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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 신부 강론

예수님 살해 공범들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작성자하늘호수♡마리아|작성시간23.04.16|조회수133 목록 댓글 3

◼마태오 26,14─27.66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 성지주일입니다.
본당에서는 오늘 비가 안 오기 때문에 밖에서 행렬하면서 성지 가지를 들고 입장하겠죠.
그건 무엇을 재현하는 것입니까?
옛날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지상의 왕 로마 제국으로부터 해방해 줄 왕으로 알고서
신이 나서 예수님을 맞이했던 장면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예수님을 맞이했던 그들이 나중에 어떻게 변하죠?
‘죽여라, 죽여라. 못 박아라, 못 박아라’ 합니다.
 
오늘 복음인 예수님의 수난사에는 그분 죽음에 관여한 여러 인물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등장했을까요?
군중, 대사제들, 원로들, 또 예수님을 팔아먹은 유다스, 또 열두제자.
그리고 예수님을 죽이기는 싫었지만 살려두면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킬까 두려워 예수님을 내어 준 본시오 총독 빌라도.
그러면, 만일 이 수난사를 연극에 올렸다고 생각합시다.
여러분은 어떤 역할을 하고 싶어요?
아무튼 예수님의 수난사에는 그분 죽음의 협력자가 됐던 여러 등장인물이 나오죠.
오늘은 간단히 어떻게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기여했나 살펴봅시다.
 
첫 번째가 대사제와 원로들이 첫 번째 주인공들입니다.
아마 뭐니 뭐니 해도 예수님 처형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죠.
며칠 전 내가 강론 유튜브를 올렸을 때 그런 얘기가 나와요.
하느님을 사형 선고 내린 위선자들이 드디어 이제 의회에 모입니다.
그리고 바리사이와 사두가이파들이 예수님을 이제 죽이려고 결심을 하는 게 나오죠.
그렇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뭐냐? 어느 기적 때문이죠?
죽은 라자로를 사흘 만에 살렸어요.
그 소문이 유대 땅으로 그냥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그때 당시에 유대 땅에는 마술사들이 있었어요.
가끔 어떻게 아다리가 맞으면 병도 낫게 해주었어.
그런데 마술사는 절대로 할 수 없었던 게 뭐냐?
죽은 사람을 살리는 건 하느님 영역이에요.
그런데 나자렛 그 촌놈이 그 일을 한 것이에요.
원로들, 대사제, 바리사이에게는 예수님이 하신 것이 진리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죠.
잘못하면 자리가 위태로운 것이었죠.
어제 내가 말했지만 지금 정치하는 인간들도 다 똑같아요.
지역 사람이니까 다 뽑아줘요.
그러니까 국민 수준이 어쩌고 하면서 그냥 뭐 계속해 먹는 거예요.
아주 많이 제대로 된 사람 못 보는 거죠.
어떻게 보면 그 사람들 잘못이 아니라 그런 인간을 뽑아놓은 백성들이 잘못한 거예요.
아무튼 이 대사제들과 원로들에게 예수님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인물로 보였을 겁니다.
성전 정화사건 아시죠? 마태복음 21장 이하에 나옵니다.
성전 정화에서 보듯이 성전세와 장사꾼들에게서 받는 자릿세를 깡그리 없앨 수 있는 위험인물이었죠.
예루살렘은 동네마다 회당이 있었고 성전은 딱 하나, 예루살렘 하나밖에 없었어요.
유대인들은 일 년에 한 번씩은 성전에 가야 해요.
그런데 가서 기도만 하고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이 많이 들었죠.
일단 들어가려면 입장료가 필요해요. 또 들어가서 짐승을 바쳐야 했죠.
내가 죽을 수는 없으니까 나 대신 번제물로 바칠 비둘기를 1년 동안 열심히 키워 가요,
그런데 가면 검사관이 퇴짜를 놓고 대사제가 직영하는 가게에서 파는 짐승만 합격을 시켰죠.
문밖에서 비둘기 한 마리 사는 값이랑 성전에서 사는 비둘기 값이랑 비슷하다면 누가 뭐라 그래? 100배 이상 비쌌어요.
그리고 입장료도 은화가 필요했어요.
당시 대사제들은 다 사두가이파들로 아주 정치적인 인간들이죠.
이 인간들은 성전에 예배 오는 사람들의 신앙을 도와주려는 것이 아니라,
마치 덩굴이 나무에 뿌리를 내려서 양분을 쭉쭉 빨아먹듯이 서민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던 인간들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성전에 나타나 장사꾼들 상을 들어 엎고 내 아버지의 집을 도둑님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 성전 안에는 어깨들이 있어 만일에 누가 비싸다고 떠들면 슬그머니 끌고 가서 팼죠.
그렇게 서슬이 시퍼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내 아버지 집을 도둑놈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하면서
성전을 정화 시키려고 애를 쓰신 거죠.
대사제들은 그때부터 ‘아 저놈은 죽여야 할 놈이다. 안 되겠다.’ 꼬투리만 잡고 있다가 그 올가미에 걸려든 게 유다스죠.
예수님은 그들에게는 눈엣가시였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합니다.
 
