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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 신부 강론

늑대가 새끼 양과 노는 세상/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작성자하늘호수♡마리아|작성시간22.12.22|조회수134 목록 댓글 3

◼마태오 3,1-12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누구겠습니까?

세례자 요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어떤 사이입니까? 혈적으로는 형제죠.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서로 아기를 가졌을 때 만나죠.

마리아가 사흘 길을 걸어서 사촌 언니 엘리사벳을 만나러 갑니다.

그때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이 ‘어찌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하면서 아주 극존칭을 씁니다.

나이로 볼 때나 뭐를 볼 때나 한참 딸 같은 여동생이었지만,

그 뱃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을 때는 혈육으로 내 동생으로 취급하는 게 아니죠.

메시아를 모시고 있는 귀한 몸이다.

거기에 대하여 또 성모님은 마니피캇(Magnificat)으로 응답을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안 자라죠.

그래서 30이 넘었을 때 어디에서 선포한다고 나와 있죠?

‘광야’에서 선포하였다.

선포하는 메시지가 뭡니까?

딱 한 줄로 ‘회개하여라.’

그때 많은 사람이 와서 회개했다고 나오죠.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고 음식이 뭐라고요?

여러분들 메뚜기와 들꿀을 주식으로 하고 사실 수 있을까요? 없죠.

그것도 살아있는 메뚜기를.

그래서 예루살렘과 온 유다 지방과 요르단 부근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지금 이 시대야말로 세례자 요한 같은 선지자들이 나타나야 할 때가 아닌가.

공식적으로 임명된 선지자들은 사제입니다.

맞죠. 사제들은 세례자 요한 같은 역할을 하고 살아야 해요.

세례자 요한은 그 당시에 국민 회개 운동을 한 겁니다.

그때 당시도 썩어 있었어요.

색깔은 지금과는 다르지만, 어느 시대든지 하느님과 대적하는 악의 무리는 항상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국민 전체를 향하여 회개하라고 외친 겁니다.

지금 이때야말로 세례자 요한처럼 사제들은 자기 본당에서 신자들을 회개시켜야 합니다.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느님의 축복이 내려올 길이 없습니다.

죄 덩어리인 영과 육을 가지고 어떻게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있겠는가

대림절은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것은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회개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회개입니까?

‘회개’ 참 많이 들어보았는데, 만일 대자녀가 ‘성당만 가면 회개하라는데 어떻게 하는 겁니까?’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지 못한 걸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것.

그러면 죄는 무엇인가요?

내가 구체적으로 물을게요.

교리 때 죄에는 소죄와 대죄가 있다고 배웠습니다. 소죄와 대죄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소죄와 대죄의 기준은 부지불식간에 지은 죄인가아닌가 입니다.

즉, intension(의도)가 없었어.

어~하다 보니 ‘아이고 내가 내일이 휴일이라 오늘 주일인 것 모르고 빼먹었네.’

‘일부러 빼먹을 거야’, 이 생각이 아니었죠.

전혀 의도 없이 지은 죄를 소죄라 해요.

이 소죄는 어떻게 해결해야 해요?

소죄는 고백성사 거리가 아닙니다그래서 저녁 기도가 중요한 거예요.

저녁 기도가 시작이 ‘주님, 오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와~’하면서 죽 고백이 나오잖아요.

그때 가슴을 치면서 ‘주님 내일 그 자매한테 사과해야겠네요.’

말할 당시에는 죄가 아닌 줄 알았는데, 저녁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이고 내가 말실수했네.’ 이것이 소죄예요.

그때는 가슴 절절히 통회하면 그 죄는 사함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소죄가 바로바로 해결이 안 되고 계속 쌓이면 대죄가 돼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저녁마다 정말 확실하게 십자가 앞에 앉아 저녁 기도 바친다면 소죄는 해결됩니다.

사실 기도서에 있는 것 중얼중얼하면 1분이면 끝나죠. 그게 전혀 기도가 아니에요.

정말 내가 말이나 생각이나 행동으로 무슨 죄를 지었는가를 뒤돌아보면 많지요.

생각으로 지었든, 말로 지었든, 행동으로 지은 죄든 하나하나 생각해보니 그중 어떤 것은 의도적으로 한 것이 있다.

