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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 신부 강론

다른 이를 부활시켜야 내가 부활한다.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작성자하늘호수♡마리아|작성시간23.05.11|조회수144 목록 댓글 3


◼ 루카 24,13~35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여기 온다고 설레고 잠도 잘 못 주무셨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 환영합니다.

오늘 미사 드리시는 교우들은 서울 방 교우들입니다.

유리창을 닫아야만 하는 겨울에는 열다섯 명으로 제한했는데, 지금은 유리창을 열고 미사 드릴 수 있기에 20명까지,

거기에 괄호 열고 다섯 명까지 늘릴 수 있다 했습니다.

그 다섯 명은 아픈 환자들 위주로 더 추가할 수 있다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25명이 되신 겁니다.

아까 우리 형제님 이름 때문에 한번 좀 웃었죠.

강론과 상관은 없는 이야기지만,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요.

 

수원교구에 성심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제가 여러 번 강의했었죠.

아주 오래전에 오전 강의를 끝나고 제 강론 CD와 책에 사인해 주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 남자분이 오시면서 명함을 주시는데 울산대 공대 교수님이셨어요.

그리고 옆에 서 계시길래, 줄 서 있는 사람이 많으니 사인하면서 들을 테니 말씀하시라 했죠.

그분이 아주 심각하게 ‘신부님 제가 이름에 대해 참 많이 연구한 사람입니다.’ 하셨죠.

저는 그냥 건성으로 ‘그러세요.’ 했어요.

그분 말씀이 본인이 연구했는데 한국에 ‘삼웅’이 있대요.

그러면서 첫 번째가 김웅렬 신부님, 두 번째가 오웅진 신부님, 세 번째가 강기웅 신부님 이름에 ‘웅’이 들어가는데,

결과로는 큰 신부가 되려면 반드시 ‘웅’자가 들어가야 한다는 거예요.

듣다 보니 재미있어 더 이야기하시라 하니, 자기의 소망이 자식 가운데 사제가 되는 게 소망인데,

둘째인가 셋째 아들 이름을 웅자가 들어가는 이름으로 개명했대요.

그 후에는 연락이 없어 모르겠어요.

또 어떤 생각도 들었나 하면, 모택동이 죽고 난 다음에 등소평이 달러를 벌기 위해서 중국의 문을 열었죠.

그게 91년도부터예요.

저는 기회는 이때다 해서 선교팀을 꾸려 10년 동안을 중국 선교를 나갔습니다.

5년 동안은 조선족들 5년 동안은 한족들.

5년 동안 조선족 이제 강의를 5년 동안 했죠.

저 위 훈춘, 러시아 국경서부터 해가 내려오면서 연변 자치주를 쫙 돌았죠.

얽힌 얘기도 너무너무 많아요.

처음에 심양공항으로 갈 때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사과 박스에 묵주, 십자가, 성경을 잔뜩 갖고 갔죠.

그 당시만 해도 중국에는 삐삐하는 탐지기도 없었어요.

문만 열고 들어가면 공안이 보고 있다가 랜덤으로 하나씩 부르는 거예요.

가만히 보니 여행 가방 끌고 가는 사람은 안 건드리는데, 꼭 사과 궤짝 같은 것만 열어보라는 거예요.

그 안에 뭐가 있었겠어요? 선물이잖아.

나도 열었죠. 열었더니 중국말로 뭐라 쌍소리를 하는지 욕을 하는지.

내가 알아들으면 기분이 나쁜데, 못 알아들으니 기분은 안 나빴죠.

그런데 묵주를 움켜쥐더니 바닥에 패대기를 치는 거야.

통역하시는 분 말씀이 ‘너 관광으로 들어온 놈이 왜? 이런 아편을 퍼뜨리러 왔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공산주의자들은 그러죠.

보관증 써줄 테니 나갈 때 찾아가래요.

그래서 첫 번에 들어갈 때는 아무것도 못 갖고 들어갔어요.

두 번째 들어갈 때는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 묵주를 제 다리에 친친 감았어요.

내가 몸이 크잖아?

등에는 십자가를 앞뒤로 여덟 개는 붙였어요.

잘 걷지도 못하고, 비행기 안에서는 피도 안 통했지만, 통과만 하자.

