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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 신부 강론

원수를 사랑하라니! 말이 되는 소리여?/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작성자하늘호수♡마리아|작성시간23.03.13|조회수231 목록 댓글 3

◼마태오 5,38~48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 셋째 주는 원래 교우 없이 혼자 새벽 미사를 드리는 주간인데, 오늘은 청주 서운동성당 ‘마르타회’ 회원들이 오셨어요.

제가 설명하면 ‘아, 그분들이구나’ 하고 바로 알아들으실 거예요.

매월 첫 토요일 은총의 밤 시작하기 전에 교육관 지하에 내려가서 식사하셨을 겁니다.

아마 맛있게들 드셨을 거예요.

그때 그 식사 준비를 하셨던 회 이름이 ‘마르타회’입니다.

은총의 밤에 오셨던 분들도 큰 도움을 받은 것이죠.

또 그야말로 마리아와 마르타처럼 묵묵히 일하면서, 남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1년에 500씩인가를 가지고 왔어요.

그때 한 끼에 6천 원씩을 받으면서 내가 지시한 것이 ‘이윤 남길 생각 말고 풍족하게 드시게 해라’였는데,

살림을 아주 잘하신 거죠.

늘 하는 말이지만 불러주셔야 올 수 있는 거룩한 장소이고, 주실 것이 있기에 부르셨음을 명심하면서 이곳에 머무릅시다.

 

오늘 복음에는 우리들이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나오죠.

‘원수를 사랑하라.’

이것이 가능한 것인가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원수가 아니래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냥 보기만 하면 아주 그냥 속이 뒤집혀요.

원수가 아닌데도 사랑을 못 하는데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시니, 참!

그럼 여러분, 주변에 원수 사랑하는 사람 본 적 있습니까?

천주교 신자든 불교 신자든 아무튼 주변에 없죠.

그러면 예수님이 말도 안 되는 불가능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왜 하셨을까요?

이런 사랑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하죠.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은 실제로 십자가에서 옆구리 쑤시는 사람 용서했잖아요.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짓이 뭔지 모릅니다.’ 용서했잖아요.

예수님은 확실히 원수를 사랑하신 것 같아요.

그러면 그분을 따르겠다는 우리 또한 자신의 원수를 사랑한 적이 있는가?

저는 솔직히 뒤돌아보면 성당 지으면서 사기도 많이 당하고 많은 상처도 받았거든요.

그런데 원수까지는 아니지만, 용서는 했어요. 그런데 사랑까지는 아직 못했어요.

 

에로스적인 사랑은 ‘내가 너 사랑할 테니까 나도 너도 나 사랑해줘’ 이거예요.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죠.

보통 우리 인간적인 사랑이에요.

그런데 ‘난 주기만 하고 눈곱만큼도 기대한 적이 없다.’

이런 사랑 해보신 적 있으세요?

제가 피정 때 이야기하죠.

‘내가 다섯을 주면서 다섯이 되돌아오리라고 기대도 안 해.

그렇지만 저게 인간이라면 나한테 둘은 되돌려주겠지?’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둘도 안 돌아올 때가 많아요.

그럴 때 내 마음속에 무슨 씨앗이 뿌려진다고 그랬죠?

서운한 씨앗.

그런데 그 씨앗은 물 안 주고 비료 안 줘도 잘 자라요.

그 서운한 씨앗에서 미움의 싹이 비집고 올라오고,

미움의 싹에서 또 줄기가 올라오는데 그 줄기가 분노의 줄기죠.

그 줄기에 무슨 열매가 맺는데 그 열매 이름이 뭐라고 그랬어요?

무관심.

 

한집에 살아도 그냥 돌덩어리랑 똑같아요.

이 무관심이라고 하는 말은 성서에서 보면 영적 살인을 의미합니다.

한집에 있어도 각방 쓴 지 오래고, 밥도 같이 안 먹은 지 이미 오래예요.

한 공간에서 숨 쉬는 것조차도 싫대요.

담배 피우러 나간다고 하지만, 내막은 싫으니까 나가는 거예요.

