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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 신부 강론

자캐오의 변화/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작성자하늘호수♡마리아|작성시간22.11.30|조회수184 목록 댓글 6
■루카 19,1-10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이제 가을이 가장 무르익을 때입니다.

벌써 사제관 뒤에 500년 된 느티나무도 이제 낙엽으로 바뀌어 가려고 합니다.

그저께는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고 지금도 아주 이쁩니다.

느티나무 있는 본당에서 내가 참 많이 살았어요.

교우들이 저를 왜 느티나무 신부님이라고 부르냐, 또 제가 만든 거냐 물어요.

아니에요. 저절로 그렇게 됐어요.

진천, 감곡서부터 가는 곳마다 느티나무 큰 것이 참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신부님 살아가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면서 누군가 불러주기 시작했어요.

느티나무는 그늘을 만들고 동네 어귀에 지켜요. 당산목이라고 그래요.

동네를 지키는 마을 신부님 보면 느티나무 같은 생각이 든대요.

이제 느티나무 신부가 제대로 된 느티나무 밑에서 살죠.

몇십 년짜리 느티나무가 아니라 오백 년짜리, 태조 이성계 때 심어진 나무란 말이에요.

조경공사 조경공사는 이제 내년 3월부터 시작이 됩니다.

아마 조경이 되면 여러분들 끝나도 안 갈 것 같아요.

정원에 앉아서 멍 때리고 있다가, 혼자 조용히 묵상하다 갈 거예요.

원래 내 생각은 은퇴한 다음에 사람 안 만나고 조용히 살겠다, 혼자 내 영혼 구령을 위해 기도하며 살겠다고 했는데,

성모님이 또 하느님이 나를 이쪽으로 불러들인 이유가 맡겨진 일 있으시어 이 땅 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아마 이렇게 점점 점점 치유의 센터로 되어 가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들 은총 받고 싶죠? 네, 그렇죠.

그런데 은총이 뭔지는 알아야 받죠?

은총은 하느님의 선물이에요.

내가 잘해서 주는 게 아니에요. 그냥 거저 주시는 것, 그라시아(Gracia)

하여튼 여러분들 은총 속에 살고 싶고 은총 충만하게 살고 싶은 거 맞아요.

그러면 은총을 받으려면 그 첫 단추가 뭐냐?

본인이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자캐오는 본인이 죄인임을 알았잖아요.

그래서 하느님에 의해서 의인으로 높임을 받는 이야기가 오늘 스토리입니다.

세리와 바리사이도 이런 이야기죠.

바리사이는 폼 잡고 성전 제대 앞에서 ‘저는 간음한 적도 없고, 십일조 칼같이 하고,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그런데 저 뒤에 있는 세리 저 자식은요~’ 했지요.

그런데 그날 의인으로 인정받고 간 건 누구였죠?

성전 안에 발도 못 딛고 그냥 고개 숙이고 ‘주님 죄인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한 세리.

오늘 자캐오 이야기나 세리 이야기처럼 은총을 받기 위한 첫 번째 단추는 하느님 첫째 자리 모시려면 저절로 돼요.

본인이 의인으로 알고 사는 놈들은 절대로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못 모시고 살아요.

죄인임을 알아야 그래도 성경 말씀에처럼 입을 벌릴 수가 있는 거예요.

은총 가운데 살기 위한 첫 번째 가장 중요한, 내가 수천 번을 얘기한 내용, 죄인임을 자각해야 해요.

그래서 내가 늘 얘기하잖아요, 피정에 오신 여러분도 죄인이고 신부도 죄인이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 있지 않을 때 우리는 은총의 길로 들어설 수가 없는 거예요.

아무리 자기 신분이 추기경이라 하더라도 교황이라 하더라도 죄인 아닌가요?

 

그런데 그 죄인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건방지고 교만한 죄인이 있고, 세리나 자캐오처럼 겸손한 죄인이 있어요.

우리 모두 다 죄인인데 어느 쪽에 속한 죄인이냐, 이것이 중요한 거예요.

내가 교도소 사목 7년을 했어요.

얘기해 보면 두 종류, 본인이 지은 죄를 정말 가슴 아파하는 죄인이 있고요, 꼭 남 탓을 하는 죄인이 있어요.

