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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 신부 강론

요한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작성자하늘호수♡마리아|작성시간22.12.25|조회수234 목록 댓글 4

◼마태오 11,2-11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대림 제3주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저는 미사 후 제주 피정 특강을 위해 떠납니다.
혹시 녹음을 할 수 있다면 녹음해서 유튜브에 올리겠습니다.
 
오늘 복음 잠깐 묵상할까요.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 갇힌 이유는 아시죠?
헤로데가 자기 동생의 부인 즉, 제수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웅성웅성했지만,
서슬이 시퍼렇기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아주 강하게 비난을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세례자 요한은 이제 감옥에 갇히게 된 겁니다.
세례자 요한은 알다시피 낙타 털옷을 걸치고 들꿀을 먹으면서 광야에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벽도 없고 담도 없고 천장도 없고, 해만 지면 쏟아지는 그 별을 바라보고,
요르단강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자연인처럼 살던 그런 사람에게
그야말로 사방 몇 자 안 되는 좁디좁은 지하 감방에서 아마 요한은 태어나서 큰 고통을 당하고 있을 겁니다.
세례자 요한이 나중에 목이 잘리지만, 목이 잘리는 건 한순간입니다.
더 큰 고통은 그 감옥에서 하루하루를 지내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들었을 겁니다.
분명히 폐쇄 공포증이 올 정도로 힘들었을 겁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힘들어서 조바심이 난 세례자 요한에게
자기의 여섯 달 뒤에 세상에 나온 예수가 하는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냅니다.
보내서 확인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 제자들을 통해서 세례자 요한이 물은 이 질문은 사실은 좀 황당한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요르단강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비둘기 형상으로 내리는 것을 봤고,
또 세례자 요한 자신의 입으로
‘나는 이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고 이분은 갈수록 커져야 하고 나는 갈수록 작아져야 한다’라는
예수님의 메시아 선언을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분명히 했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자 요한이 얼마나 감옥 생활이 괴롭고 힘들었으면 엉뚱한 질문을 예수님에게 합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입장을 왜 모르겠습니까?
혈육으로는 그래도 형 아닙니까?
‘얼마나 힘들고 외로울까, 오죽하면 이런 얘기를 나한테 할까?’
그렇지만 예수님은 혈육으로서가 아니라 당신의 신성으로써 당신의 신성이 어떻게 드러났던가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지요.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져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그러면서 6절에 ‘나에게 의심하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하십니다.
요한의 이 의심에 예수님은 좀 슬픔이었을 겁니다.
그러면서 세례자 요한을 예수님은 마음껏 들어 올려 주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또 바로 세례자 요한을 추락시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다시 말하면 이것이 바로 구약의 인간과 신약 인간의 차이라는 얘기입니다.
 
구약은 신약을 준비하는 겁니다.
구약 안에 신약이 숨어져 있고, 신약을 통해서 구약은 꽃을 피우는 겁니다.
세례자 요한까지가 바로 구약이고,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에 있었던 어떤 예언자들보다 훨씬 더 크고 위대하지만,
신약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는 크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오늘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에 다
시 한번 세례자 요한의 위치와 예수님과의 차이점을 좀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요한은 자기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고 그분의 신발 끈을 풀기도 어려운 처지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그렇게 고백했던 내적인 근거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예수님과 자기 자신과 엄청난 차이점 때문이었습니다.
첫 번째 차이가 뭐냐, 물세례와 성령 세례의 차이입니다.
나는 물세례를 줬지만 내 앞에 계신 이분은 성령 세례를 베푸실 뿐이다.
요한의 물세례는 상징적인 것이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보다는 새로운 생활로 나아가기 위한 상징적인 의식이었죠.
사람의 잘못을 지적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세례가 아니었던 겁니다.
상징적인 의식이였죠. 예수님을 준비시키는 세례였던 겁니다.
구약은 물세례로 끝이 나지만 신약은 물세례와 성령 세례가 같이 합쳐집니다.
예수님의 성령 세대는 인간을 개조시키고 영원을 개조시킵니다.
죄와 벌과 원죄의 사함을 받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성령 세례는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끊임없이 진화되고 있고, 성사 생활을 통해서, 용서의 삶을 통해서 끊임없이 진행돼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엄청난 차이의 첫 번째 점입니다.
 