그러면 그것은 성사 거리로 따로 빼놓아야 합니다.

5개의 죄를 지었는데 3개는 죄지을 당시 죄인지 몰랐다, 그것은 소죄예요.

그런데 두 개는 확실히 내가 저 사람 상처 주려고 아주 계획적으로 행했다면 대죄입니다.

대죄는 확실한 의도가 있어야 해요.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어떤 사냥꾼이 사냥 갔는데 노루가 휙 지나가서 탕 쐈어요.

노루가 죽었나 가보니, 노루 옷을 입을 다른 사냥꾼이 총에 맞아 죽은 것에요.

이 사람은 과실치사로 형을 받죠.

하지만, 이 사람이 천주교 신자라면, 고백성사 볼 때 살인죄를 지은 것이 아니에요.

왜? 처음부터 의도를 갖고 사름을 죽인 것이 아니었잖아요.

사람을 죽였어도 그 고백을 듣는 사제는 대죄로 인정을 하지 않고 소죄로 인정을 해요.

그런데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둘이 사냥을 갔어.

그런데 저놈이 너무 미워, 오늘 어떻게든 죽여야겠다.

기회를 엿보다 저 앞의 그놈을 향해 쐈는데, 세상에 그놈은 머리를 수이고 옆에 지나가던 사슴이 총에 맞아 죽었어.

사람들은 명사수가 날아다니는 사슴을 맞췄다고 해요.

그렇지만 그 인간은 하느님이 볼 때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예요.

왜? 사람을 향해서 쐈으니까.

그래서 인간이 보는 판단과 하늘이 보는 판단은 다른데 그 하늘이 보는 판단은 누가 제일 잘 아느냐본인이 제일 잘 알아요.

세례자 요한이 회개하라고 했을 때는 그 두 가지, 소죄와 대죄 모두를 회개하려는 거예요.

그것에 대한 증표로 세례를 받으라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2천 년 동안 물로 세례받는 것은 이어져 내려왔어요.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세례와 신약의 백성인 여러분들이 받는 세례는 뭐가 차이가 있을까요?

오늘 세례자 요한은 분명히 얘기했어요.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 준 세례는 그냥 씻김의 의미밖에 없어요거듭나는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이것이 다른 점입니다.

 

지금 시대야말로 사제들은 정말 강하게 세례자 요한처럼 국민 회개 운동을 시키는 데 앞장서야 할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봅니다.

사제들이 강론하면서 신자들의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서 한다든지, 자기 신변잡기의 얘기만 한다든지,

책에서 따온 것으로, 어떻게 보면 해치우려고 한다면, 그건 직무유기라고 봐요.

좋은 강론은 기도에서 나오는 거예요.

본인이 갖고 있지 않은데 나올 수가 없죠.

우리 신부님이 정말 깊은 묵상 끝에 나온 강론이냐 하는 것은 신자들이 잘 알아요.

달변이라는 의미가 아니죠.

말을 어눌하게 하더라도 울림을 주는 강론이 있어요.

단 5분을 하더라도 나를 때리는 강론이 있는가 하면, 30분을 하더라도 지겨운 강론이 있죠.

신자들은 어느 쪽을 좋아할까요? 나를 변화시키는 강론을 좋아해요.

 

오늘 제1독서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란 말로 시작합니다.

공동번역에는 ‘이사이’라 하지 않고 ‘이새’라 했죠.

‘이새’가 뭡니까?

일세, 이세 그런 거예요? 아니죠.

이사이는 예수님의 족보에도 나오는 다윗 아버지 이름이지요.

이 예언은 이사이의 아들을 두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해서 한 예언이죠.

이사이의 아들은 다윗, 손주는 솔로몬 왕이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다윗왕까지만 성왕이고 그 아래로는 타락한 왕들이요.

우상숭배에 빠지고, 나라라 둘로 갈라지고, 그 나라들도 차례로 망해서 바빌론, 페르시아, 희랍의 식민지가 되고

예수님 시대에는 로마의 식민지였죠.