이렇게 살을 섞고 살던 부부도 원수가 되는데, 주기만 하고 받을 생각을 안 하고 주는 사람이 있을까요?

여러분 앞에 있는 나 김 신부는 교우들에게 그렇게 살았어요.

성지를 살며 그 많은 일을 하면서도 교우들한테 눈곱만큼도 바란 적 없어요.

그렇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복대동에서 사목할 때 일이에요.

처음에는 내가 이만큼 열심히 사목하면 신자들도 따라와 주겠지 했는데 안 따라와.

내 기대만큼 못 미쳤어요. 그리고 나 혼자 상처받았다고 생각했지요.

‘아니 이렇게 훌륭한 신부 있을 때 열심히 따라와야지’ 혼자 착각하고 살았던 거죠.

복대동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신자들을 데리고 등산 다녔어요.

한 번은 잘 못 보던 할머니가 오셨는데 평지에서도 잘 못 걷고 비탈길에서는 더 못 걸었죠.

‘저 할머니는 왜 쫓아왔지?’

저는 그 할머니를 팔짱을 끼고 땀 뻘뻘 흘리면서 정상에 올라갔죠.

음료수 먹으며 쉬면서 그 할머니 운동화 바닥을 보니, 세상에!

발가락이 나올 정도로 창이 다 닳아 반들반들했어요.

그러니까 올라갈 수가 없는 거야.

요즘에도 저런 운동화 신고 사는 사람이 다 있네, 생각하며 그 구역 반장에게 불렀죠.

그때가 90년대 초였죠.

물어보니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고 동사무소에서 배급 타 먹는데,

하루에 빵 하나 먹고 나머지 돈은 전부 꽃동네 보내고 오순절 마을 보내고 해서 운동화 사 신을 돈이 없을 거래.

그 말 들으니까 내 가슴이 찡하잖아.

다음 날 시장에 가서 할머니 등산화 하나를 사놓고 그 할머니 레지오 팀이 끝날 시간에 밖에서 기다렸어요.

할머니들이 쭉 몰려나오는데 ‘레지나 할머니 나 좀 봐요.’ 하고 부르니 모두 궁금해했죠.

벤치에 앉으시라 하고 내가 무릎 꿇고 할머니 신발을 벗겨 쓰레기통에 버리고 새로 산 등산화를 신겨드렸어요.

끈까지 매 드렸죠.

영문도 모르는 할머니에게 이제 새 신발 신고 등산가라 하니 벌벌 떨기 시작하는 거예요.

신부님이 언제 자기 신발 바닥을 보셨고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 생각도 못 했는데, ‘이게 아닙니다.’ 하시면서

고맙단 말도 못 하며 계속 떠는 거예요.

그러더니 그 등산화를 바로 벗고 쓰레기통에 버려진 운동화를 다시 가져와 신어요.

그리고 내가 준 그 등산화는 가슴에 끌어안고 울면서 집에 가셨어요.

나중에 성지에 있을 때 복대동 신자들이 순례 와서 그 할머니 등산화 신냐고 물어봤어요,

우리 신부님이 사준 신발이라고 하면서 안 신는대요.

그리고 그날 십자가 옆에다가 못을 박고 줄에 걸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꺼내서 닦는대요.

저는 그때 레지나 할머니를 보면서 깨달은 것이 ‘이렇게 무조건 주니까 좋구나!’

그다음부터는 어느 본당이나 성지에 가든 ‘사제는 그냥 주는 걸로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니 되돌아오는 것이 눈곱만큼도 없어도 별로 서운한 게 없더라 이거야

애초부터 받을 생각을 안 하고 주니깐 서운한 것도 없어. 그렇죠?

그런데 받을 생각이 내 한쪽 구석에 있으면 아무리 작더라도 안 채워지면 서운한 것이 인간이죠.

그것은 남편과 아내 사이도 마찬가지고, 자식과 부모 사이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오늘 예수님이 얘기하신 이 아가페 사랑 ‘나 무조건 주겠다. 눈곱만큼도 되돌려줄 생각하지 마라.’

