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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 신부 강론

아버지! 나 잘살고 있지라우?/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작성자하늘호수♡마리아|작성시간23.03.25|조회수145 목록 댓글 7

◼마태오 17,1-9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 미사 봉헌하는 이곳은 보성군 회천면에 있는 바다가 보이는 다비치 콘도입니다.
이곳에 홀을 하나 빌려 지금 35명이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사시는 곳은 다 좀 다르지요.
일단 운영자들은 전국에서 왔는데, 느티나무 카페가 생긴 이래 운영자들이 이렇게 많이 모인 것은 처음입니다.
꼬막 때문이었을까? 그것을 제가 연구해야 합니다.
감곡 사제관보다 두 배 이상 먼 이곳에 100% 참석했다는 것이 기적이 아니겠는가.
저도 어제 천지창조 이래 처음 가는 길을 직접 운전하면서 왔습니다.
말을 이렇게 하니 거창해 보이죠?
어제저녁 먹고 친교의 시간을 갖고, 아침 식사 후 이렇게 모였습니다.
전라방도, 굉주, 고흥 벌교, 그리고 이곳 회천면에 사시는 분들이 모였습니다.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제가 재의 수요일 강론에 다른 때 보다 엄청 빨리 40일이 지나갈 것이니,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채
작년의 부활 미사 맞듯 올해 또 부활절을 맞을 겁니다라고 했죠.
부활절은 예수님 부활시켜 드리려고 있는 것이 아니죠.
예수님은 이미 2000년 전에 부활해서 당신 자리 찾고 앉아 계셔요.
누가 부활해야 하는 거죠? 우리 각자입니다.
 
저는 재의 수요일부터 성찰에 대한 문제를 계속 던지고 있습니다.
소극적인 성찰과 적극적인 성찰이 있고, 긍정적인 성찰과 어두운 성찰이 있다.
소극적인 성찰은 죄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성찰입니다.
‘내가 나쁜 생각 몇 번 했지? 욕 몇 번 했지?’
물론 그것도 대죄는 성사를 봐야 하지만, 그건 아직 좀 미성숙한 성찰이죠.
그런데 적극적인 성찰은 ‘내가 마땅히 베풀었어야 할 선을 외면한 적은 없는가?’입니다.
복음에 나오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너는 내가 헐벗었을 때 굶주렸을 때 나그네 했을 때 목말랐을 때 나를 도와주었다.’라고 하십니다.
저는 도와드린 적이 없다 하니, ‘아니야 그 사람이 바로 나였어.’ 하시죠.
또 왼편에 있는 사람에게는 ‘너희는 나 안 도와주었잖아.’ 하시죠.
사람들이 ‘내 앞에 나타나신 적이 있으세요?’ 묻자 ‘인생 가운데 내가 네 앞을 수백 번을 지나갔어.
너한테 손을 내민 적도 수백 번이 있었어. 너는 한 번도 나한테 눈길조차 준 적 없이 매몰차고 쌀쌀맞게 대했지.
한 번도 넌 나를 도와준 적 없어.’ 하시죠.
이런 것에 대해 성찰하는 것을 적극적인 성찰이라 했죠.
도둑질 몇 번 했고 간음 몇 번 했느냐 하는 것은 생각 안 해도 양심 있는 인간이면 다 기억나요.
하지만 적극적인 성찰은 정말 기도하지 않으면 못 해요.
그래서 마귀라고 하는 놈들은 소극적인 성찰 거리를 가지고서 지옥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성찰 거리를 못 하게 막아버려요.
그래서 많은 소위 신앙생활 열심히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적극적인 성찰을 매일 못하고 살기 때문에
자기가 어둠에 싸이는 것조차도 모르고 살아간다는 거죠.
이번 사순절에는 정말 특별히 적극적인 성찰 거리를 한번 생각해 보자고 말하고 싶었어요.
저 멀리 혼자 사는 김 총각에게도 관심을 갖고 살았는지 적극적으로 생각해 보세요.(웃음)
 
