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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 신부 강론

율법을 어기면서 율법을 완성하라니/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작성자하늘호수♡마리아|작성시간23.02.27|조회수128 목록 댓글 3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어제는 고령에 있는 성령 센터에서 한 천여 분의 신자들, 물론 대구 사람들만 온 건 아닌 것 같고,
부산 쪽에서도 왔고 서울 쪽에서도 내려가신 분들, 그리고 해외에서 오신 분들에게 강의했어요.
성당은 600명밖에 못 들어가기 때문에, 세 군데로 나누어서 스크린을 설치해서 들었죠.
날도 따뜻하고 잘 끝났는데, 어제 좀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어요.
그곳 전담 신부님이 저를 소개하시는데 아주 히트를 쳤어요.
자기는 어제 밤새 기도를 했대요.
그래서 ‘피정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나 보군’ 그렇게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다음 말이 완전 반전.
본인은 내일 오시는 신부님이 자기보다 못생긴 신부님이 오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대요.
다 빵 터졌겠죠.
그러면서 오늘 보니까 자기 기도를 안 들어주어 속상하대요.
그다음 말이 ‘어젯밤에 자기 기도는 안 들어주셨지만, 오늘 여러분들의 기도는 들어줄 겁니다.’
이렇게 아주 위트있게 소개해줬어요.
그런데 제가 더 감동한 것은 전담 신부님과 도와주러 오신 동창 신부님께서 내가 강의를 시작하려니 제대 뒤에 앉으시더군요.
십 분 이십분 듣다 뒷문으로 나가겠지 했는데, 온종일 오전, 오후 두 시간씩을 꼬박 들으시는 거예요.
사실 신부가 신부 강의 듣는 건 힘든 거예요.
저는 앞을 보고 있어 그 신부님들 얼굴을 못 보았지만,
내 바짝 뒤에서 네 시간 반 동안을 그렇게 열심히 듣는 것만으로도 신자들은 매우 많은 은혜를 받으리라 생각했어요.
아무튼 어제는 굉장히 뜨거웠어요.
저도 서운동 은총의 밤 끊어지고 나서 3년 만에 처음으로 성가 5곡을 불렀어요.
제가 녹음은 못 했지만, 아마 거기서 녹음한 것을 받으면 유튜브에 올릴 수 있을 거예요.
 
오늘 제가 짧은 복음 했지만, 긴 복음에는 여러 가지 얘기가 더 나와요.
긴 복음 앞부분에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세요.
그런데 이 얘기를 들으면 우리 신자들은 헷갈리는 거예요.
왜? 예수님은 율법과 싸웠거든요.
안식일에 손 씻지 않고 밥 먹다가 혼나고, 아무튼 사사건건 율법에 있는 것을 거슬렀어요.
그랬던 양반이 이 모순된 말씀을 왜 하시냐 이거예요.
본인은 율법을 안 지켜놓고선 오늘은 율법은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는다니 이것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
우리가 들을 때는 모순된 얘기지만 예수님은 절대로 모순된 얘기 하신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생각하신 율법은 사랑의 계명이에요.
율법 학자들이 거미줄처럼 만들어 놓은 그런 엉터리 인간의 계명이 아니라 사랑의 계명.
사랑의 계명의 근간은 뭡니까? 십계명이에요.
십계명은 단 두 단어로 요약이 된다고 그랬죠? 흠숭과 존중
1계명부터 3계명까지는 하느님께 대한 흠숭, 그 이후는 인간들끼리의 상호 존중이죠.
그리고 이 흠숭과 존중은 천국 오는 지름길이에요.
십계명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알려준 사랑의 계명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사랑의 계명이 수천 년 지나면서 사람을 얽어매는 그야말로 형식적인 계명으로 바뀌었죠.
예수님 시대 때만 해도 십계명이 613가지로 늘어났어요.
또 거기에 세칙이 2만 개가 넘어 사람이 법의 영역에서 꼼짝달싹 못 해요.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법이 많은 나라가 복지국가입니까, 아니면 법이 없어도 잘 사는 나라가 복지국가입니까?
또 다른 말로 각자가 내 안에 법이 많은 사람이 행복할까요, 아니면 법이 없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일까요.
법이 많은 사람일수록 피곤한 인생이죠.
모세는 분명히 10가지 계명밖에 안 받았단 말이에요.
예수님이 얘기하시는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으리라는 율법은 율법 학자들이 얘기하는 법이 아니라,
모세가 야훼 하느님으로 받은 그 사랑의 계명을 의미합니다.
 