조선족 신자들은 묵주라는 것이 없잖아요.

그러니 나무 열매를 꿰서 쓰고, 십자가 성경이 어디 있어요.

로봇 걷듯이 들어가니, 세관원도 잡지 않고 통과했어요.

회장님이 봉고차에서 기다리셨는데, 타자마자 다 풀었죠.

조선족 신자들과 회장님이랑 총무가 나왔는데 정말 많이 우셨던 기억이 나요.

사제가 그렇게 성물을 가지고 왔으니 좀 감격하셨겠죠?

그렇게 5년 동안 연변 자치주에 있는 한국 신자들을 참 많이 만났죠.

천주교가 중국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으로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적어도 천주교 신앙 쪽에서는요.

주문모 신부님이 제일 먼저 들어왔잖아요. 중국 신부님이시죠.

김대건 신부님 최영호 신부님이 부제로 있었던 소팔가자라는 아주 오래된 200년이 넘은 구교촌이 있어요.

팀을 꾸려 현수막을 만들어 가지고 갔죠.

중국 사람들은 빨간 천에다가 황금 글씨를 좋아해요.

딱 ‘김대건 신부 현양 추모회’라는 이름을 썼죠.

가서 보니 성당 마룻바닥은 다 무너져 그냥 흙바닥에서 앉아서 미사 드리는 거죠.

제의실에 들어가니까 여기 같은 제의가 어딨고 성작이 어딨어요.

이 빠진 사기그릇이 성작이고 성수통은 깡통 잘라 만든 것이었죠.

그 소팔가자 성당은 그냥 끝도 안 보이는 옥수수밭 한가운데 마을이 있어요.

마을 전체가 다 천주교 신자들이죠.

내가 차로 성당 마당에 들어가니 회장님이 깨진 종을 치니, 세상에!

그 넓은 옥수수밭에서 일하다 말고 신자들이 개미 꼬물꼬물 나오듯이 나오더니 성당 마당이 꽉 찬 거예요.

물론 거기는 애국교회 신자들도 있고, 공산당이 임명하는 신부들도 있죠.

하지만 정통 신자들은 그 신부들을 안 본단 말이야.

그런데 50년 만에 처음 진짜 신부가 온 거죠.

놀라운 것은 여기서 부제로 있던 김대건 신부님이 성인이 됐다는 걸 다 알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꽤 많은 분 이름이 대건이었어요.

그때 4일간 북경에서 온 회장님의 통역으로 50년 만에 처음으로 중국에서 중국 사람을 대상으로 피정을 했죠.

북경에서 온 교포인 조선족 회장님도 서울말을 100% 다 못 알아들어요.

예를 들어서 조선족 말 가운데 남편이라는 말이 없어요. 나그네라 하죠.

그러니 내가 예를 들어서 강의해도 회장님은 70%만 알아듣고 그것을 다시 중국말로 전하니, 실제는 50%밖에 전달이 안 돼요.

그런데 나머지 반은 성령이 함께해주시죠.

내가 얘기하다 보면 한참 만에 중국 신자들이 울기 시작해요. 알아들은 거예요.

또 정말 기쁜 이야기를 하면 막 박수치며 웃어요.

신기하다.

인간의 언어로 전달이 안 되더라도 성령의 언어가 저분들에게 전달되는구나.

떠나는 날 서로 붙들고 울면서 또 언제 오실 것이냐 하여 5년 안에 다시 오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약속대로 4년 지나서 갔어요.

세상에 갔더니 아기들, 요만한 애들 데리고 오더니 이 애들이 다 웅렬이래.

옛날에는 대건이가 많았는데 내가 가고 몇 년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다 웅렬이야.

애가 웅렬이라고 사진 좀 찍어달라고 안수 좀 해달라고 해요.

얼마나 순수한 신앙이에요.

지금은 그 웅열이들이 30 초반이겠네요.

‘참 이름이 중요하구나’하는 것을 내가 그때 느꼈어요.

그리고 아까 그 울산 공대 교수님 연구, 아무도 생각을 못 한 거잖아요.

혹시 교수님, 이 방송을 듣고 계시면 아들이 사제가 됐는지 안 됐는지만 연락을 주세요.