어떻게 잘하고 계세요?
사순절 때 싸움도 많이 한 사람이 있죠
늘 말하지만, 사순절은 회개를 통해서 은총이 폭포수처럼 내리는 시기이지만, 동시에 사탄이 무지막지하게 덤벼드는 시기죠.
특별히 가까운 사람을 통해서 나를 혼란에 빠뜨리게 하고 평화를 깨져버리게 해요.
나한테 안 그럴 줄 알았던 사람이 툭 하고 던진 말이 비수가 되어 평화롭던 마음이 다 깨져버려요.
또 내가 어디가 아프면 그 생각에서 헤어나질 못하게도 만들어요.
‘나 이거 중병 걸린 거 아니야?’ 이런 어둠이 자꾸 들어와.
우리들의 지능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교활한 게 사탄이에요.
절대 마귀 장난이 아니라 여기게 하면서 우리를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거룩하게 변모하셨죠.
그때 구약의 선지자들 누구누구 계셨습니까? 모세와 엘리야.
그런데 오늘 복음에는 안 나오지만,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님의 옷은 그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고 나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아우라가 대단하셨다는 거겠죠.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실 때, 세 제자들은 쿨쿨 잠을 자고 있다 나오죠.
그러다 깨서 집 세 채를 지어 드리겠대요.
지금으로 따지면 콘도를 지어 드리겠다는 것이겠죠.
 
예수님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제 산에서 내려가면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할 상황이지만, 십자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아름답게 부활하라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죠.
그런데 베드로는 그 과정은 생각하지 않고 타볼산에 팬션 세 채를 지어드리겠다고 하는 거죠.
베드로의 직업은 뭐예요? 어부.
예수님은? 목수.
목수 앞에서 폼 잡는 것이죠.
고기를 열심히 잡아 드린다고 하면 되는 거지, 생뚱맞게 집을 지어 드리겠다니 횡설수설한 것입니다.
우리도 괜히 엉뚱한 곳 긁지 말고 적극적인 회개를 통해서 변화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사순절 동안 무엇을 묵상하기를 원하시는지 정확히 집어 집중 공격해야죠.
‘그 사람이 도움을 청했을 때 도와줄 수도 있었어. 그런데 괜히 시간도 뺏기고 금전적으로 손해 볼 것 같고.
머릿속에 온갖 손익계산 대차대조표를 만들어서 안 도와주었구나.’
이것을 반성하는 시기죠.
사실은 무관심하게 산 적은 없었던가를 반성하라는 시기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오늘 예수님처럼 변화가 돼요.
그래서 변화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대단히 구체적인 개념이죠.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내가 몇 가지 나눠 보았어요.
첫 번째 가정에서 변화가 돼야 한다.
기도 안 했던 가정에서 기도하는 가정으로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이 기도라고 하는 단어는 개신교 용어로 ‘빈다’라는 뜻뿐이죠.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기도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신공(神功) 드린다’라고 했어요. 거룩한 공로라는 뜻이죠.
우리는 하느님에게 내 마음을 보여 드리는 것을 거룩한 공로라고 생각을 했죠.
그래서 기도 안 하면 우리 선배 신앙인들은 죽는 줄 알았어요
밥을 못 먹는 한이 있어도 기도는 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어도 저녁이 되면 호롱불 십자가 고상 밑에 온 식구가 둘러앉아서 저녁 만과(晩課)를 바쳤죠.
아침에는 조과(早課).
그 ‘과’자는 ‘일 과課’ 죠.
아침에 일어나면 첫 번째 하는 것은 눈곱 떼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아침 신공 드리는 거예요.
밤에 잠자기 전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얼굴에 있는 화장품 떼어내는 게 아니라, 만과드리는 겁니다.
옛날에는 구교들은 그것이 몸에 배어 있어요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뭔 뜻인지도 몰라도 함께 했죠.
옛날 만과는 한 시간도 넘게 걸렸죠.
그리고 매괴신공 바치고, 또 기도서에 있는 공과 바치고.
애들은 미치는 거죠. 졸았다가는 뒤에서 그냥 불덩이가 날아오고요.
그래도 지금 지나고 생각해 보면, 기도하는 이론은 신학교에서 배웠지만 기도하는 습관은
부모님께 배운 거예요.
그러니까 피정 다녀와서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만과 드려야 해요.
내 방에 들어가면 침대가 날 보러 오라고 노래해도, 들어가면 안 돼요, 못 깨요.
어떤 때 아침에 깨보면 침대 위에도 못 올라가고 성무일도 끌어안고 자고 있어요.
그 훈련이 신학교에서 배운 훈련이 아니라 어릴 때 배운 훈련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집집마다 식구들이 모여 하는 신공이 없어졌어요.
솔직히 온 식구가 모여서 옛날처럼 촛불 켜고 만과 드리는 집은 1%도 안 돼요.
마귀가 집집마다 공격해서 신공을 다 없애버렸죠.
신공이 없어지다 보니까 첫 번째 냉담자가 반 이상이 돼요
‘기도해야 축복받는다’ 이것보다 ‘기도하면서 얻는 가장 큰 축복은 분별력’이에요.
영적 분별력.
기도하면 풀리지 않았던 것들도 그 실마리가 보여요.
깨우쳐 주시는 거죠.
그러니까는 마귀는 기도가 힘을 알기 때문에 신공을 딱 막아버린 거예요
‘천주교 교우의 집’ 문패 붙어 있고, 방마다 십자가가 걸려 있고, 차에도 있고 목에도 있죠.
하지만 십자가 숫자가 많아해서 성가정이 아니죠.
식구들이 모여서 기도하지 않는 집은 성가정 아니에요
영적 분별력이 없다보니 마귀의 밥이 되어 마귀가 집안을 풍비박산 만드는 거죠.
 