죄는 자기가 지어놓고 그놈 때문에 죄를 지었대요.

겸손한 죄인이 돼야만 하느님으로부터 높임을 받을 수가 있다는 얘기지요.

 

그래서 세리와 바리사이의 성전 얘기도 그렇고, 오늘 이 자캐오 이야기는 읽을수록, 묵상할수록 나를 깨우쳐줘요.

초심을 잃어가는 변질되어 가는 나 자신을 자꾸만 깨우쳐주는 그야말로 복음 중의 복음, 아름다운 복음이에요.

여기 나오는 자캐오를 남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바로 나예요. 나 자신이 키가 작은 자캐오입니다.

여기서 작다는 것은 키가 190이다 그거를 따지는 것이 아니죠.

키가 작다고 하는 것은 죄 중에 찌들어 허리를 못 펴는 죄인이에요.

죄인이 의인으로 높임을 받는 이 드라마틱한 얘기는 수천 번을 읽어도 감동을 줍니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나에게 깊은 훈계와 묵상 거리를 제공하죠.

 

이 자캐오라고 하는 죄인이 살던 동네가 어디라고 나옵니까?

예리코. 어떤 곳이죠?

유대 땅에서 제일 부자가 사는 곳이 예리코예요.

왜냐?

그 동네에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열매, 발삼 향나무 숲이 있고 장미가 그렇게 유명해요.

장미정원이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곳이 예리코였어요.

또 대추나무 열매가 제일 유명한 곳이죠.

그래서 무역이 왕성하던 곳이라 유대 땅에서는 가장 큰 과세지의 중심이었어요.

그러기 때문에 로마 사람들이 임명한 세금 징수원들이 제일 몰려 있는 곳이 예리코였죠.

그런데 그 세금 징수원들이 좋은 소리 들었을까요?

‘매국노’, ‘로마 사람들 앞잡이’, ‘피 빨아 먹는 인간들’

그래서 그 당시에 세리들은 길 가다 암살을 많이 당했어요.

그런데 이 세리들의 제일 왕초가 세리장, 지금으로 따지면 국세청장 정도 되는 사람이 자캐오였죠.

그러니까 자캐오는 그 도시에서 알아주는 유명한 사람, 그 지방에서 가장 죽이고 싶은 놈 1위, 가장 미움받고 있던 사람 1위였죠.

자캐오는 너무 부자였고, 권력도 있었죠.

온몸을 비단으로 친친 감고 다닌 사람이었지만 행복했겠습니까?

행복하지 못했어요.

마음은 항상 텅 비어 있고 허전하고 고독했어요.

물질로는 채울 수 없는 외로움이 있었던 거예요.

옆에 있는 인간들도 돈 보고 옆에서 알랑방귀 뀌는 인간들 뿐이고, 돈 받아 가면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인간들 뿐이었죠.

친구가 하나도 없구나. 친구가 하나도 없구나!

 

그런데 이 자캐오가 어느 날 죄인의 친구라고 소문난 예수님이 예리코에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면서 자캐오는 고민을 해요.

‘과연 이분이 나를 사람으로 취급해 주실까? 다른 인간들은 나만 들면 칼을 뽑아 드는데.’

그러다 ‘그 양반 한번 보자.’

하여튼 사랑에, 자비에 굶주려 있었어요.

이런 자의 마음을 우리도 경험하고 살죠.

인생의 행복은 물질과 권력, 그 이상의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느낄 때가 많아요.

통장에 돈이 두둑하고, 동산 부동산에서, 아유 난 부자야~

글쎄 부자의 기준이 뭔지 모르지만 그런다고 과연 행복할까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자캐오는 바로 현대의 우리들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가슴이 뚫어지게 하는 것은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만이 아니죠.

예상치 않았던 시련, 또 내 가족한테 받는 상처, 배우자에게서 받는 상처, 이런 것들은 우리의 평화를 여지없이 깨버리고 말아요.

 

그래서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결심하기까지도 그 과정은 되게 심란했을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 만나러 가면서 린치를 당할 수가 있거든, 예수님 만나러 가기도 전에 맞아 죽을 수도 있거든요.

