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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 신부 강론

혼자 사는 쏠쏠한 재미/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작성자하늘호수♡마리아|작성시간22.12.11|조회수217 목록 댓글 6

◼루카 21,5-19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제가 이곳에 와서 식복사 없이 산 지가 석 달 한 반 정도 됩니다.

굉장히 바쁩니다.

기도하느라고 바쁜 것도 아니고, 바이크 타고 다니느라고 바쁜 것도 아닙니다.

살림하느라고 바쁩니다.

밥 세 끼를 찾아 먹는 것은 포기를 했고, 아침은 아예 이제 안 먹습니다.

아침을 안 먹으려니 일부러 늦잠을 잡니다.

늦게 일어나야만 점심때가 가까워지기 때문에.

그래서 한 11시 넘어서 아침 겸 점심을 해 먹습니다.

그런데 밥을 먹고 난 다음 바로 설거지에 들어가지 않으면 TV를 보다 보면 졸기 시작합니다.

깨어 보면 2시 반.

설거지하면 또 저녁때가 됩니다.

 

모르겠어요.

이런 삶이 얼마나 계속이 될지, 아니면은 식복사를 찾아봐야 할지.

내 한계가 어디까지 갈지 잘 모르겠지만, 사실은 은퇴 전에는 김웅열 신부가

이렇게 밥을 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면서 살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겠죠.

나 은퇴하면 아마 좋은 사람 많이 나타날 거야.

나 편안하게 해주고, 병이 들어도 나를 데리고 다닐 사람 좋은 사람 나타나겠지.

그런데 다 꿈이었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도 실제 필요한 사람은 딱 하나일 때가 있죠.

 

사실은 이렇게 습관이 되면 습관이 되는 건데, 저는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아요.

왜냐하면 혼자 살아버릇하니깐 작지만 깨우치는 진리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어요.

내가 혼자 살지 못했으면 알아낼 수 없는 사소한 진리들이 와 닿아요.

그 재미에 위로받고 삽니다.

몇 가지 얘기를 드릴게요.

 

첫째, 밥풀의 접착력이 그렇게 센 줄 몰랐어요.

수세미로 닦아도 안 떨어져요.

어린 시절 할머니는 내가 밥을 먹으면 밥그릇에 꼭 물을 부으셨어요.

왜 밥그릇에 물을 붓는지 이해 못 했어요.

물을 부어놓아야만 나중에 설거지할 때 쉽게 떨어지는 거예요.

저도 처음엔 아무 생각 안 하고 밥 먹고 그냥 가져가서 닦았죠.

그런데 수세미로 닦아도 안 떨어져요.

화장실 변기에 붙은 뭐랑 똑같아요. 이게 진짜 독하대.

예전에는 밥풀로 편지지를 붙였었죠.

그래서 이 떨어지지 않는 밥풀을 보면서 ‘우리도 예수님에게 이 밥풀처럼 달라붙어야 살아야 한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밥풀만큼 달라붙어 있지 못해요.

자주 떨어지죠

향주 삼덕의 밥풀로 붙어 있어야 한다.

신덕, 망덕, 애덕의 핵심은 뭐라했죠?

순명, 기쁨, 용서.

이 세 개의 영적인 밥풀, 세상에 어떤 일이 몰아쳐도,

그릇에 달라붙어 안 떨어지려고 하는 밥풀의 그 정성 백 분의 일만 가지고 있어도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가 없겠죠.

저는 밥풀을 보면서 처음에는 좀 짜증도 났지만, 밥풀이 주는 영성적인 의미를 깨달은 거죠.

‘그래 나도 이 밥풀처럼 예수님에게 떨어지면 안 돼. 어떤 일이 있었든 붙어서 살아야 해.’

 

두 번째로 요즘 느끼는 게 뭐냐?

가끔 교우들이 와서 주방을 쓸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분들이 다녀가시면 내가 다시 또 세팅해야 해요.

특별히 접시나 그릇도 종류가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그분들이 다녀가면 원래 내가 세팅해놓은 대로 되어있지 않아서 내가 다시 정리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힘들거나 짜증이 안 나요.

그냥 너무 자연스러워요.

저는 다시 세팅할 때마다 ‘주님은 흐트러지고 단정치 않은 우리 영혼을 정말 셀 수도 없이 정리해 주시는데,

분명히 기쁜 마음으로 정리해 주실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죠?