오늘 긴 복음에는 그 사랑의 계명, 사랑의 법에 관한 얘기가 쫙 나와요.
첫 번째, 사랑의 법을 추구하는 데 첫 번째 걸림돌이 오늘 복음에 뭐라고 나오는 줄 압니까? 화내는 것이라고 했어요.
화내는 것을 죄가 아닌 걸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얼굴이 늘 화가 나 있고 화를 부리지 않고 넘어간 날이 없는 사람은 영성적으로 인성적으로 굉장히 위험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우리 한국 영성 신학에서는 순교는 화내는 것을 참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출애굽기 20장 13절에 ‘살인하는 자는 재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도 재판을 받아야 한다.’ 하고 나와요.
이 말은 뭐냐? 살인죄와 화내는 죄를 동일시 한 거죠.
왜? 그 살인죄의 시작을 보면 화내는 것부터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화내는 것을 억제하지 못하고, 참지 못하고 나중엔 칼을 들고 찔러 죽이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는 분노하는 죄와 살인죄는 같은 거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화가 날 때는 이 얘기를 딱 명심하시면서 화를 중지시키셔야 해요.
‘신부님이 화내는 죄와 살인죄가 똑같다고 하셨어. 성경에 나와.’
 
이 분노, 화는 조금 구분해야 해요.
그리스어에 보면 분노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여러분들 짚단 태우면 어때요? 불붙이면 그냥 다 순식간에 재가 되죠.
이렇게 짚단을 태우듯 순식간에 타올랐다가 사라지는 분노가 있어요.
그런데 이런 화는 상대편을 당황하게 만들어요.
얘기 잘하다가 갑자기 성질을 팍 내는 거야. 그럼 상대편을 깜짝 놀라죠.
그런데 또 이런 사람들은 상대는 당황하게 하지만 뒤끝이 없어요.
이런 경우는 본인은 시원하지만 다른 사람한테는 상처를 주는 화예요.
물불 안 가리고 그냥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거죠.
막 소리 지르고 아이고 속다 시원하네.
하지만 그 옆에 있던 사람들은 황당한 거예요.
왜 우리가 저 소리를 들어야 하지?
이렇게 혼자만 휙 해버리고서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그런 화가 있어요.
 
두 번째 화는 뭐냐? 마음에 꼭 품고 있는 화가 있어요.
그 화에 대해서 입으로 한 번도 내비친 적도 없고 눈으로도 표시한 적 없어요.
하지만 그 속에 뱀이 꽈리를 틀고 있듯이 화가 꽈리를 틀고 있어요.
잊지 않고 있는 화, 화해를 거절하는 화, 언젠가는 때가 되면 복수하려고 벼르는 화.
이게 사실은 무섭다는 거죠.
 
여러분은 어느 쪽 화를 내세요?
두 번째? 그냥 어지간하면 속으로 삭이고, 그럼 병이 돼요.
그럴 때는 바닷가에라도 가든 노래방이라도 가서 소리를 지르고 울든지 뭔가 해결해야 해요.
 
나는 어느 쪽일 것 같아요?
나는 둘 다 같아요.
사실 일을 하면서 화날 일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근데 그거 다 화를 못 내고 살죠.
화를 내더라도 격노하고 눈을 부라리는 화를 내본 적은 없고.
목소리 톤이 좀 달라지겠죠.
그리고 또 어떤 화는 두 번째 화처럼 그냥 내가 끌어안고 살아야 할 화도 있어요.
잃어버렸다 싶으면 또 기억나고 그런 사람 있잖아요.
난 두 개가 다예요.
 