그러면 제 궁금증도 좀 풀리고 신자들한테도 결과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 제가 미사 시작하면서 ‘이 미사에 초대받은 이’라 했죠?

엄밀히 따지면 이곳은 원로 사제가 머무는 개인 사저가 아닙니다.

개인 사저라면 이렇게 큰 집을 있을 필요가 없죠.

전 세계에서 성인 유해가 제일 많이 모셔져 있는데 이 다락방에 63분의 성인들이 여러분을 쳐다보고 계세요.

그리고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 나무 조각, 보목 두 점이 저 위에 계시에요.

내 서재에는 23분의 성인 유해와 제일 큰 십자가 나무 조각이 또 계십니다.

이따 그 십자가 보목으로 뺨에 친구 해드릴 겁니다.

여러분이 여기 오기까지 신청하고 기다리고 차 없는 사람은 남의 차 얻어타는 등, 기름 태우고 여기까지 왔겠지만

제일 중요한 포인트는 여러분이 온 게 아니라 하느님이 선택해서 부르셔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성경에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이 예수님 만나러 왔었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치유해주지 않고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했죠.

이건 두 번 죽으라는 얘기죠.

산에서 나병환자가 사람들 있는 곳에 내려온 것도 목숨을 걸고 내려온 거죠.

유대인 법에는 나환자를 돌로 쳐 죽여도 살인죄가 안 되었죠.

문둥이들은 산에서만 살아야 했고 만일 산길에서 성한 사람을 만나면 ‘나 문둥이요. 피하시오’ 외쳐야 했죠.

죽을 각오로 예수님을 만나러 왔는데 세상에, 저 양반이 그날따라 쫓아가서 치유해주지 않고,

차갑게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거기 왔던 사람들이 괜히 왔다고 불평합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이 저분이 시키는 대로 사제가 있는 데는 가자고 합니다.

동네 한가운데 가다 보면 사람을 만나야 하고 돌이 날아올 게 뻔했죠.

우리 죽어도 같이 죽자 팔꿈치를 팔을 끼고 10명이 사제관을 향해 갑니다.

발가락이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절뚝거리면 가는 중 모두 치유가 되었죠.

다시 말하면 여러분들이 집에서 이곳을 향해서 떠날 때부터 이미 치유는 시작이 된 거예요.

그렇죠?

그리고 여기 왔는데 수많은 성인 성녀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으시죠.

제게 뼈 모으는 것이 취미냐고 물으시는 분도 있는데, 사십 년 동안 한 분 한 분 모두 소설처럼 제게 오신 거예요.

해외에서 피정하는데 어느 수도원장이 자기 수도원은 이제 지원자가 없어 문을 닫아야 하는데,

수백 년 동안 모시고 있던 성인 유해를 순교자의 나라에서 오신 한국 신부님께 봉헌하고 싶다,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85분의 성인 유해가 여기 머물러 계십니다.

성인들의 전구와 선택으로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 앉혔다면 분명히 하실 말씀, 주실 선물이 있는 거예요.

하실 말은 사제의 입을 통해서 하실 거예요.

그리고 주시는 선물은 치유의 은혜예요.

그리고 어둠이 내 안에 들어와 있다면 그 어둠을 가지고 나를 장난하는 마귀를 쫓아내는 구마의 은혜가 내려올 거예요.

조금 더 의심치 말고 믿어야죠. 믿어야 해요.

여러분들은 소풍 온 게 아니잖아요.

정말 어렵게 어렵게 오늘 이 자리까지 와서 영상으로만 보던, 음성으로만 듣던 신부님과 함께 미사 하잖아요.

이것은 선택받은 사람들이에요.

내가 천주교 신자 된 것 자체도 하느님의 선택에 의해 됐다는 믿음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는다면 하느님과 멀어질 수가 없어요.

나 같은 무지렁이를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천주교 신자로,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 내려온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의 자식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 거룩한 부르심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산다면 어떻게 냉담할 수 있겠습니까? 냉담할 수 없어요.

우리는 많은 경우에 내가 선택해서 천주교 신자가 됐다고 착각하니, 살아보니 보기 싫은 인간도 있고 보기 싫은 신부도 많아,

그러면 나 다른 교회에 갈래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에요.