마치 누구처럼? 10명의 나병 환자!

서로 팔을 끌어안고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 계신 대로 내려갔죠.

예수님 만나려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해요.

그 정도 결심이 없다면 예수님 못 만나요.

그 각오하고 예수님을 찾아간 사람은 예수님 만나요.

하느님 체험이에요.

그러나 취미 생활처럼 생각하면 예수님 못 만나죠.

자캐오가 자기의 처지로서 군중들 틈에 끼어서 예수님을 본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였죠.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자그마한 자캐오를 분명히 테러, 그리고 린치를 가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요.

팔꿈치로 찌르고, 발로 차고, 뒤에서 뒤통수 때리고, 돌멩이로 그냥 찍어버리고.

그러면 순식간에 바닥에 엎드려 발에 밟혀 죽을 상황이었죠.

그 정도로 미움을 받던 사람이 이 사람이에요.

 

자캐오는 예수님을 향하여 있는 군중들 뒤로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어떻게든지 좀 비집고 나가려고 애를 쓰죠.

하지만 군중들은 즉시 알아채요.

왜? 향수 냄새가 나요.

얼마나 머리부터 향수로 다 발랐겠어요.

그리고 보니까 비단을 다 감고 있는 이게 뭐야? 누구야?

‘이게 미쳤나? 네가 여기 왜 왔냐?’

키가 작으니 다른 사람들 팔꿈치밖에 안 와요.

그러니 아마 그날 자캐오는 팔꿈치로 엄청나게 맞았을 거예요.

 

그래서 자캐오는 군중을 뚫고 예수님께로 가는 걸 포기하죠.

그리고 예수님이 지나가실 길을 알았기 때문에 다시 빠져나와서 그곳으로 가죠.

‘여기 있다가는 내가 맞아 죽겠다.’

코피를 질질 흘리면서 자꾸 흘러내리는 비단옷을 주워서 가요.

그 길에는 돌 무화과나무가 하나 서 있었죠.

그 나무로 올라가야 하는데, 세상에! 비단옷을 입고 올라갈 수 있겠어요?

그래서 비단을 훌훌 벗어 버리고, 그냥 고쟁이만 입었는지 아무튼 뭐 속옷만 입고 올라가요.

기관장 꼴이 아주 말이 아닌 거야.

자캐오는 그 비단옷을 벗어버릴 때 세상 걸 다 포기한 거예요.

멀리서 보는 그 양반의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느꼈기 때문에, ‘그래 저 양반 저 양반은 내가 꼭 봐야 한다.’

자캐오가 돌 돌무화과나무에 뻘뻘 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자캐오는 나뭇가지 끝으로 떨어질까 조심하며 왔어요.

 

사람들이 저기서부터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물밀듯이 막 그냥 밀려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 가운데에서 나뭇가지에 꼴불견인 자캐오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누구만 봤어?. 예수님만 봤어요.

그리고 예수님과 눈이 마주친 거야.

그리고 더 기가 막힌 건 이름을 불러요.

예수님은 자캐오를 만난 적이 없어요.

그냥 예리코라고 하는 마을을 지나가다가 군중 집회를 하고 있는데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위험해 내려와, 가지 부러져.’ 이게 아니에요.

‘자캐오야’ 이름을 불러요.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무르겠다.’

이름 불러준 것만 해도 5만 볼트 전기가 짜르르 흐른 판인데 누구네 집에 머무시겠다고요?

자캐오 일생에 이렇게 큰 감격은 없었을 거예요.

오늘 너희 집에 머물겠다는 큰 사랑을 주시죠.

그 얘기를 듣고 사람들은 투덜거렸다고 그랬죠.

그리고 오늘 복음에 보면 ‘자캐오는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하였다’라고 나와요.

마지 못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무의식적으로 맞이한 것이 아니라, 기쁘게 맞이하였다고 나와요.

오늘 복음 작가는 정확하게 ‘기쁘게 맞이하였다’라는 말로 자캐오의 마음 상태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기쁘게 맞아들였다’.

여러분들 성체 영할 때 자캐오의 집에 예수님이 들어가는 거랑 똑같은 거야, 그렇죠?