두 번째, 가정 안에서 절대로 서로 탓하지 않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집안이 이렇게 된 건 너 때문에 그런 거야. 애들 제대로 어쩌고’
항상 애들 얘기하다 보면 싸움이 되는 거예요.
‘집안 꼴이 이게 뭐야? 난 돈 버느라고 힘들어. 너는 살림이나 잘해야지.’
‘그것도 월급이라고 갖다주면서, 나한테 해준 거 뭐 있어?’
손가락질 함부로 하지 말라 했죠?
내가 이렇게 손가락질하면 하나는 놈한테 가고, 하나는 꼭 하느님 가요.
그리고 접혀 있는 손가락 세 개는 자기를 향해.
하느님 탓, 남 탓 2개 합친 것보다 내 탓이 더 큰 거예요.
 
‘내 탓이다’라고 하는 가정에는 평화가 와요.
설령 내가 잘못한 게 하나도 없고 저 사람이 잘못했다더라도, 현재 상황을 수습하려면 내 탓이라고 해야 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상대편이 늘 지는 것 같다고 해서 그것을 이용하면 안 돼요.
그렇게 약아빠진 사람은 내가 벌을 안 줘도 하느님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분명히 벌을 주세요.
‘상대편이 겸손하게 나오면 너도 겸손해야지, 그걸 이용 해? 못된 놈아!’
나를 갖고 이용하는 것 같아도 그것으로 분심 들 필요 없다는 겁니다.
주님 보시기에 좋으면 돼요. 맞죠?
 