내가 선택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렇죠.

주님이 나를 부르셨잖아요?

여러분은 태어나 일주일 안에 세례받은 구교 신자일 수도, 시집갔더니 천주교 집안이라 신자가 되었을 수도,

친구 따라 신자가 된 경우도 있죠.

세례받은 동기는 똑같은 사람이 거의 없어요.

하지만 어떤 동기든지 간에 그것은 하느님이 선택했다는 얘기죠.

하느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선택하세요.

세례 때도 선택하셨고, 내가 정말 자살하려고 마음먹을 때도 나를 선택하여 일으켜 세우셨고, 오늘 이 자리에도 불러주셨죠.

선택받은 자들은 책임, 분명히 거룩한 의무가 있어 함부로 살면 안 돼요.

저도 사제로 선택받아 제단 앞에 산 지 신학교까지 합치면 50년이에요.

그 거룩한 부르심 때문에 죽을힘을 다해서 비록 은퇴했지만, 똑같이 사목하고 있는 거예요.

사제는 사제대로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살아야 하고, 수녀들은 수녀들대로,

평신도는 평신도대로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부활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사실 오늘 여러분들 피정시키려고 이렇게 다섯 장 원고를 준비해 왔지만, 오늘 이 이야기는 안 하려 해요.

지금 나온 얘기도 아까 이름서부터 시작해서 그냥 성령이 이끄시는 얘기예요.

 

한 가지 얘기만 더 하고 끝을 내려고 합니다.

우리 교구의 나보다 8년 선배 은퇴 신부님이 계세요.

그러니까 이제 80이 다 된 분이죠.

그분도 아파트에서 혼자 사시면서 혼자 밥을 해 먹고 살아요.

홀아비 사정은 누가 안다고 저녁에 제가 가끔 인사를 드려요.

‘형님 저녁 잡으셨어요? 그래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도우미 쓰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청주는 사람이라도 있지,

난 시골이라 올 사람이 없어요.’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 지난주 자비 주일에 일어난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신부님은 감곡 출신인데, 감곡은 동네 전체가 다 천주교 신자잖아요?

감곡 초등학교, 예전 매괴 초등학교 아이들도 다 천주교 신자였죠.

그래서 그 신부님 동창들도 다 신자예요.

그 신부님은 칠십 년대에 군대 생활을 했대요.

신학교를 다니다 군대 갔는데, 옛날에는 휴가를 오더라도 반드시 군복을 입고 다녀야 했죠.

그래서 휴가 때 군복 입고 미사 왔대요.

그런데 재미난 것이 지난 주일 감곡 이씨가문에서 신부님께 미사를 청했대요.

오십 명 정도 천주교 신자들이 모였는데, 그중 초등학교 친구가 한 명 있더래요.

조그마해서 별명이 꼬마였대요.

이 신부님은 재미있으시어, 초등, 중등, 고등학교 동창회를 한 번도 안 빠져본 분이세요.

신부들이 그것이 쉽지 않아요.

그런데 이씨 집안의 그 동창은 두 번밖에 못 본, 잘 안 나오는 사람이었죠.

그런 그 동창 친구가 그날 미사 끝나고 밥을 먹고 있는데 옆에 바짝 앉더니 고백할 것이 있다 하더래요.

고백성사냐 물으니 고백성사는 아니고, 이것으로 고백성사를 백번은 보았는데도

신부님과 관련된 일이라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하더래요.

이야기해보라 했더니, 1970년 군대에서 휴가 나왔대요.

부대는 달랐어도 같은 시기에 휴가를 받아 주일날 미사 드리러 감곡성당에 간 거죠.

감곡은 바닥이 마루라 지금도 양옆 신발장에 신발 벗고 들어가죠.

동창분은 휴가 나와 두 번째 날 어느 술집에서 워커를 잃어버렸대요.

그래서 운동화를 신고 미사를 갔는데, 딱 보니까 워커가 하나 있더래요.

그게 누구 거예요? 그래요. S 신부

그래서 미사 시간 머릿속엔 저 워커를 훔쳐 가야겠다만 생각했죠.

왜냐하면 운동화 신고 자대 복귀하면 헌병한테 걸려 맞아 죽게 생겼거든.