‘베드로야, 오늘 내가 네 집에 머물겠다.’ 하면서 예수님이 들어오셔.

그러면 그때 우리도 자캐오처럼 다른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분심 잡념 속에서 예수님을 맞아들인 것이 아니라,

기쁘게 맞아들여야죠.

‘기쁘게’라고 하는 말의 어원에는 ‘어린아이 같다’이 있어요.

어린아이들은 잘 웃어요. 깔깔대고 기쁘게

 

이렇게 자캐오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본 많은 사람은 투덜거리면서 뭐라 그래요?

‘세상에, 세상에. 저 양반 영특한 줄 알고 능력자인 줄 알았더니! 아이고 저놈이 죄인인 것도 모르나 봐.

어떻게 죄인의 집에 저렇게 들어가? 그리고 언제 둘이 만난 적이 있었나? 저놈 이름을 어떻게 알아?’

다른 군중은 그냥 멘붕이 온 거야.

 

왜 자캐오는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을까?

자캐오는 자기 죄를 숨기려 하거나 변명하거나 정당화시키려 하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자기 죄를 솔직하게 시인하고 남에게 탓을 돌리려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예수님을 아셨기 때문에

축복을 주기 시작하시는 거죠.

은총을 주기 시작하시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내 잘못을 내 탓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아주 크죠.

본인 자신은 늘 자기 자신에게 변호사 노릇을 하고 검사처럼 준엄하게 심판을 안 내려요.

본인에게는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 정당화하는 악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보편적인 원죄 성향입니다.

주위 환경이 이래서 내가 이 죄에 떨어졌어, 사회의 부조리 때문에 내가 이렇게 마음대로 못 사는 거야!

윗사람 탓하고 아랫사람 탓하고 심지어는 하느님 탓을 하면서, 본인이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것을 정당화시키려고 할 때가 많아요.

그러면서도 또 혼자 의로운 척하고, 결백한 척하고.

남의 일 헐뜯고 물거품 같은 그 공명을 자랑하면서,

남의 능력에 대해서는 이러니저러니 하면서 깎아내리려고 하는 것이 교만한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자캐오는 아까 뭐라했죠?

겸손한 죄인이에요.

죄인은 교만한 죄인, 건방진 죄인, 의로운 척하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그야말로 하느님의 자비만을 바라보는 겸손한 죄인이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내가 오늘, 네 집에 가겠다고 하는 이 기가 막힌 얘기를 들은 것이죠.

세례받은 천주교 신자들은 입만 벌리면 성체 들어오죠?

그런다고 예수님이 들어가시는 건 아니에요.

겸손한 죄인의 집에 들어가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세요.

 

그런데 예수님을 모시자마자 자캐오가 뭐라 그래요?

자캐오는 자기가 정말 변화된 사람이라는 것을 온 마을에 나타내는 방법을 그 순간에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의 절반을 나눠주겠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걸로 끝나지 않고 뭐라 해요?

혹시 다른 사람의 것을 횡령한 것이 있다면 몇 배로 갚아주겠다고요?

네 배로 갚겠다.

자기 재산 반 나눠주고, 나머지 그 반 가지고 혹시 횡령한 사람한테 네 배를 주겠다.

다시 말하면 청빈 서약을 한 거예요. 재산 포기

포기의 영성으로 자캐오는 그 어려운 길로 들어서기 시작한 거예요.

예수님은 이 청빈 서약을 듣고 난 다음에야 예수님은 구원 선언을 해요.

들어가시자마자 ‘자캐오야,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있다.’ 하지 않으셨어요.

가만히 지켜봤어요.

정말 변화가 된 것이 입으로만인지 행동으로 변화가 된 것인가를 아시려고 지켜본 거죠.

 

어떤 기도회에서 자매들 셋이 자기의 신앙 체험을 열심히 간증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만나고 어쩌고 어쩌고.

그런데 그 자매들이 간증할 때 한 자매는 고개를 숙이고 너무너무 괴로워했어요.

그래서 회장님이 자매님도 하실 얘기가 있을 것 같은데, 해보시라 하니 못하겠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앞서 신앙 간증한 세 여자가 이 자매 돈을 모두 빌려 가고 한 푼도 안 준 거예요.