가정 안에서 세 번째로 부모들이 모범을 보이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삼소의 정신’을 사랑하라 했죠. 뭐예요?
‘옳소’, ‘좋소’, ‘미소’
‘옳소’는 남편이 아내에게.
하느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실 때 남자에게는 없는 특별한 초능력을 여자에게는 주셨어요.
그것이 뭐냐? 예감력. 이것은 남자들이 여자를 못 쫓아가요.
그래서 ‘여보, 당신 그 사업 안 했으면 좋겠어.’ 했을 때, 어기면서 하면 쫄딱 망해.
자고로 옛날부터 어머니 말 안 듣고 위인 된 자식 없어요.
여자들은 특별한 ‘촉’이라는 것이 있으니 여자들이 하는 말에 ‘내가 따라갈게’ 하면 집안이 편해요.
자식들도 나중에 장가가서 아내한테 내가 저렇게 해야 하는구나 배워요.
나중에 아빠 말보다 엄마 말, 예감이 다 맞았거든요.
 
그리고 ‘좋소’는 아내가 남편에게.
‘좋소’는 자존감을 살려주는 말입니다.
여자는 감동받으면 아름답게 변하지만, 남자는 칭찬받으면 없던 능력까지 생겨요
그런데 있던 능력도 와이프가 ‘등신아’하고 윽박지르면, 밖에서는 1등 남자인데 집에만 오면 그냥 꼬리를 내리고 주눅이 들죠.
그래서 뭔가 남편이 의기소침해 있을 때 ‘여보, 당신 최고야. 능력이 있잖아. 어깨 좀 펴’ 하면서
슬쩍 주머니에 용돈이라도 넣어주면, 남편은 나가면서 감동의 쓰나미가 오겠죠.
남편의 기를 살리는 것은 아내입니다.
‘당신 보기 좋다. 내가 밀어줄게’
시집가기 전에 엄마가 어릴 때부터 아빠의 기를 살리는 것을 보면서 배웁니다.
책에서 나오는 얘기 아니잖아요.
 
그리고 또 마지막 ‘미소’ 띄는 가정으로.
특히 그중에서도 아내, 아내는 집안에 떠 있는 해죠.
주부 얼굴이 어두우면 집안이 더 어두워요.
하지만 주부의 얼굴이 밝으면 집안이 더 밝아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내의 얼굴이 밝으려면 상처가 없어야 해요.
상처가 많은 사람은 아무리 웃으려 해도 뭔가 쓴웃음처럼 보여요.
정말 평화로워서 웃는 얼굴과 코미디언의 억지웃음이 다르죠.
결국 아내의 얼굴에서 해가 뜨게 하려면 남편의 노력이 중요하다는 거죠.
여자가 아름다울 때가 어느 때인지 아세요?
첫 번째 젖 먹이는 여자, 두 번째 기도하는 여자, 세 번째 웃는 여자.
이런 아름다운 여자를 만드는 것은 남자의 배포에 달려있어요.
‘당신 최고야, 당신 만나고 내 생애 최고예요.’라는 말을 들어야죠.
나는 여러분들 만나면 내 생애 최고라고 생각하는데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두 번째는 성당에서의 변화가 돼야 해요.
우리 천주교 신자로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성당 가야죠.
그럼 성당 들어갈 때와 미사 끝나고 나올 때 얼굴이 같아야 할까요?
나는 사목의 가장 중요한 포커스가 ‘신자들의 행복’이었어요.
어떡하면 신자들이 행복할까? 그래서 저는 늘 사목은 경영이라고 봤어요.
신부가 됐다고 해서 저절로 그런 지혜가 생기는 건 아니죠.
신자들은 일주일 내내 세속과 싸우다가 너무 힘들어 뭔가 안식을 얻기 위해서 주일에 와요.
차에서 딱 내리자마자 은은하게 스피커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쫙 들려요.
그러면서 첫 번째 치유가 일어나기 시작해요.
그리고 깨끗하게 정돈된 성모님상 앞 촛불 봉헌대에서 촛불 봉헌하면서 또 마음을 다 잡아요. 2차 치유가 일어나.
그리고 밖에서 맞이해 주는 밝은 수녀님들의 얼굴을 보면서 또 치유가 일어나요.
그리고 엄숙하면서 준비된 강론과 품위 있는 전례를 하는 사제와 같이 미사를 하면서 영성체할 준비 해요.
그렇게 준비된 상태에서 성체를 정할 때 눈물이 안 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미사 끝날 때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기쁘게 사십시오.’
그러니까 들어올 때 얼굴과 나갈 때 얼굴이 다르게 만드는 것이 사제의 사목에 제일 큰 키포인트인 거죠.
미사만 가면 힘들어, 신부님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 얘기만 하고. 딴 본당 가야지.
우리 신부님이 기도하는 사제인지, 저 강론이 기도와 묵상과 관상을 통해 나온
수정체인지 신자들은 너무너무 예민하게 잘 알죠.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성체를 통해서, 친교를 통해서, 또 내가 내 몸을 움직여서 할 수 있는 봉사를 통해서,
이 4가지를 통하여 성당을 변화시켜야 해요.
어떤 분은 혼자는 굉장히 열심히 해요.
평일 미사도 안 빠지는데, 본당 신부님이 레지오나 단체 가입을 권하면 안 한대요.
그 이유가 전 성당에서 그거 들었다 상처받았대요.
사람 안 만나고 하느님과 일대일로 하겠다는데, 교회의 4개 기능이 바로 말씀, 성체, 친교, 봉사예요.
 