우리가 죄지을 때마다 그분이 분노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영혼 하나하나를 원래 위치대로, 당신의 모상대로

말씀을 통해서 성체를 통해서 고통을 통해서 여러 가지 체험을 통해서 원상복구 시켜줄 때,

‘얘, 너 지금 열다섯 번째다. 지겨워 죽겠다. 어떻게 성사한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똑같은 죄를 짓냐?’ 하며

짜증을 부리시지 않을 것이다.

저는 짜증이 안 나요. 그리고 재밌어요.

아이고, 어떻게 이렇게 조그만 접시를 이렇게 큰 것 위에다 올려놓았지?

그리고 이렇게 큰 접시를 이렇게 조그만 것 위에 올려놓았을까?

이 자매님은 아슬아슬하네~

원래 제자리로 옮겨놓은 재미가 솔솔치 않더라 이겁니다.

 

또 세 번째로 요즘 배운 게 뭐냐?

빨래해서 건조기에 말린 후 그것을 정리해야죠.

수건도 이쁘게 개어주고, 속옷도 이쁘게 개서 옷장으로 가서, 수건을 위에 착 얹고, 또 속옷도 맨 위에 착 얹습니다.

그런데 항상 보면 맨 위 것만 쓰게 돼요.

그렇죠?

그 밑에 있는 놈들은 한 번도 내 몸에 걸치지를 못해요.

속옷, 수건, 양말, 어느 때는 그릇도 마찬가지예요.

맨 밑에 있는 그릇은 생전 쓰질 않아요.

다시 말하면 선택받지 못한 아이들이 얼마나 서운하고 화가 날까?

‘나도 똑같은 그릇인데, 내가 훨씬 더 새것인데, 왜 저 양반은 맨날 입어 낡은 것만 입을까?’

나도 모르게 그냥 맨 위에 있는 것 꺼내 입는 거죠. 중간 것 빼기가 귀찮은 거예요.

저는 이 선택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내가 혹시 사제로 살면서 내 눈에 띄지 않는 교우들에게 무관심한 적은 없었을까?

봉사자들 가운데서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가 따뜻한 말 한마디 한 적은 없었을까?’ 그것이 반성이 되었어요.

‘나도 할 수 있는데, 나도 런닝인데, 우리 주인 따뜻하게 해줄 자신 있는데.’

그런데 생전 손을 안 대니 얼마나 밑에서 무겁겠어.

우리 자신이 그런 존재가 되면 서글프지요.

하지만 반대로 내 주변에 나의 무관심으로 그렇게 사는 사람이 없는지 분명히 한 번 뒤를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다음, 네 번째로 또 뭘 느끼냐?

이 뒤에 복숭아나무가 있어요. 스님 것이죠.

과수원이 바로 옆에 있었을 때 난 고마움만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불편함도 있더군요.

고마운 것은 봄에는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복숭아꽃을 보게 돼요.

그리고 또 가을이 되면 얼마나 탐스러운 복숭아가 열리는지 몰라요.

그리고 저는 이 산속으로 이사로 왔을 때 제일 걱정이 모기와 해충 걱정이었는데.

여기서는 희한하게 불을 켜놓아도 뭐가 달려들지 않아 신기하다 했더니, 모두 과수원으로 가는 거예요.

과수원 단내 때문에 한여름에도 뭐가 달려드는 게 없어요.

그런데 요즘 며칠 전부터 불편함을 느끼고 있어.

저 스님이 내년 농사를 준비하면서 퇴비를 뿌려요.

영양가가 잔뜩 있는 퇴비를 군데군데 뿌려요.

나는 처음에는 문을 열고 나가는데 이게 어디서 나는 냄새인가, 우리 정화조가 터졌나 했죠.

그런데 사방에서 다 냄새가 나고, 보니까 스님이 열심히 뭘 갖다 뿌리고 있어요.

일 년에 몇 번 뿌리시는지 모르겠지만 과수원 옆에 살 땐 저것을 감수해야 하겠구나.

퇴비 냄새가 이틀 정도는 머리가 아픕니다.

그래서 그것도 내가 생각을 바꿨어요.

‘그래 이게 고향 냄새지, 맞아 고향 냄새지.’

세상만사 모든 것이 장단점이 있더라 이겁니다.

 

우리는 추하고 더럽고 냄새나는 것은 안 보려고 애쓰잖아요.

그리고 나한테 쏙 와 닿는 것, 아름답고 이쁜 것, 깨끗한 것들만 보고 싶어 하죠.

제가 배티 성지에 있을 때 잔디밭을 제가 다 깎았어요.

매월 첫 토요일 전날은 이틀 동안 종일 잔디 깎는 기계에 올라탑니다.

