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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 신부 강론

[2023년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사제 수품 40주년 기념 미사] 사제 수품 40년 소회

작성자하늘호수♡마리아|작성시간23.05.21|조회수271 목록 댓글 4

+찬미 예수님

먼저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또 교인분들께 감사드리고, 오늘 이렇게 음성성당 쓰게 허락해 준 이경호 베드로 신부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은경축’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감곡에서 2008년에, 벌써 15년이 다 지났구나.

그런 얘기 있죠? 60이 넘어가면 내리막에 가속이 붙는다.

사제 생활은 그런 것 같아요. 뭐 하다 보면 일 년이 지나가죠.

이제 10년 지나면 금경축인데, 아까 엄마를 쳐다보면서 ‘그때까지 엄마가 살아계신다면 백 살이 넘어가실 텐데.’

엄마, 자신 있으시죠? 대답해 주세요.

운명에 맡기신대요.

그래도 같은 연세에 비하면 참 건강하시고, 아직 70도 안 되어 보이는 느낌입니다.

이따 한번 구경하세요.

주름살이 없으신데, 우리 집안 내력이 좀 그런 것 같아요.

우리 대열이 신부도 동안인데 일본에서 찌들어왔어요.

워낙 고생이 많아서 머리카락도 빠지고.

 

40년을 뒤돌아보면서, 저는 40년 그전이 자꾸 생각이 나요.

왜냐면 사제 생활 40년보다도 그전 신학생 때 10년이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저는 꼬마 때부터 신부가 되어야겠다 했던 것은 아니었거든요.

저는 인천에서 잘 놀던 사람이었어요. 운동도 했고요.

오죽하면 내가 신부 되고 10년경쯤 중학교 동창회 한다고 회장에게 전화가 왔는데,

제가 신부 된 것을 아무도 안 믿으니 올 수는 없겠지만 신부복 입은 사진 하나 찍어 보내달래요.

그것 가지고 동창회 가서 알리겠대요.

그럴 정도로 사제에 대해서는 전혀 내 세상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높은 데서 떨어지셔서 시체로 변한 아버지를 끌어안고 생전 처음 기도라는 걸 해봤죠.

하느님 당신이 정말 계신다면우리 아버지 살려내면 신부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입방정이지. 아니 착한 사람 되겠다던가, 성당에 잘 나가겠다는 것도 있는데.

정말 꿈조차 꾸어보지 않은 사제가 되겠다는 말이 왜 튀어나왔을까?

아까 대열이 신부님이 섭리라 했죠?

그때 벌써 제가 낚인 겁니다.

사실 저는 그때 장남이다 보니 내가 성당 안 나가면 동생들도 안 나갈 것 같아서 그냥 부모님 따라 나갔을 뿐이었죠.

또 그때는 제가 살던 인천에 미국 신부님들이 참 많았어요.

그런데 어쩌면 다 그레고리 펙처럼 잘 생겼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혼자서 살다니, 분명 고자거나 문제가 있을 거다.

아니 좋은 세상 장가가서 애 낳고 잘 살아야지 혼자 살까?

이런 저였기에 내가 신부가 된다는 것은 생각한 적도 없었죠.

그런데 아버지가 살아나셨거든요.

시체로 변했던 아버지가, 숨이 끊어졌던 아버지가 15분 만에 살아나셨어요.

그 약속을 했잖아요.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가 다르다 하지만, 저는 그런 성격이 못 돼요.

약속은 지켜야 해요.

하느님이 눈에 안 보여도 일단 인격적인 하느님을 내가 만났단 말입니다.

만수동 그 시골구석에서 자기 아버지 시신 붙들고 살려달라고 했더니그 목소리를 저분이 들으신 거예요저 꼭대기에서.

우리를 물건 취급하지 않는구나. 인격적인 하느님이구나.

어린애가 하느님께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했을 때 그 소리를 들으셨구나.

사람은 하느님을 체험하기까지 망설여지지, 하느님을 체험하고 난 다음에는 다 포기할 수 있어요.

 

아무튼 그래서 어렵게 신학교에 들어갔죠.

또 아까 대열이 신부가 자기도 신학교에서 고비가 있었다 했지만, 큰형이 신학교에서 짐을 4번 쌀 뻔한 것은 모를 거예요.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어서 아마 우리 엄마도 모르실 겁니다.

너무 힘들었어요.

야생마처럼 뛰놀던 사람이 울타리 안 조직에서 살려니 미치겠더군요,

첫날부터 집에 가고 싶었어요.

게다가 중간에 누가 우리 아버지를 험담하는 투서를 신학교에 했어요.

그래서 학장 신부님이 나가라는거예요.

그런데 우리 아버지와 아주 친한 교수 신부님이 계셨는데, ‘이분은 그럴 분이 아니다. 내가 이분 인격을 보장한다.’

하시어 간신히 쫓겨날 뻔하다 멈췄죠.

그리고 이렇게 부제품까지 받고 사제품이 남았는데, 서품 4시간 전에 보류가 된 거죠.

허리 디스크 때문에.