이렇게 가정과 성당에서 변화되는 모습이 궁극적으로 보여져야 할 장소가 어디겠습니까?
내가 몸담은 이 세상이에요.
변화된 것을 어디에 보여줘요? 이 세상 이방인들한테 보여주어야 해요.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1서 2장 12절에 이방인들 앞에서 행실을 단정히 하라 하십니다.
변화된 모습 보여주라 그겁니다.
단추 풀어졌다 확인하려는 게 아니라 하느님을 행동으로 들어내라는 것입니다.
네가 하느님 믿기 전과 후가 이렇게 바뀌었음을 이방인들 앞에 증거 하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성당 다닌다고 하지만 여전히 욕도 잘하고 입도 싸.’
성당 다니고 안 다니고 비포애프터 변화가 없으면 누가 그 인간을 보고 성당 가고 싶겠냐 이거에요.
‘이방인을 가운데서 행실을 단정히 해라.’
이방인인 며느리를 본 시어머니가 있을 수 있죠
그 시어머니는 성당에서 성모 회장도 하고 구역장도 하고 열심히 해요.
그런데 며느리가 시집온 지 몇 년이 지나도 성당 나갈 생각을 안 해.
면담해 보면 시어머니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못 나가겠대요.
시어머니 성당에서 오만 직책 다 맡은 것 며느리는 알고 있는데, 얼마나 기대했겠습니까?
‘이방인들 앞에서’
그 이방인이 며느리가 될 수도 있고, 내 사위가 될 수도 있고, 내 옆자리에 앉아있는 동료, 내 옆집 사람이 될 수도 있어요.
 
제 이웃이 누군지 아시죠? 스님이예요. 저 정말 잘해요.
혹시라도 ‘신부님이~’ 그 소리 들을까 봐 틈만 나면 뭐 가져다주고 먼저 말도 걸고 인사해요.
그분도 생전 처음 아랫집에서 은퇴한 신부님이 오셨다니 얼마나 궁금하겠어요?
 
‘내 저 사람 때문에 성당 안 나가.’ 그런 말을 들어선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금전 거래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신의’를 지켜야 해요.
성경에도 나와 있잖아요? 누구에게 돈 꿔줄 때는 받을 생각 말고 빌려줘라.
그것 때문에 걱정되면 아예 처음부터 빌려주지 말라 그랬어요.
 