다윗왕 이래 한 번도 독립 국가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오늘 1독서에 나온 것처럼 다윗의 아버지 이사이의 이처럼 죽은 나라에서 새 왕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 왕은 하느님의 온갖 영을 다 받은 자로서 세상을 변화시키게 된다는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뒤쪽에 굉장히 이상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늑대가 새끼 양과 놀고 사자가 송아지랑 놀 수 있는 존재에요?

아니죠. 늑대가 어떻게 새끼 양이랑 놀아요. 사자는 송아지를 잡아먹어야 해요.

그리고 곰이 암소와 친구가 된대요.

이사야 예언에 의하면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런 일이 벌어진대요.

세상이 그렇게 바뀐대요.

‘사자 늑대 곰은 사나운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지만, 그때가 되면 본능대로 살지 않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에요.

양순하게 될 것이다.

 

이사야가 이야기한 대로 후손 가운데 예수님이 세상에 나왔죠.

그 예수님이 나오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오래된 선조 이사야의 입에서 얘기했던 것이 들어맞기 시작했어요.

수백 년이 지나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 실제로 그 모든 일이 일어났다는 얘깁니다.

몸 파는 창녀가 몸을 팔지 않고 습성대로 살지 않고 깨끗하고 거룩해 바뀌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건 마치 사자가 양이랑 같이 노는 것 같은 큰 변화죠.

남을 등쳐먹던 세리가 자기 본능을 버리고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줘요.

자캐오 이야기죠.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얘기예요.

서로 미워서 이를 갈던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게 돼요.

심지어는 죽은 사람까지 살아나요.

이처럼 예수님을 체험하면 세상은 자기 본능이나 습성대로 살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게 될 것이다.

자기 본능대로 살지 않고 자기 습성대로 살고 있던 사람들이 자기 잘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

이게 바로 회개라는 얘기죠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면서 사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요.

그것으로부터 여러분은 자유로우실 수 있어요?

아니죠.

남이야 상처받건 말건 말하고 싶은 대로 다 말하면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실이건 거짓이건 자기 습성대로 있는 말 없는 말 다 떠벌리는 자들이 있어요.

이런 사람들이 정말 주님을 영접하고자 한다면 입을 다물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죠.

사자나 늑대가 그 날카로운 입을 다물듯이 사나운 자신의 입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아멘

 

자기 것이라고 마음대로 쓰고 싶은 대로 다 쓰는 사람들이 있어요.

또 마시고 싶은 대로 다 마시고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탐욕을 누리고 싶은 대로 다 누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그 습성을 버리고 생활 태도를 고쳐야 하는 것이 바로 대림절의 의미죠.

대림절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오는 때요, 회개를 통하여 주님 나라를 차지하는 때입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은 듯 절박함을 갖고 미루지 말고 회개하는 시기죠.

잘못을 뉘우치고 행실을 뜯어고침으로써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영접해야 하는 시기가 바로 대림절입니다.

 

오늘 복음에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라고 나옵니다.

아마 언젠가 얘기를 드린 것 같았는데, 2005년도에 내가 감곡성당에 부임했어요.

감곡성당은 한국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오래된 성당이고 신부 수녀가 제일 많이 나온 곳이죠.

그 감곡성당이 부도난 상황에 내가 부임했어요.

우리 교구에 신부님이 가기 꺼리는 성당이 몇 개 있는데 그중 1번이 감곡이에요.

왜? 너무 드세요.

오래된 성당이라 동네 사오십 프로가 천주교 신자예요.

신자들 가운데 집안에 신부 수녀 없는 사람이 없어요.

이론적으로 따지면 자기 아들을 생각해서 본당 신부님에게 더 잘 해야 하는 데 그 반대에요.

‘내 아들이 신부인데, 내 아들보다 한참 어리면서.’

‘내 딸이 둘이나 수녀인데’

그러니까 신부 수녀들이 사목하기가 힘든 곳 일번이 감곡이었죠.

그런데다가 전임 신부님이 벌린 일로 성당은 반으로 쪼개져 버려, 그것을 수습하러 간 것이죠.

첫 미사 강론 때 이런 말을 했어요.

‘감곡은 나무로 따지면 고목이다. 고목에서 꽃이 피면 사람들이 얼마나 이쁘다고 얘기하겠느냐마는,

고목에서 꽃이 안 피면 도끼 맞는다. 불쏘시개뿐이 안 된다. 여러분들 꽃 피우게 하려고 내가 왔으니까 잘 따르십시오.’

