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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 신부 강론

부활은 변화되는 것이다./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작성자하늘호수♡마리아|작성시간23.04.26|조회수150 목록 댓글 1

◼요한 20,19~31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부활 제2주일,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는 거의 황사가 없었죠.

왜냐하면 중국에서 공장 가동을 안 하다 보니 중국이 깨끗해지고, 우리나라도 공기가 같이 깨끗해집니다.

그런데 다시 중국이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미세먼지와 황사가 심하다 보니,

그놈들이 그대로 바람 타고 날아와 우리 한국 땅을 덮고 있습니다.

요즘 몇 년 동안은 코로나 덕분에 아주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었고, 또 미세먼지로부터 해방된 듯했습니다.

 

부활 제2주일을 보내며, 전에도 제가 굉장히 중요성을 갖고 한 이야기지만 강조하는 의미로 다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지난 부활절 지나고 부활 8부 축제일 동안에 평일 복음이 뭐였는지 기억나십니까?

4 복음사가가 목청껏 외쳐댔던 주제는 예수님이 실제로 부활하셨다고 하는 부활의 실제성입니다.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라 정말로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을 아주 강하게 강조했던 거였죠.

 

역사를 보면, 물론 그 역사는 지금과 연결이 돼 있기에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부활을 보는 세 가지 정도의 견해들 흐름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들입니다.

이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들은 부활을 어떻게 보느냐?

주님 부활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단지 부활의 현대적인 의미만을 목청껏 외쳐대고 있는 거죠.

주님이 2천 년 전에 실제로 죽었다가 사흘 후에 부활하셨느냐 안 하셨느냐 하는 부활의 역사성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 부활이 현재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만 목청껏 외쳐대고 있습니다.

또 반대로 근본주의자들은 이러한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들에 맞서 주님이 부활했다는 그 부활의 역사성만을 강조하다 보니

부활의 현대적인 의미를 소홀히 하기가 쉬운 거였죠.

이렇게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들이 지향하고 목표로 삼아야 할 견해와 확신은

복음주의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도 아니고 근본주의자들도 아니고 복음주의자들이다.

한마디로 복음주의자들은 영적으로 균형 감각이 있는 신앙인들입니다.

부활의 실제성을 강하게 믿으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 사는 다양한 현대인들에게 주는 그 부활의 메시지를 받아들여서

구체적으로 열매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균형 잡힌 복음주의자들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복음주의적인 차원의 그 부활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부활 제2주일,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그 당시에 만났던 사람들을 통하여,

나 자신의 신앙의 주소, 부활에 대한 확신에 대한 정도를 확인해보고자 합니다.

 

‘부활한 예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는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났던 이 사람들이 바로 오늘날의 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공동체일 수 있고, 우리 반일 수도 있고, 우리 가정일 수도 있죠.

앞으로 얘기하는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던 다섯 부류 중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할까?

하여튼 중요한 것은 이 다섯 부류의 사람들이 변화되는 겁니다.

분명히 변화가 있었다는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그들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하는 것은 강론의

제일 마지막 결론으로 대신 답을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여러분 아시다시피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막달레나의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회개한 여인이었고 많은 마귀가 달라붙어 있었던 여인이었죠.

엄청난 어둠으로부터 해방됐기에 예수님에 대한 충성과 사랑과 열심한 마음이 뛰어났던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끝까지 지켰고, 또 무덤 주위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눈물로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이런 막달레나의 마리아는 완전한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하더라도

주님은 마리아에게 성스러운 모습을 제일 먼저 보이셨습니다.

이렇게 열심과 충성한 자들은 예수님을 늘 보게 되어 있습니다.

요령 피우는 자는 세상에서도 인정을 못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은 우직하게 열심과 충성으로 순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께 대한 사랑, 오직 예수님께 대한 순명, 오직 예수님께 대한 충성’이 우리들의 신앙 구호가 돼야겠죠.

‘오직’이라고 하는 말은 순도를 나타냅니다.

순도 100%짜리 하느님에 대한 충성, 순도 100%짜리 하느님에 대한 순명, 순도 100%를 지향하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

‘적당히 하느님에게 충성’하고 ‘적당히 하느님에게 순명’하고 ‘적당히 가끔 사랑’하는 그런 정신 상태로는

절대로 우리는 부활한 예수님을 못 봅니다.

60%의 하느님에 대한 순명을 갖고 살다가도 40%의 불순명 때문에 이제껏 했던 순명이 다 무너집니다.

우리는 적어도 목표만큼은 순도 100%짜리 충성과 순명과 사랑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막달라 마리아는 불순물이 들어가 있지 않은 열심과 충성과 순명과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에,

예수님은 막달라의 마리아에게 당신의 부활한 첫 모습을 선물로 주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부활한 예수님을 봤던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다락방에 숨어 있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그 제자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다락방 밖에서 발소리만 들려도 로마 군인들이 잡으러 오는 줄 알고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합지졸처럼 자기 스승을 버리고 도망치고 이제는 다락방에 모여서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들에게 예수님은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평화가 있기를’ 이 말은 ‘너희들에게 담대함이 있기를.’

왜 그렇게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느냐?