우리 느티나무 카페도 이제 20년이 되었어요.
나무 묘목을 심어놓고 20년이 되면 글쎄 굵기가 얼마나 될까요?
계속 자라겠죠?
더 성숙해져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느티나무 카페에 거름을 주고 양분을 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 중 하나가 강론이에요.
유튜브 강론을 통해서 전 세계 신자가 들을 수 있죠.
카페 식구들이 내 강론을 안 듣는 것은 내가 볼 때는 배반이에요.
가끔 내가 툭툭 물어보면 안 들은 것 표시가 나요.
양분을 주면 받아야죠.
받아야만 성장하는 것입니다.
나도 은퇴 후 일주일에 4번 강론하는 것 쉬운 일이 아니에요.
 
이제 다음 주에는 정원 공사 계약을 해야 해요.
작년 가을 견적보다 배가 나왔어요.
모든 것이 다 올랐어요.
그러면서 작년 금액으로 알고 있는 동생에게 손을 벌려야 해서 돈 문제도 걱정되긴 되지만,
갑자기 어떤 생각이 확 들어 한 이틀간 헤어나질 못했어요.
‘가만있어 봐, 내가 이걸 왜 해야 하지?’
신자들이 와서 야외 미사 드리고 친교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너무 행복한 거야.
하지만 이제 70, 앞으로 얼마나 더 살까?
내 몸도 가만히 보면 자꾸 어디가 아픈데.
성지면 후임 신부가 와서 어떤 식으로든 지키는데, 여기는 누가 관리하지?
물론 그 집은 내 동생 이름으로 돼 있지만, 와서 살 사람은 아니고, 그러면 팔아야 해.
그러면 천주교 신자라면 바랄 것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여기 있는 성물을 다 부수는 것 아닐까?
왜 내가 성지서 하던 것을 은퇴해서도 고생할 필요가 있을까?
목적은 신자들의 행복이었거든.
그래도 신부님이 있고 가면 잘 방이 있고 상처 치유도 받을 장소를 만들 생각을 하다가,
어둠이 들어오기 시작하니 헤어나질 못하게 됩디다.
고민하다가 교우들에게 내가 어떻게 가르쳤나 살펴보며 해결책을 찾았어요.
그리고 이것을 찾아냈어요.
‘나한테 오지도 않을 걱정을 왜 미리 하나? 땡겨서 할 것은 감사뿐이다.’
‘걱정은 기도가 아니다.’
그리고 내가 나중에 뭐 80에 죽든 90에 죽든, 내가 세상 떠날 때 되면 하느님이 또 이 터를 좋게 쓰실 것이다.
내가 죽으면 어디 묻히는 줄 아시죠? 가덕에 있는 청주교구 묘지.
 
그래서 느티나무 사제가 분명 변해야 합니다.
신자들이 와서 치유 받을 수 있는 공간, 며칠이고 혼자 밥해 먹으면서는 쉬었다 갈 수 있는
힐링하우스도 이제 공사 들어갈 겁니다.
수녀님들도 요즘은 휴가 때 갈 곳이 별로 없대요.
해외 교포들도 나이 먹어 들어오면 피붙이는 다 세상 떠나고 조카들 눈치 보여서 호텔에서만 산대요.
마음이 답답하고 힘든데 신부님 계신 데 가서 일주일만 좀 혼자 개인 피정하고 싶다.
오세요.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에 너희는 가지라고 했듯이 사제의 대리자로서 신자들이 와서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 주는 느티나무처럼 살고 싶었어요
신부가 될 때부터 자연스럽게 또 가는 곳마다 느티나무들이 많은 본당이었고,
마지막으로 정착한 데는 느티나무도 그냥 느티나무가 아니죠. 500년 된 느티나무,
태조 이성계 때 심은 나무가 바로 침대 옆에 나를 쳐다보고 있으니까
정말 주님이 묘하게 이곳으로 부르셨다 하는 걸 느낍니다.
 
여러분들, 아름답게 변화되도록 합시다.
 
♣2023년 사순 제2주일 (3/05)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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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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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창수선화 | 작성시간 23.03.26 아멘!감사합니다 ~❤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3.03.26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3.03.26 아멘 신부님 하늘호수님 감사합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03.26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kksu | 작성시간 23.03.29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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