다음에 두 번째 등장하는 인물이 유다스죠.
마태복음 26장 11절에 ‘내가 당신들에게 예수를 넘기면 얼마 주겠어?’ 하죠.
그래서 얼마 받았죠? 은돈 서른 닢.
은돈 서른 닢은 그때 당시 건장한 남자 노예 하나를 사고파는 값이죠.
예수님을 노예 취급을 한 거예요.
유다는 스승을 당시 노예 한 사람값인 은돈 서른 닢에 팔아넘겼습니다.
이처럼 돈에 대한 욕심은 인간을 눈멀게 하지요.
돈이 곧 하느님인 사람에게는 어쩌면 그 일은 당연할 수가 있습니다.
돈이 하느님이에요. 맘몬(mammon)이라고 그러죠.
그래서 이 돈 때문에 밀고와 배신, 청부 살인은 어디서나 있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모습대로의 예수님을 그리고 있는 자들이었죠.
 
지금 제가 이렇게 하나하나 짚어주는데, 강론 시작에 여러분들은 어떤 역할을 맡고 싶다고 했지만,
우리는 이 대사제와 원로들의 모습으로 살아왔을 수도 있고, 유다스처럼 살아왔을 수도 있죠.
 
그다음에 세 번째 열두제자가 나옵니다.
열두제자의 오야붕(おやぶん) 우리 베드로, 베드로가 좀 똑똑하고 현명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사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정말 사랑했거든요.
세 번 배반했고 예수님은 배반할 것을 미리 경고까지 했죠.
하지만 경고할 때마다 베드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그랬어요.
그러나 혓바닥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나는 저 사람 몰라. 모른다는데 왜 자꾸만 왜 같은 편이냐고 그래?’
하며 마지막 세 번째 모른다고 하니 닭이 울었죠.
그러자 통곡을 하죠.
이렇게 결점투성이인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부활하신 다음에 나타나셔서 또 세 번 물었어.
‘베드로야, 네가 나 정말 사랑하니?’
그러니까 ‘예 사랑합니다.’
또 물었어. ‘예, 사랑하죠. 그런데 왜 자꾸만 물으세요?’
똑같은 얘기를 세 번째 묻죠.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예 사랑합니다.’
예수님 배반했을 때 세 번의 상처를 예수님은 부활 후 다시 세 번 물어주심으로써 치유시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너는 반석이요 으뜸 사도’라고 하시죠.
그래서 1대 교황이 베드로 사도예요.
 
아무튼 열두제자들도 현세적인 출세를 꿈꾸며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무슨 구원?
예수님이 3년 동안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오만 좋은 얘기를 많이 했어도 솔직히 귀에 안 들어왔어요.
이 사람들 머릿속에는 ‘저 양반이 저 능력으로 분명히 로마 사람들을 몰아내고 유대의 왕이 될 거야.
자 그러면 국무총리 자리는 그래도 베드로 형님이 그래도 맡으셔야 할 것이고, 내무부 장관은 누가 하지?’
그러니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와서 로비하지 않습니까?
우리 아들 하나는 무슨 자리, 다른 하나는 무슨 자리 달라고 하죠.
그러니 예수님 따라다녔던 수많은 군중은 물론 100 프로 기복이요,
군중뿐 아니라 12 사도들도 역시 출세 때문에 쫓아다녔던 거예요.
현세적인 출세를 꿈꾸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스승이 체포되자마자 어떻게 했습니까? 도망쳤죠.
자기들의 불이익을 피하려고 하나같이 도망쳤어요.
유일하게 딱 한 사람 남았었죠. 성모님.
그리고 비틀거리는 성모님 팔짱 끼고 끝까지 지켰던 게 사도 요한이죠.
그러면서 예수님이 ‘요한아, 오늘부터 이분이 네 엄마다. 어머니 오늘부터 요한을 의지 삼아서 아들처럼 여기세요.’
거기 나오는 요한은 사실은 모든 인류를 뜻하죠.
그때부터 성모님은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신 거예요.
그리고 또 모든 이들은 다 성모님의 아들이 된 거예요.
 