그것의 제일 마지막이 뭐예요?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아까 질문했듯이 원수를 사랑해 본 적도 없고, 원수까지는 아닌 사람조차 사랑하기도 현실적으로 힘들죠.

강론을 들으면서는 ‘그래, 미워하는 사람 내가 사랑해야지’ 하지만, 실제로는 안 되죠.

그리고 주변에서도 못 봤다고 그랬죠.

그런데 저는 많이 봤어요.

 

20 몇 년 전에 청주에서 있었던 사건으로 신문에 났던 일이에요.

청주 대학에 다니던 7대 독자 아이가 학교를 나오면서 깡패와 어깨가 부딪혀 시비가 붙었죠.

조폭은 아이를 열 몇 군데 찔려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고 잡혀서 무기징역을 받았죠.

그런데 그 아이가 우리 신자였죠. 엄마도 꾸리아 단장도 하고요.

난 그때 교도소 지도 신부였는데, 그 조폭이 청주교도소로 수감 되었죠.

한 6개월 지났을까, 그 죽은 아이 엄마가 나를 찾아와서 자기 아들 죽인 살인범과 면회를 한번 하게 해달라는 거예요.

내가 만날 이유가 없지 않으냐 해도 만나겠대요.

그러면서 자기 6개월 동안 피눈물 흘리면서 기도했고 하느님의 응답을 들었대요.

그 살인범을 네 아들로 삼으라고 하느님한테 들었대요.

헛거 들은 거 아니냐고 해도 맞대요.

그래서 내가 먼저 살인범을 만나 그 이야기하니

‘그 아줌마 미쳤네. 내가 제 새끼를 어떻게 죽였는지 시체를 보고도 나를 자식으로 삼는다고요?’  하며 콧방귀도 안 뀌어.

교도소 간수들도 그 아주머니 즉시 후회할 것이라고 안된다는 것을 설득했어요.

‘너 그냥 한마디 안 해도 돼. 우리가 옆에서 지키고 있을게. 그 아줌마가 너한테 해코지 안 해. 10분만 만나.’

사정사정해서 독방에 자리를 마련했죠.

교도관 둘은 서 있고 나는 앉아 있고 그 아이가 먼저 들어오고, 자매님이 들어왔어요.

책상 양쪽에 마주 보고 앉았어요.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낼까? 초긴장 상태였죠.

그 살인범은 고개도 들지도 않고 자매를 쳐다보지도 않았죠.

그런데 그 자매가 몸을 일으켜 살인범 손을 꽉 잡으면서 한 말이 ‘너 오늘부터 내 아들이야.’

상상도 못 할 얘기를 한 거죠.

그 말 한마디에 이 아이가 무너졌어요. 펑펑 우는 거지.

그 자리에 있던 교도관들도 다 울고, 난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그래서 정말 엄마와 자식 사이가 됐어요.

자매는 정말 지극 정성으로 옥바라지를 했죠.

겨울이면 털실로 양말도 떠서 주었죠.

그래서 이 아이가 모범수가 되어 11년 만에 그 당시 주교님이 보증으로 가석방이 되었어요.

청주가 그 당시에 좁으니 별의별 소문이 막 났죠.

그래서 청주를 떠 전주로 가서 슈퍼마켓 하면서 지금껏 잘 살아요.

결혼도 해서 손주들도 있는데 중학생이 되었겠네요.

 

저는 그때 그 자매님의 모습을 보면서 ‘야 예수님이 뻥 친 게 아니구나.

말도 안 되는 것을 얘기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런 게 있구나.’

지금도 그 동네에서는 친아들로 알아요.

하지만 살면서 왜 갈등이 없었겠어요?

언뜻언뜻 그 생각이 나지.

수양아들이 두 번인가 세 번 집을 나갔었대요.

그럼 다시 찾아오고 다시 어둠에 빠지지 않게끔 돌보 온 거죠.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소설에만 나오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도 가능한 것입니다.

 

또 우리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보면 있어요.