두 번째 차이는 길을 예비하는 자와 행차하시는 왕의 차이점과 같습니다.
대통령이 어디를 방문할 때 미리 점검하는 비서라든지, 또 국민들과 대담회를 할 때는 많은 사람이 준비하고 리허설을 합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은 왕의 준비를 돕는, 미리 앞에 나가서 왕이 편안하게 국정을 돌볼 수 있게 준비하는 역할이었습니다.
 
세 번째 차이점은 구약의 세례는 사람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지만, 변화시킬 수 없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보면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거울 앞에 서면 얼굴에 뭐가 묻은 것, 옷매무새가 흩어진 것이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 거울이 나한테 다가와서 얼굴에 묻은 그 더러움을 닦아주질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이라고 하는 것, 구약의 세례라고 하는 것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줄 뿐이라는 겁니다.
요한은 어쩌면 참다운 의미의 율법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3절에서 6절에 보면 ‘당신들은 세례를 받았습니까?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까?
요한은 죄를 회개한 표시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뒤에 오는 예수를 믿으라고 사람들에 가르쳤던 겁니다.’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바오로가 손을 얹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상한 언어로 말을 하고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고 나옵니다.
 
겸손과 사명에 대한 확신은 주제 파악을 할 때 생겨나지요.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본인 자신과의 차이점을 분명히 알고서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다한 남자 중의 남자가 세례자 요한이었던 겁니다.
이렇게 본인과 예수님의 차이점을 분명히 알고, 그분이 메시아였다는 걸 분명히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복음에서 얼마나 그 감옥 생활이 힘이 들었는지 예수님에게 마음 아픈 얘기를 질문을 던졌던 겁니다.
‘정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맞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딴 사람을 또 기다려야 됩니까?’
정신이 나간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만 오늘 예수님은 ‘여인들의 몸에서 난 사람 가운데 이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다.’라면서
세례자 요한을 들어 올려 주셨던 이유는 분명히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외모상으로는 거칠고 깨끗한 것 같지 않았지만,
백성들의 완악한 마음을 회개로 촉구하는 일에는 분명한 확신을 하고 있었습니다.
왕의 행실을 꾸짖습니다. 결국에는 그것 때문에 죽었습니다.
선과 악을 분별하는 모습을 정확히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에게 악과의 타협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시대는 악이 선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독성 죄가 만연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세례자 요한이 그렇게 위대했던 두 번째 이유는 그분은 메시아를 증거했고 전파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명은 뭐라고 그랬습니까?
말씀을 증거하며 진실하게 살아가는 겁니다.
 
세 번째로 세례자 요한의 위대한 점은 그의 입에서 나온 말 때문입니다.
이 말이 역시 우리들의 신앙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많은 단체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예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줍니다.
그러나 그런 단체들 가운데 어떤 단체들은 변질이 됩니다.
예수님은 점점 작아져서 예수님은 찾아볼 길이 없고 인간이 예수님을 대신합니다.
그래서 교주가 생기고, 사람을 우상 숭배하게 됩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교만한 마음이 들 때마다 우리가 수십 번 내 귀에 들리도록 우리의 입으로 외쳐야 할 중요한 말입니다.
 
네 번째로 세례자 요한이 위대한 것은 공적으로는 백성들과 예수님의 만남을 준비시킨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냉담하는 남편과 예수님을 만나게 준비시켜야 합니다.
냉담 중인 사람과 예수님을 만나게 우리들이 얼마나 노력을 하고 살았는가.
내 가족들 가운데 냉담자들이 있지요? 분명히 있을 겁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적으로는 자신을 기꺼이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겸손을 보였다는 것이
정말 위대합니다.
우리도 나 자신의 죄악과 연약성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그분 발 앞에 내려놓고 낮아지는 모습으로 변해가야 할 겁니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우리들이 배우는 교훈이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갈수록 커지셔야 하고 김웅열 신부는 갈수록 작아져야 합니다.’
아멘
여러분들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2022년 대림 제3주일 (12/11)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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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리스트
  • 작성자창수선화 | 작성시간 22.12.26 아멘!감사합니다 ~❤
  • 작성자요셉-막내165 | 작성시간 22.12.26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2.12.26 아멘 신부님 하늘호수님 고맙습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2.12.26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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