모두 신앙 때문에 불이익이 생긴다면 언제나 도망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옛날 순교자들이 놀랍게도 누구의 밀고에 의해서 잡혀서 죽었느냐?
80%가 같은 신자들이 밀고였어요.
독재 시절에 우리나라에도 공직에 있었던 교인 중에 교인이 아닌 것처럼 살았던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았어요.
옛날에 박통 시절, 유신 시절에 얼마나 천주교가 탄압을 받았습니까?
유신 정권에 군인들도 천주교 신자는 진급하는데 일단은 제외했어.
그러니까 어느 정도였느냐? 인사처에 돈 써가면서 인사기록에서 천주교 지워달라고 군인들도 있었죠.
하지만 그 와중에도 어떤 불이익이 와도 천주교 신자임을 밝혔던 교인들은 세속적인 출세는 못 해도
하느님의 축복을 많이 받았겠죠.
내가 군종신부 할 때 군단장 하시던 분이 계셨어요.
별 셋이지.
그 양반은 사병부터 시작해서 정규 육사 출신들이 꼼짝도 못 했다고 해요. 호랑이예요.
그런데 구교 신자인 그 양반은 주변에 다른 군인들이 다 천주교 신자 아닌 행사 등
어디를 가더라도 큰소리로 식사 전에 성호를 그었죠.
한번은 청와대에 초청을 받아 가 박정희 앞에서도 성호를 당당히 그었죠.
‘당신 천주교 신자구먼?’
‘네, 맞습니다. 각하.’
‘천주교 맨날 반정부 운동이나 하고 그거 왜 믿어?’
‘아닙니다. 천주교는 그런 거 아닙니다.’
너무 당당해서 박통이 그 사람을 좋아했다는 거예요.
 
제가 12사단에 근무할 때 그 양반은 군단장이었어요.
어느 날 성당 앞에 별 셋 단 차가 딱 들어와.
전방 시찰을 하고 오시는 거죠.
그러면 그분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권총을 풀러 부관에서 맡기고, 성사를 보시는 겁니다.
옛날 구 교우들이 그렇듯이 무릎을 꿇고 성사를 보셨어요.
앉아서 보셔도 된다 해도 습관이 돼서 앉아서 못 본대요.
한 달에 한 번 어김없이 오시고, 늘 손에는 묵주가 있었죠.
그래서 그 양반의 좋은 덕을 보고 아마 대자가 수천 명이 있었을 거예요.
국방부 차관까지 하셨는데, 제대한 후에도 ‘가톨릭신앙생활연구소’도 창립하시어 책도 많이 쓰셨죠.
신치구(베르나르도), 아주 유명한 분입니다.
그 양반은 전설이죠.
군대에서는 천주교 신자로서 박해를 받을 때도 끝까지 천주교임을 밝혔던 그런 분들은
분명히 하느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분들이지요.
보통 용기가 아니에요.
 
 
또 네 번째 성난 군중들이 있었죠.
이 성난 군중들은 과거에 어떤 기적을 봤던 사람들입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봤어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은 그 기적을 봤던 사람들이었죠.
그리고 성난 군중 사이에는 과거 병 나음을 받았던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수많은 은총의 수혜자들이 갑자기 돌을 들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들어요.
은혜를 망은으로 보답하는 거죠.
그럼 이 성난 군중들이랑 우리는 아무 관계가 없을까요?
여러분들 모두 은총 가운데 살잖아요.
그런데 말로만 ‘땡큐~’. 립서비스만해요.
세상 모든 피조물은 감사함을 표현해요.
벼도 익으면은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면서 인사하죠.
사과도 익으면은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면서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져요.
세상 모든 것은 감사를 반드시 표현하는데 가장 은혜를 많이 받고 살아가는 인간들은 입으로만 감사해요.
옛날에는 추수감사절 미사 때면 농사 지은 것 중 제일 좋은 것으로 제대에 쌓아놓았죠.
도대체 예수님에게 그 많은 은총을 받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은혜를 배반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느냐 이거죠.
 
또 다음은 빌라도 있지요.
빌라도는 자기의 정치 생명에 영향을 줄까 봐 예수님을 내줬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쭉 간단히 살펴봤지만, 예수님의 사형이라고 하는 것은
기득권 수호, 돈 욕심, 비겁함, 정치적인 출세를 위한 사람들의 합작품입니다.
빌라도의 잘못도 아니고. 어느 한 사람만의 잘못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잘못이었던 거죠.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최악의 공모 작품이죠.
그래서 우리는 이 성주간에 죄에 대해서 죽고 새로 사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중요한 건 뭐냐?
주님은 너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바로 나 때문에 죽은 겁니다.
 