그런데 첫 번째 것도 나쁜 것이지만, 두 번째 것이 훨씬 더 안 좋아요.
왜? 자신을 파괴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인간관계를 깨트려요.
그래서 예수님이 경계하시는 화는 두 번째 것.
물론 첫 번째 것도 자기는 시원하고 남을 불편하게 하기에 분명 좋은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두 번째 화는 복수하려고 하는 화이기 때문에 더 경계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몇 배로 갚아주려고 하는 분노는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포기하고 기도해야 해요.
포기하는 건 좋은 거예요.
속에서 불이 끓어도 ‘주님 이걸 삭여주십시오. 이 더러운 화 속에서 주님께서 성령의 꽃을 피워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면서 화 속에서 정말 영적으로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그걸 주님이 원하시는 거죠.
그런데 그걸 쌓아두면 언젠가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여자들은 쌓아두는 천성이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아기를 낳아봤기 때문에 창고가 커요.
그래서 남편이랑 싸우고 세월이 한 15년 지났어도 뭘 하다가 또 그 얘기를 또 꺼내요.
그러면 남편은 돌아버리는 거죠.
‘아니 도대체 언제 적 얘긴데 아직도 신혼 때 것을 기억하고 있나?’
끌어안고 살지 말고 30년 지났으니 이제 화내는 유효 시간 다 지났어.
 
그래서 사랑의 법을 추구하는데 첫 번째 걸림돌이 뭐라고요? 화내는 것이다.
화는 두 종류고 둘 다 안 하면 더 좋지요.
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화를 안 내고 살아요.
예수님도 화내셨죠.
그러니 여러분이 화낼 때 ‘예수님도 내셨는데 왜 나도 못 내’ 하며 위로받으시란 말이에요.
하지만 예수님의 화는 의노셨죠.
자기중심적인 화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을 얽매이려고 하는 제도, 사상, 그런 조직에 대항하는 의로운 화였어요.
그렇지만 우리들이 내는 화는 뭔가 손해 안 보려고, 뭔가 내가 자존심 상했다고 생각하는 자기중심적인 화죠.
화의 차원이 달라요.
그분이 냈던 의노를 우리 화랑 비교해서는 사실 안 돼요.
아무튼 그래도 우리는 화를 내야 할 때 내야 해요. 의노를 보여야죠.
현대인들은 비겁해졌지 않습니까?
의노를 보여야 할 때는 그냥 숨어요.
누가 길에서 맞아도 그냥 가요.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지.’
‘도둑이야’ 하고 소리 질러도 안 오잖아.
‘불났어요.’ 그래야 자기 집 불탈까 봐 물 주전자 가지고 나와요.
 
사랑의 법을 추구하는 데 두 번째 걸림돌을 오늘 복음에서는 멸시의 죄라고 나옵니다.
자기 형제에게 미친놈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어떻고, 중앙 법정에 어떻고 나오죠.
멸시의 죄만큼 비크리스천적인 태도가 없어요.
멸시는 대개 네 종류에서 나와요.
첫째, 자기 가문에 대한 교만에서 나와요.
‘우리 집이 금수저야. 우리 집이 얼마나 스펙이 좋은 줄 알아?’
가문에 대한 교만에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게 돼요.
두 번째는 지위라든지 소유한 금전에 대한 교만에서 나와요.
‘내 위치가 어딘데 감히 네가 나를 넘봐? 나랑 맞먹으려고? 내가 돈이 얼마나 많은데.’
세 번째 멸시는 자기가 이룬 업적에 대한 교만에서 나와요.
 
제가 여러분들한테 한 번 떠난 곳은 가질 않는다고 말씀드렸죠.
배티도 안 가고 감곡도 코 앞이지만 안 가요.
안 가는 여러 가지 이유가 많아요.
전통적으로 신부님들은 자기가 사목하던 곳을 안 찾아가요.
왜? 거기 신부님 사목하시는 데 방해가 될까.
내가 안 가는 두 번째 이유는 내가 고생해서 만들어 놓은 눈에 보이는 업적이 망가지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예요.
더 잘 보존되고 아름답게 되면 좋지만, 가끔은 ‘그래 저것도 내 것도 아니고,
후임 신부가 주교님이랑 상의해서 어떻게 뜯어고치든 내가 화낼 이유가 없지. 차라리 안 보는 게 낫겠다.’ 합니다.
사람은 잘못하면 자기가 이룬 업적에 노예가 되어 헤어나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거 손대면 죽어! 그거 내가 만들어 놓은 거야.’
 
네 번째 멸시의 죄는 자기는 의인이라고 하는 착각에서 나옵니다.
한 가지 더 든다면 지적 교만.
지적 교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멸시가 사실은 앞서 얘기한 네 가지보다도 제일 고치기가 힘들어요.
파스칼은 ‘동굴의 우상’이라고 이렇게 표현도 했었죠.
 