지금 이 시각에도 죽음의 공포, 앞날에 대한 두려움 등 온갖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암 병동, 또 환경이 가져오는 공포, 죽음이 가져오는 공포, 미래의 불확실이 가져오는 두려움,

또 어려운 인간관계 속에서 사람이 주는 상처, 이러한 온갖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

바로 우리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너희에게 담대한 마음이 있기’를 얘기하십니다.

다시 말하면은 ‘너희 가슴 속에 사람을 담고 살지 말고 바로 나를 품고 살아라. 그러면 공포와 두려움은 사라진다.’

예수님이 잡혀가는 그 순간부터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는 그 순간까지 다락방에 모여 있었던

그들의 마음 한가운데는 예수님은 이미 사라졌던 겁니다.

3년 동안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뭉칠 수 있었지만, 물론 동기는 그렇게 정결한 동기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출세하려고 했던 동기였지만,

그래도 예수님이 그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흩어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님이 잡혀가시는 그 순간부터 ‘예수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이 제자들은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두려워서 자리를 뜹니다.

그래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 말뜻은 뭐라고요?

‘너희 한가운데 내가 있음을 믿어라. 그러면 담대해진다.’

 

세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입니다.

토마스는 굉장히 이성적이고 스마트한 사람이었죠.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의 첫 부활을 봤을 때 토마스는 다락방에 없었습니다.

아마 먹고살 길 찾으려고 어디 다니다가 다락방에 가보니, 부활한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넋이 나가 있었죠.

그리고 ‘토마스, 조금 전에 우리 선생님이 다녀가셨어.’

사도 토마스는 ‘미쳐도 단체로 미쳤구나, 정신들 차려. 뭔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거야?’

그러면서 자기 손가락을 그 상처 구멍에다 집어넣어 보아야 믿겠다 합니다.

지극히 이성적이고 지극히 현실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데 여드레 후입니까?

제자들과 토마스가 같이 있을 때 주님이 또 한 번 나타났죠.

이 두 번째 나타난 것은 100% 토마스 때문에 나타난 겁니다.

그리고 뭐라 합니까?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는 기겁했을 겁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봤다는 말을 믿지 않았었죠.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한 토마스는 무릎을 꿇고

모든 회한과 회개와 그리고 의심했던 모든 것을 하느님께 용서 청하는 마음으로 딱 두 마디를 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다른 사족을 붙이지 않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미쳤었습니다.’라는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며 무릎을 꿇습니다.

그런 토마스에게 예수님 뭐라고 그럽니까?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진복자니라’

성서에서 사도 토마스는 의심과 회의와 불신의 대표자처럼 보입니다.

사실 모든 분열과 깨짐은 의심으로부터 시작이 되지요.

의처증, 의부증, 친구 사이에 갈등도 의심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오늘도 부활한 주님은 의심과 불신과 회의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서로 믿고 신뢰하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나를 믿는 자가 되라고 격려하고 계십니다.

 

네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을 받은 사람은 성서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성서를 풀이해 주시고 빵을 축성하여 떼어주십니다.

사실 이 엠마오로 가는 그 두 제자는 3년 동안 믿고 따랐던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자마자

낙담하고 절망하여 낙향 길에 있었던 겁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 때문에 핍박당하다 보면 낙담하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가난하다고, 못생겼다고, 못 배웠다고, 가진 것이 없다고, 재주가 없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절망하고 낙심하고 체념하며 숙명론자로 전락하여 사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누구든지 부활한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달라집니다.

갈 때는 절망의 엠마오 길이었지만 주님을 만나고 올 때는 희망의 길이 되어서

단숨에 예루살렘을 향해 줄달음쳐서 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겁니다.

 

다섯 번째로 주님의 부활을 본 이는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그물질하던 베드로입니다.

주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베드로는 다시 어부 생활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을 잃어버리고 고기 잡는 옛 생활로 돌아간 베드로와 제자들.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해 기진맥진한 제자들에게 요깃거리를 준비해 주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세 번 묻지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세 번을 왜 물으셨을까? 명예 회복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던 전과자입니다.

주님을 배반했다고 하는 깊은 죄의식은 베드로를 지옥의 마음으로 살게끔 했던 겁니다.

스승을 지키지 못하고 도망쳤던 12 사도의 맏이 노릇을 못 했다는 것 때문에 괴로워서 사는 게 지옥이었던 겁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다시 세 번 묻고 대답을 들으심으로써 영적인 명예 회복을 해 주십니다.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라 하면서 다시 사도직을 맡기신 겁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부활한 주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분명히 변화된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면서도 별로 변화가 안 됐다 한다면 아직도 내 안에 부활한 주님을 못 만났다는 얘기죠.

막달라 마리에게 나타나셔서 슬픔과 눈물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다락방에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서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나중에 나타난 토마스에게 나타나셔서 의심과 불신과 회의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엠마오로 낙향하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낙담과 절망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배반하고 십자가에 예수님을 지키지 못했던 전과자이던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세 번 물으심으로써 수치심과 부끄러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에게는 해방을 뜻합니다.

자유를 뜻합니다. 치유를 뜻합니다.

 

여러분들, 오늘 묵상했던 여러 가지 어둠으로부터 자유로워지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 예수님을 만났던 다섯 부류의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셨기를 간절히 축원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하소서.

아멘

 

♣2023년 부활 제2주일 (4/16)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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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04.27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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