지난 사순절 동안 엉망진창으로 살았다 해도 이 성주간만큼이라도
말씀을 가까이하고 가능한 침묵하는 가운데 부활을 맞이해야 합니다.
저도 사순절 동안 성찰해야 할 많은 이야기를 유튜브에 올렸습니다.
제가 늘 하는 얘기가 부활절에 예수님을 부활시키려 하지 말고 내가 부활해야죠.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부활해서 올라가셨는데 왜 예수님을 부활시켜요?
우린 그럴 자격도 없잖아요.
그런데 많은 교우가 이 아주 단순한 상식이고 교리인데 항상 행사 위주로 끝나는 거죠.
그래서 부활절에 또 어떤 행사 때문에 나 자신이 부활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차분히 보내십시오.
정말 나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부활해야 하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사실 사순절 강론은 거의 나 자신을 부활시키는 이야기들이죠.
 
죽은 라자로 부활시키실 때 ‘소생3언’이 무엇이었죠?
첫째, ‘돌을 치워라’
내가 못 나가게 막고 있는 돌이 무엇이냐?
교만의 돌, 욕심의 독, 걱정의 돌이 가로막고 있으면 못 나가요.
둘째, ‘일어나 걸어 나와라.’
컴컴한 굴속이 좋은 사람들은 아무리 나오라 해도 안 나와요.
걸어 나오너라, 의지를 갖고 걸어 나오너라.
세 번째, ‘온몸을 칭칭 감고 있는 천을 풀어서 자유롭게 해라.’
내가 스스로 내 몸뚱아리를 감고 있는 천이 있을지 몰라요.
또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내 남편이 감아놓은 천이 있을지 몰라요.
내가 누구를 용서 못 하면 그 사람은 용서를 못 받고 살기 때문에 자유를 못 느껴요.
또 용서 못 해주는 사람도 자유를 같이 못 느껴요.
칭칭 감고 있는 그놈을 훌훌 벗어젖혀야 우리가 자유로워져요.
결국에 부활은 영적인 자유를 누리는 거죠.
그리고 그 자유 가운데 평화로움이 있는 거죠.
 
우리 자매님들, 미리 당겨서 걱정하지 말아요.
당겨서 하는 건 딱 하나밖에 없다고 그랬죠? ‘감사’
감사만큼은 미리 당겨야 해요.
하지만 걱정은 당겨서 하는 게 아니에요.
마귀가 제일 즐겨 쓰는 도구가 걱정이에요.
걱정하면은 기도가 안 돼요.
많은 사람이 기도한다고 하면서 걱정을 해요.
하지만 걱정은 기도가 아니죠. 그러나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나요.
그래서 마귀는 자꾸 걱정에만 머무르게 해요.
기도한다고 한 시간 앉아 있는데 사실 돌아보면 기도한 것이 아니라 걱정만 하다 끝났어.
온갖 분심 잡념, 걱정만 한 거죠.
마귀는 진짜 기도가 못 나가게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걱정이라고 하는 함정 속에서 못 빠져나오게 만들어요.
그래서 많은 교우가 기도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기도가 아닌 걱정만 하다가요.
걱정을 기도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게 마귀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좋은 일 생기면 다 감사해요.
우리 신앙인들은 결과를 보고 감사해서는 안 돼요
지금 당장은 해결할 기미가 아무것도 없어 보이고, 하다못해 어저께 암 선고까지 받았다 해도 ‘그래도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 선조 신앙인들이 망나니가 칼춤을 추면서 목을 자르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더 쉽게 잘라요? 목을 더 뺄까?’ 하셨다죠.
망나니도 칼춤 추다가 기도 안 찼대요.
김대건 신부님이 그렇게 돌아가셨다잖아요.
‘많이 힘드시죠? 맨날 사람 죽여야 하니까. 어떻게 하면 편하게 목을 치실 수 있습니까?
저는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그냥 내리치세요.’
김대건 신부님이 돌아가실 때 나이가 30도 안 됐죠, 스물여섯 살.
그 어린 사람이 어떻게 그런 용기가 생겨요, 이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죠.
 
우리 신앙인들은 늘 감사해야 합니다.
결국에 오늘 복음에 나온 이 인간들은 다 욕심 때문에 예수님 죽인 거예요.
하나같이 자기 위주의 ‘내가 생각하는 예수님은 이런 예수님이어야 해’하다가
자기가 만들어 놓은 예수님이 안 되니까 ‘뭐야 이거? 출세하긴 다 틀려먹었구먼. 먹고살 길 찾아야겠다.’
열두제자도 다 도망가버리죠.
 
거룩한 성주간, 성사들은 다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예수님 맞이하도록 합시다.
 
2023년 주님 수난 성지 주일 (4/2)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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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요셉-막내165 | 작성시간 23.04.17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3.04.17 아멘~감사합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04.17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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