5년 동안 있으면서 감곡 신자들은 다 뒤바뀌었어요.

30억이 넘는 빚을 8개월 4일 만에 갚아줬거든요.

기적이 일어났고 그래서 성모님의 성지까지 선포가 됐죠.

지금은 역사만 있는 성당, 신부 수녀만 많이 나온 성당이 아니라 신자들 하나하나가 신앙으로 똘똘 뭉쳐 있는 성당으로 바뀌었어요.

그래서 내가 떠난 후 우리 교구 신부님들은 오고 싶어 하는 성당으로 바뀌었죠.

 

오늘 독서에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돌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들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세례받은 지 오래됐다고 해서 유대인의 혈통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의 증표가 아니라는 얘기죠.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해요. 변화가 되어야 해요.

 

오늘 1독서에서 다윗의 아버지가 뭐라고 했다고요?

‘내 후손 가운데 그분이 나타나면 세상을 바꿀 것이다.’

어떻게? 사자랑 염소가 놀게 할 것이고 인간의 악습 본능 모든 가치관이 뒤바뀔 것이다.

우리 신약의 백성들은 그 예수님의 시대에 살고 있죠.

그런데 인간은 원죄 성향 때문에 자꾸 악해지고 어둠에 떨어져요.

그럴 때마다 하느님은 위대한 성인들을 보내서 회개시키셨죠.

 

마태오복음 24장 이하를 보면 당신이 재림할 때 어떤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지 죽 나와요.

루카 복음에도 나오고요.

지금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에서도 어떤 말이 나옵니까?

‘인간들 벌 받지,’

사자가 염소와 함께 사는 세상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을 때려죽이는 세상이고, 자식이 부모를 때리는 세상으로 됐어요.

온전한 국민 회개가 이루어지기 전에 다시 악으로 빠지고 있죠.

 

회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내가 집어주고 넘어가겠습니다.

회계라고 하는 단어가 있고 후회라고 하는 단어가 있어요.

후회와 회개는 무엇이 차이일까요?

후회는 자기중심적인 것회개는 하느님 중심적입니다.

 

후회는 죄를 지은 자신이 미운 거죠하느님 마음을 생각하지도 않아요.

‘등신아 너 똑같은 죄 또 떨어졌냐?’ 찝찝하니까 성사 보러 들어가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인간이 누구였어요?

후회하다 결국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 유다스죠.

유다스는 예수님을 팔아먹을 때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했죠.

‘저분은 팔아넘겨도 살아서 우리 앞에 나타날 분이야.’

그런데 자기 계획대로 안 됐어.

도살장에 끌려간 어린 양처럼 매를 맞고 침 뱉음을 당하면서도 그냥 끌려가.

언제쯤 한번 뭐 보여주실 것 같은데 왜 안 보여주지?

십자가상에 매달려서 돌아가시면서도 능력을 안 보여요.

유다스는 ‘아닌데, 내 계획은 저게 아닌데.’

그리고 유다스가 성모님과 다른 제자들이 모여 있는 다락방으로 안 갔죠.

아마 다락방에 갔으면 다른 제자들은 몽둥이를 들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누가 막았겠습니까?

성모님이 끌어안으면서 ‘이놈들아 너희들은 잘한 게 뭐 있어? 다 도망갔었잖아. 똑같아.’

유다스는 구원받고 안 받고까지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했어요.

‘나 같은 놈은 구원 못 받아’ 하면서 내가 선택할 길은 스스로 목숨 끊는 것밖에 없다 합니다.

이것이 후회예요.

그래서 후회는 계속 반복이 돼요.

고백소에서 보면 열 명 가운데 아홉 명의 신자들은 거의 후회만 하다 나가.

그런 사람들은 하루도 안 되어 같은 죄에 또 떨어져요.

 

그런데 회개는 뭐라고 했죠하느님 중심이야.

내가 그렇게 함부로 입을 놀렸을 때 내 안에 계신 성령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을까?

내가 냉담했던 동안 성모님이 얼마나 피눈물 흘리셨을까?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옛날에 신자들은요 고백소에 들어와서 이렇게 말했어요.

‘예수 성심을 거슬러 제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나이다.’

