도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고(마르 14,66-72),

다른 사도들은 모두 달아나서 숨어버렸고(마르 14,50),

신자들도 흩어져서 숨었거나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런 모습들이, ‘호산나!’를 외치다가 태도를 완전히 바꿔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외친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긴 한데, 겁에 질려서 흩어져서 숨는 것과

배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1-32).”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신자들이 흩어진다는 것을

알고 계셨고,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당신을 부인하게

된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모두 되돌아오게 된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3)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재현하는 전례를

거행하면서, 예수님 뒤를 잘 따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성주간 전례를 통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고

재현하고 묵상하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고통과 헌신에 동참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성주간 예식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는

생각 때문에, 성주간의 의미를 묵상하지 못하고

피곤함만 느끼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4) 예수님 수난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주간 전례도, 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전 과정도,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바라보아야 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부활을 모르는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지나치게 감상(感傷)에 빠지는 것도 옳지 않고,

또 부활을 모르는 척 연기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5)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그 길을 그대로 걸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또 신앙생활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생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 여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십자가의 길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고통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부활 신앙’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과정이고 방법이기 때문에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도 ‘기쁜 일’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힘들어도 억지로 참는 생활이 아니라,

기쁨이 가득하기 때문에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는 생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덕분에 구원받았다는 믿음,

또는 구원받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희망과 기쁨이 생기고,

그 희망과 기쁨은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출처]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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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4.03.24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4.03.25 아멘 신부님 stellakang 님 고맙습니다.
  • 작성자가을비 | 작성시간 24.03.25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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