그런데 딱 보니 군복 입은 사람은 본인과 초등학교 고등학교 친구로 신학생으로 있는 S 신학생뿐이었죠.

자기는 헌금 내자마자 바로 나왔대요.

그냥 군화를 신고 운동화를 놓고 갔대요.

S 신학생은 운동화 신고 복귀하다 검문소마다 걸려 얻어맞았죠.

그러나 누가 자기 워커를 가지고 갔는지 모르죠.

하지만 훔친 당사자는 알고 있잖아요.

한 백번은 성사를 봐도 마음이 편치 않고, 두 번 동창회에 나온 것도 그 이야기하러 나왔는데 막상 보면 말이 안 나오더래요.

무섭고 두려워서.

그러나 이제 80을 2년 남겨놓고 70년도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를 용서해 달라고.

‘야 임마, 난 기억도 안 나.’

‘아무튼 오늘 내가 너한테 용서를 받아야만 언제 죽더라도 편하게 죽겠다.’

그래서 ‘용서할게’ 하며 손을 잡아줬대요.

그랬더니 너무 좋아서 막 춤추더래요.

그리고 술은 입에도 안 대던 사람이

‘우리 가족들 들었죠. 내가 그 죄 때문에 이렇게 살았는데, 내가 오늘 신부님이랑 술 한잔해야겠소.’

나중에 전화도 왔는데, 자기는 50년 만에 하늘을 쳐다봤다 하더래요.

신학생 군화를 훔쳐 갔으니 얼마나 나 대신 매를 많이 맞았을까 하는 생각에 너무 두려웠대요.

 

내가 전화로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형님 이건 드라마틱한 얘기다. 이거 나 얘기해도 돼?’ 하니

‘고백성사 아닌데 해도 돼.’ 하셨어요.

그런데 사실 오늘 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다음 주 부산 성령대회 때 하려 했죠.

이것도 성령이 시킨 거죠.

 

이것이 부활이 아닌가.

오늘 여러분들 부활시키려고 부르신 거예요.

또 이 강론을 듣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부활하셔야죠.

내가 사순절 기간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한 얘기가 뭡니까?

‘예수님 부활하려고 사순절이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부활하려고 사순절이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사순절 동안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활시키려고 무던히도 애쓰실 거다. 그러니 마음을 열어라.’

그 선배 신부님이 자기는 그 친구가 하는 이야기 듣고 많이 부활했대요.

친구 손을 잡고 그랬대요.

‘친구야, 나도 신학생이었지만 사실 군대에서 많이 훔쳤어. 자고 일어나 보면 숟가락이 없어졌어.

그러면 또 딴 놈 것 훔쳐야지 어떡하냐.’

 

제가 군종 신부할 때 우리 신자 애들이 제일 힘들어하는 것이 그것이었어요.

자다 보면 모자가 없어졌대요.

훈련소에서 모자를 언제 훔쳐 가는가 하면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 훔쳐 가요.

훈련소 화장실은 위가 뚫어져 있어 응가하고 있는 애 것 뺏어가요.

그리고 숟가락도 목에다 걸고 자는데 끊어가요.

그러면 신부님, 어떻게 해야 해요 물어요.

‘훔쳐라’ 그랬어요.

‘고백성사 안 봐도 돼요?’

‘그건 안 봐도 돼. 왜? 군대 내에서는 자리 이동이야.’

그때 얘네들 마음이 얼마나 편안해지는지.

 

S 신부님이 동창 손을 잡고 그랬대요.

‘네가 나보다 훨씬 더 마음이 깨끗한 것 같아. 나는 군대에서 많이 훔쳤지만 별로 죄의식을 못 느꼈어.

그런데 너는 내 군화 하나 훔친 것으로 오십몇 년을 이렇게 힘들게 살지 않았니?

넌 나보다 훨씬 더 맑은 영혼의 소유자다. 내가 오늘 너한테 정말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헤어졌다는 거야.

 

이렇게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부활시켜주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부활 아니겠습니까?

오늘 여러분들 정말 영과 육이 부활해서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2023년 부활 제3주일 (4/23)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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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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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05.11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창수선화 | 작성시간 23.05.12 아멘! 감사합니다 ~❤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3.05.14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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