‘성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제가 이러한 죄를 지었나이다.’

그렇게 고백하는 신자는 사제 생활 40년 하면서 딱 한 사람 봤어요.

나머지는 다 그냥 주일 몇 번 빠졌습니다.

그냥 찝찝하니까, 성체는 영해야겠고, 그냥 더러운 것 빨리 닦으러 온 거죠.

여러분들이 앞으로 성사 보실 때, 또 이 방송을 듣는 여러분들, 이제 대림 판공성사 보셔야지요?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성사 보세요.

신부님 제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어서 예수님의 성심을 아프게 했습니다.’

내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어서 내 안에 계신 성령을 슬프게 해드렸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지 몰라요.

그것이 회개입니다.

후회는 의지가 약해 죄에 떨어진 자신만 자꾸 향하고 있는 거예요.

하느님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는 헤아린 적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죄지었을 때 하느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는가?

내 양심이 괴로운 것만 생각했지, 내 양심 괴로운 것보다 백 배로 더 하느님 마음이 아팠던 것을 한 번도 우리는 느껴본 적 없어요.

내가 눈물일 때 그분은 피눈물 흘리고 있는 것 그거 느끼면서 성사 본 적 있냐 이거예요.

이번 판공 때는 그런 마음으로 성사 보세요.

그것이 참다운 의미의 회개예요.

이번에도 또 지난번처럼 후회만 하고 나오지 말고 제대로 된 성사를 보시라 이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성사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해요.

적어 가세요. 그 안에 들어가면 다 잃어버려요.

적어 가서 읽으세요. 그게 오히려 나아요.

그냥 우물쭈물, 뭔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 하게 하지 말고.

그리고 아무리 부끄러운 거라 하더라도 고백하세요.

두리뭉실 넘어가지 마세요.

또 많은 신자가 어떤 표현을 쓰냐, ‘신부님 무슨 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진 거 같다니, 졌다는 거야 아니면 안 졌다는 거야?

확실하게 ‘몇 번 도둑질했습니다.’ 해야지, ‘도둑질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자기 죄를 미화시키려는 어둠이에요.

고백소 안에서는 정직해야 해요.

고백소 안에는 사제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같이 서 계셔요.

예수님이 직접 우리 귀에다 대고 얘기를 못 해서,

신부의 입을 빌려서 성부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너 아무개, 너 죄를 사하노라.’ 하고 감각적으로 들려주시는 거죠.

예수님 앞에 우리가 못 할 말은 어디 있어요.

아무리 내 죄가 진홍색처럼 붉어도 정직하고 솔직하게 고백하면

그리고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을 정말 회개하면 이 세상에 용서 못 받을 죄는 없다.

이것은 우리 교리예요.

개신교 신자들은 꿈도 꿔보지 못할, 예수님이 직접 만들어 주신 제도가 우리에겐 있죠.

1년에 한두 번 성사 보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아요.

그건 부족해요.

신부인 나도 한 달에 한 번 수도회 신부 찾아가서 성사 봐요.

고백성사는 훈련해야 해요.

저는 신학교 때부터 손바닥만 한 영적 노트를 항상 가지고 다녀요.

오늘 이것 때문에 내가 오늘 종일 힘들었다, 적어요.

그다음 날은 그것이 똑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겠죠.

성사 보기 바로 전날 그 30장을 넘겨보면서 횟수가 제일 많은 것이 성사 거리 1번, 내가 성찰해야 할 1번이라는 얘기예요.

 

냉담자 소리 듣기 싫으니까 판공 성사표 나오니 그냥 들어갔다 나오는 것, 그것이 성사입니까?

후회하지 말고 회개하세요.

오늘 세례자 요한이 외치는 건 후회하라고 외치는 게 아니라 회개하라고 외치는 거예요.

젊은 대학생들한테 회개가 뭐냐 하니 어떤 녀석이 우스갯소리로 회 먹고 다음 달 개 먹는 거래요.

대림절은 변화되는 시기라는 것 명심하도록 합시다.

 

2022년 대림 제2주일 (12/04)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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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2.12.22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아스피린 | 작성시간 22.12.22 지은죄 메모 해서 성사 보겠습니다~아멘~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2.12.23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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