이런 것들이 바로 멸시의 죄의 내용이에요.
그래서 이런 멸시의 죄를 갖고 있을 때는 절대로 하느님 사랑의 법을 추구하는데 발자국을 못 내디딘다 이거예요.
 
오늘 복음에 사람은 외면적인 행위에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생각도 심판을 받는다고 나와요.
누굴 보고 음란한 생각을 가지면 그것은 간음한 것이라고 합니다.
생각도 중요한 것이에요.
 
그리고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은 ‘화해하라’로 끝납니다.
‘인간관계가 바르지 못하면 하느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될 수 없다.’ 제가 수도 없이 한 얘기예요.
인간관계가 삐뚤어져 있는데 하느님 관계를 바르게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예요.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과 나 사이에 큰 벽이 있고 내 기도가 효과가 없는 거 같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장애물이 생긴 것 보여요.
그 장애물은 내가 이웃과 화목하지 못했을 때 생겨요.
내가 내 가족들을 사랑하지 못할 때, 그리고 이웃에게 나쁜 짓을 행했을 때 자동적으로 셔터가 내려와요.
‘하느님이 왜 내 기도 안 들어 주시지? 하느님 얼굴 좀 보여주세요’ 하고 하느님 원망할 게 아니라 내 주변을 뒤돌아봐야죠.
뒤돌아보니까 세상에, 지금 남편과 말 안 한 지가 벌써 보름째야.
그 상태로 무슨 기도가 되냐 이거죠.
성당에서 레지오하는 자매랑 밥 먹다가 싸워서 레지오 가서도 얼굴도 안 쳐다봐.
성체 영할 때마다 미안해 죽겠지만 또 성사 볼 용기도 없고, 그런 상태에서 묵주 기도가 되겠습니까?
결국 하느님과 나 사이의 장애물은 하느님 쪽에서 쳐놓은 것이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가 부서질 때 저절로 그 셔터은 내려와요.
 
오늘 강론을 요약하면 이겁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
율법 학자들이 만드는 법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느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첫째 화내지 말아야 하고, 두 번째 함부로 멸시하지 말아야 하고, 세 번째 어떤 일이 있어도 화해하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 사랑의 계명, 그 마지막 열매인 ‘원수까지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정(情)의 사랑이 아니라 의지의 사랑입니다.
나한테 해코지한 놈을 어떻게 사랑해요?
그러니 의지의 사랑이라고 그래요
 
화에 대한 성경을 내가 한두 가지만 찾아보았어요.
야고보서 1장 20절, ‘화를 내는 사람은 하느님의 정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콜로새서 3장 8절, ‘지금은 분노와 격분과 악의와 비방과 또 입에서 나오는 수치스러운 말 따위는 모두 버려야 합니다.’
 
고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세네카라는 분노를 ‘단기간의 광기’라고 했어요.
어떨 때 사람들 화내는 거 보면 무섭죠?
사람 얼굴이 바뀌고 그 앞에 있으면 공포를 느껴요.
그래서 아까 화를 출애굽기에서는 살인죄와 동일시 했지요.
사람 앞에서 화내고 소리 지르면 상대방은 죽음을 느껴요
 
오늘 복음 해설 다 이해가 되셨죠?
첫 번째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려면 화내선 안 된다.
두 번째는 멸시의 내용을 설명했어요.
지적인 멸시, 가문의 멸시, 금전적인 멸시, 내가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멸시. 그런 것들 갖고 사람들 깔보지 말라 이거에요.
그리고 세 번째는 화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힘을 갖고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에너지가 충전된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한순간에 되는 것이 아니에요.
단계가 있고 훈련을 해야지요.
 
그러니 오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모순된 말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율법 어겨놓으시고 맨날 율법 학자와 싸우시더니 율법의 일점일획도 안 없어진다고 하신 것이 전혀 모순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십계명을 주셨을 때 그때의 초심으로 돌아가라.
십계명의 정신은 일점일획도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이 뜻이에요.
아멘.
 
♣2023년 연중 제6주일 (2/12)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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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02.27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창수선화 | 작성시간 23.02.28 아멘!감사합니다 ~❤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3.02.28 아멘~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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