배티가 좀 넓습니까?

잔디를 깎으며 뭘 생각하느냐, 내일 교우들이 여기 와서 앉고 행복해하겠지.

하지만 그곳에 앉는 사람은, 그냥 깨끗한 곳을 찾아 앉은 것이지,

잔디 가꾸기까지 어떤 사람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생각하지 않죠.

세상 모든 것에는 분명히 빛과 어둠이 같이 공존해요.

 

다섯 번째로 내가 느끼는 것은 이것입니다.

옛날 어릴 때 비 오는 날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잤는데, 그 집이 양철집이었어요.

그래서 빗소리가 막 들리는데 그것이 리듬으로 들리는 거예요.

우리 집은 기와집이었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못 들었었어요.

그때부터 나도 이렇게 빗소리가 때리는 지붕이 있는 밑에 살고 싶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이 집 지붕을 징크라고 하는 재료로 썼어요.

징크는 빗소리가 들려요.

그렇다고 아주 세게 들리는 것도 아니고 재미나게 들려요.

어제도 비가 왔는데, 아마 예민한 사람이면 잠을 못 잘 것 같아요.

하지만 난 너무 그 소리가 예뻐요.

이렇게 내게는 정겹게 들리는 소리가 소음으로 들리는 귀도 있어요.

마찬가지예요.

주님이 말씀을 통해서, 양심을 통해서 건네시는 소리가 꿀처럼 달게 느껴지는 귀가 있는가 하면,

그것이 고통스럽거나 불안하거나 소음으로 들리는 귀가 분명히 있다.

같은 빗소리라 하더라도 과연 여러분들의 귀는 어떤 귀입니까?

 

어제 비 때문에 복숭아나무 잎이 하나도 안 남기고 다 떨어졌어요.

그런데 이 복숭아나무 잎은 단풍이 안 들어요.

사방 천지가 울긋불긋해도 복숭아나무 잎은 푸르러요. 푸르른 채로 떨어져요.

여기 와서 내가 매일 보면서 관찰하며 알게 된 것이죠.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어요.

물론 단풍도 이쁘죠. 그런데 단풍은 사실 죽는 거잖아요.

몸이 아파서 아주 몸서리치며 죽기 직전에 비명을 지는 것이 단풍이에요.

그런데 우리들이 볼 때는 행복해하잖아.

복숭아나무 잎이 왜 푸른 상태로 겨울을 맞이하는지는 내가 조금 더 묵상해볼 거예요.

 

저는 여기서 이렇게 혼자 살다 보니까는 모든 게 슬로우(slow)가 돼요.

자동차도 빨리 달리면 길밖에 안 보여요.

근데 속도를 10키로 정도만 줄여도 안 보이던 것이 보여요.

느림의 미학이죠.

우리의 신앙도 보면 너무 빨리 가려고 하기에 못 보고 지나가는 것이 너무 많아요.

내가 그전에 말라붙은 밥풀 하나를 가지고 가르침을 받을 줄 어떻게 알았어요.

우리들의 귀가 열려 있고 눈이 열려 있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려고 하면,

하느님께서는 수천 가지의 방법으로 당신의 현존을 우리에게 알려주세요.

그리고 나의 영적인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를 스스로가 평가하게끔 지도해주시죠.

 

저는 아주 행복해요.

그리고 분명히 여기는 성모님이 불러주신 자리라고 확신하죠.

느티나무 신부가 느티나무 있는 곳으로 왔잖아요.

보통 느티나무도 아니고 500년 된 느티나무예요.

내년에는 정원을 현대식 정원으로 할 것입니다.

달력을 받으셨다면 정원 조감도가 나올 겁니다.

가끔 교우들이 ‘신부님, 돈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하고 물어요.

정원 만들 때 꽃 하나라도 봉헌하시려면 하세요.

내가 봉헌한 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생각하면, 올 때마다 행복하시겠죠.

 

사실 이번 주 복음은 내내 세상 종말에 관한 이야기죠.

그래서 굳이 똑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도 들고,

또 내가 이야기한 여섯 가지 하나하나가 깊은 묵상을 주었던 소재여서 여러분에게 화두를 던진 겁니다.

묵상들이 여러분들의 영성 생활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멘

♣2022년 연중 제33주일 (11/13)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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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창수선화 | 작성시간 22.12.12 아멘!감사합니다 ~❤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2.12.12 아멘~감사합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2.12.12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별향기 | 작성시간 22.12.12 👍🤗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2.12.16 아멘 신부님 하늘호수 마리아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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