이 자매는 같은 교우라고 돈을 세 여자한테 다 꾸어주었는데,

이런 핑계 저런 핑계 대면서 안 갚아 길에 나앉게 생겼는데 무슨 간증이냐는 거죠.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순한 말의 변화가 아니라 삶의 변화예요.

자캐오는 예수님만 모신 것이 아니라 다 포기한 겁니다.

예수님과 둘이 독대하면서 얘기한 것 아닙니다.

유리창으로 사람들도 들여다보고 많은 사람이 그 자캐오의 집에 있었어요.

자캐오는 온 주민에게 ‘나 이렇게 삶이 바뀐 사람이에요. 이 분 만나고 나 다 포기했어요.

저 죄인이지만 저 조금 이쁘게 봐주세요. 저 열심히 살게요.’

말의 변화가 아니라 삶의 변화였죠.

 

그러면서 이 이야기는 어떤 말로 끝납니까?

하느님의 아들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기 위해 왔다는 위대한 말씀으로 끝을 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잃어버린 자’라는 ‘잘못된 위치에 있는 사람’을 ‘있어야 할 자리에 못 있는 사람’을 의미해요.

사람은 하느님을 떠나서 방황하게 될 때 잃어버린 자가 됩니다.

하지만 다시 하느님께 순종하는 자녀가 될 때 또 하나의 사랑하는 자캐오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캐오의 얘기는 2천 년 전 예리코에 살던 세관장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각자 각자의 얘기입니다.

저는 자캐오 얘기를 보면서 강론을 준비할 때마다 정말 어찌 이렇게 끝없이 샘 솟는 샘물 같을까, 정말 감동스러워요.

내가 자캐오임을 스스로 깨닫고,

예수님 만나려고 나무 위에 올라갈 때,

그리고 예수님이 내 이름을 불러줄 때 ‘토마스야 오늘 내 네 집에 머무르겠다.’

눈물이 핑 돌죠.

다른 어느 때보다도 성체를 영할 때 가슴이 뭉클하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제 잠시 후에 ‘마리아야’, ‘루시아야’, ‘베드로야’, ‘스테파노야’, ‘블라시오야’

오늘 다 불러줄게요.

‘세실리아야’, ‘레지나야’, ‘스텔라야’, ‘모니카야’, ‘데레사냐’, ‘요안나야’, ‘클라라야’, ‘밀드레다야’

‘오늘 내가 네 집에 가겠다.’ 했을 때, 이제 들어오십니다.

그럼 여러분은 주님이 들어오시고 난 다음 무엇을 선언해야 한다고요?

‘포기 선언!’

주님 내 미워하던 놈 용서하겠습니다.

제가 욕심부렸던 것 몇 가지가 있는데요 포기하겠습니다.

영적 청빈 서약을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들어오시어 그 얘기를 들으시고 난 다음에야 ‘오늘 너는 구원받았다’ 하십니다.

 

이 거룩한 많은 성인이 보고 계신 가운데 또 하나의 자캐오가 되어 예수님을 영접받고 치유되고 구마되는 오늘,

다른 날과는 다른 특별한 날이죠.

여러분, 선택받아 오신 분들이에요.

선택받으셨기 때문에 하실 말씀이 있고 주실 것이 있기에 분명히 이 자리에 불러내신 거예요.

그러면 합당하게 우리가 죄인임을 느끼면서 입 크게 벌려야죠.

예수님은 ‘네 집에 가겠다.’ 했을 때, ‘들어오십시오.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들 여기를 떠날 때는 새롭게 부활해서 새로운 자캐오가 되어,

예리코에서 암살 대상 1번이 아니라 축복 대상 1번의 사람으로 바뀌어서 돌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2022년 연중 제31주일 (10/30)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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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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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요셉-막내165 | 작성시간 22.12.01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창수선화 | 작성시간 22.12.01 아멘!감사합니다 ~❤
  • 작성자나무 | 작성시간 22.12.01 글이 너무 길어요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2.12.01 아멘 신부님 하늘호수 마리아 님 감사합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2.12.01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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