여러분들 마리아 기사회를 창설하신 신부님이 누군지 아세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꼴베 신부님이시죠.

그 신부님이 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도 아닌데 끌려가 무지막지한 수용소에 갇혔어요.

그런데 그 수용소의 규칙이 한 사람이 탈출하다 잡히면 20명을 죽이는 것이었어요.

네 동료 죽일 생각 말고 탈출하지 말라는 거죠.

그런데 한 사람이 탈출하다 철조망에 걸려서 다 타버렸어요.

포로들을 운동장에 줄로 쫙 세워놓고 교도소장이 지나가면서 지팡이로 콕콕 찔러요.

그것이 20명 가운데 한 명이란 뜻이죠.

골베 신부님도 줄을 서 있는데 교도소장이 그냥 지나가고 그 옆에 사람 배를 쿡 찌른 거야.

옆 사람은 무릎을 꿇으면서 나 자식이 있으니 살려달라고 애원했죠.

교도소장은 ‘한번 말하면 끝난 거야.’ 했죠.

그랬더니 그 옆에 있던 꼴베 신부님이

‘소장님 저는 처자식이 없는 천주교 사제입니다. 내가 이 사람을 대신해서 죽겠습니다.’라고 하셨죠.

그랬더니 ‘그래? 그럼 네가 죽어라.’

그래서 신부님이 대신 죽게 된 거예요.

그런데 이 20명은 어떻게 죽였냐 하면, 지하 창고에 가구도 굶겨 죽였어요.

아사 형

체력이 약한 사람부터 이제 죽어 나갔죠.

열흘, 보름, 물도 안 주는 거예요.

꼴베 신부님은 삐쩍 말랐는데도 정신력으로 버티면서 죽어가는 사람들 임종을 다 도와줬어요.

그러다가 마지막 사람 임종도 사제로서 다 도와주고 혼자 남은 거야.

그런데 신부님이 안 죽으니, 독극물 주사로 죽였어요.

그때 꼴베 신부님 대신 살아난 사람이 있겠죠?

그 사람은 그 이후 꼴베 신부님을 알리는데 전 세계를 다 돌아다니셨어요.

꼴베 신부님이 성인 되는데 앞장서셨던 거죠.

이렇게 피도 살도 안 섞였는데도 하느님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가 있다는 거죠.

 

그런 분들 많죠? 우리나라의 순교자들.

라우렌시오 성인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시죠?

석쇠에다가 사람 몸뚱아리를 집어넣고 밑에 불을 지피고 고기 굽듯이.

처음에 위를 보고 석쇠에 들어가니 뒤가 다 익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도 성인은 ‘배교 안 합니다. 그런데 뒤가 다 익었으니 앞을 돌리세요.’ 그랬대요.

어떻게 저 상황에서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그렇죠.

그래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결코 꿈이 아니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이 얘기를 했더니 어느 신자가 나한테 술 한 잔 먹더니 물어요.

‘신부님은 저를 대신해서 죽을 수가 있어요?’

레지나 할머니 신발 사건 이후에 이 질문을 받아서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뭐라고 대답했어요.

‘대신에 내가 죽을 수 있어.’

‘진짜요?’ ‘응, 진짜 죽을 수 있어.’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우리는 가능하다고 봐 그렇죠

 

피와 살이 섞인 자식을 위해서 죽을 수는 있다고 봐요.

그렇지만 피와 살도 안 섞인 사람을 위해서 하느님 때문에 죽을 수 있는 거죠.

그분이 나를 대신해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그분이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는 거죠.

 

사실은 꿈같은 이야기이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런 각오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네 것을 다 내줘라.’라는 말씀,

살아생전에 우리가 시도하다 실패할 수도 있죠.

미워하는 사람이 안 나타나는 게 제일 좋은 인생인데 그게 마음대로는 안 되잖아요.

그럴 때마다 예수님 때문에 사랑까지는 못 해도 용서는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도록 합시다.

 

♣2023년 연중 제7주일 (2/19)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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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3.03.13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03.13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창수선화 | 작성시간 23.03.14 아멘!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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