차라리 안 주려면 몇 개월 전에 알려주면 마음이라도 내가 편했을 텐데, 불과 4시간 전 새벽에 알려준 거죠.

그분이 돌아가신 정진석 추기경님, 청주교구 주교님이셨어요.

아마 주려고 생각하니 허리 병신 신부 만들어도 일 못 할 것 같으니 그러셨던 것 같아요.

아무튼 그래서 다른 동창들 셋은 83년 1월 26일 서품받았지만, 저는 동창 신부가 보좌신부로 있는 본당에 그 밑으로 가서 일했어요.

그때 제게 무슨 생각이 들었냐,

‘내 쪽에서 절대 포기 안 한다. 그리고 죽은 아버지로 살려준 하느님이 이 허리 정도야 못 고쳐주겠느냐’

그래서 김대건 신부님 유해 앞에서 3일간 철야기도하고 허리 디스크가 나았잖아요.

주치의가 증명해서 5월 14일, 마티아 축일에 수품을 받았죠.

마티아가 누굽니까? 유다스 대신 대타로 들어간 사람이죠.

5월 14일, 장미꽃 만발한 성모님 성월.

그러니 내가 눈물이 안 날 수가 없었지.

그날 밖에서 초를 들고 입장할 때 이를 악물었죠.

내가 진짜 몇 달 동안 독한 마음으로 견디고 살았는데 오늘은 웃을 거다.

그런데 입장 때부터 교우들이 울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바람에 나는 빵 터진 거죠. 끝나서 기념사진 찍을 때까지도.

지금도 카페에 들어가면 흐릿한 오래된 동영상이지만 보실 수 있어요.

눈이 퉁퉁 불 정도로 내가 운 이유를 아는 사람은 이게 다 알고 있었어요.

 

그렇게 신부가 되어 군종신부를 나갔죠.

그때부터 고생길이 열렸습니다.

어린 나이에 뭘 안다고 성당을 짓기 시작하면서 사기를 당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돈 떼이고.

저는 그때부터 업자들한테 맞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또 내가 수녀원 보내려 했던 간호장교가 그 당시 부대 상관한테 폭행 강간을 당해 살려달라고 찾아와서,

보안대와 싸우느라 목숨 걸었죠.

이런 정의감은 제 아버지한테 받았던 것 같아요.

‘신자를 살려야 된다.’

사실 저는 군대가 되게 재미있었지만, 군대가 저를 싫어해서 나가라 한 거예요.

워낙 군대에 말뚝 박으려고 했었죠.

이렇게 제대하고 나오니 주교님이 정권 바뀔 때까지 외국에 가 있으라 하셨죠.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나갑니까? 차라리 꽃동네 가서 있겠다고 했어요.

오웅진 신부님과 1년 동안 환자들을 돌보았는데, 그때가 제일 행복했던 것 같아요.

미사 드리고, 환자들과 이야기하고, 봉사자들도 관리하고, 그렇게 해서 달콤했던 1년이 딱 지나고 미원성당으로 갔죠.

 

미원 성당에 가니까 옛날에 유명했던 미원물 생수가 성당 안에서 나왔던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물 개발한 사람과 신자들이랑, 미원물 때문에 성당이 반으로 쪼개져요.

그거 해결하다가 보니까 세월이 한 2년이 지나가면서 괴산성당에 갑니다.

우리 베드로 신부님이 괴산본당 출신입니다.

 

괴산이 괴산본당 가서도 이제 성당 정비를 했죠.

그때는 멀쩡한 인도 들어내고 새것을 깔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받아다 성당 마당에 깔고 하면서 성당을 예쁘게 만들어 보려 시작했죠.

그때 만난 여인 사이에서 이 아들(이경호 베드로 신부님)이 태어났죠.

 

그곳에 4년 있다 복대동에 갔어요.

주교님이 우리 6·25 때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통일 대성전을 만들어 보라 하셨죠.

‘가로세로 몇 미터, 프랑스에 있는 예수성심 대성당 같은 보속의 성당을 만들어다오’ 하셨죠.

저는 그때 주교님의 명령이 참사회를 통해 결정된 것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어요.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컸거든요. 세로 길이만 성당이 120m, 가로가 90m짜리 있어요.

우리나라는 낙태아도 많고 6.25에 많이 죽었죠.

프랑스에 있는 예수성심 대성당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것을 보속하는 마음으로 헌금해서 만든 성당인데,

주교님도 그런 성당을 갖고 싶었던 거예요.

그 사명이 나에게 떨어진 거죠.

기를 쓰고 다니면서 강론하고 후원자 모집하고, 그렇게 밑바닥 지하 성당을 먼저 만들었어요.

그러다 주교님이 서울 대교구장으로 이동을 하셨고, 이제는 내가 코너에 몰렸죠.

나는 주교님이 시켜서 한 것인데, 신부님들은 내 머릿속에서 나와 짓는 것으로 오해하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새 주교님이 되면서 더 짓지 못 하게 하더라고요.

이렇게 중지상태가 되니 지하의 철근이 썩어들어가기 시작했고, 주교님은 어떤 것도 신경 쓰지 말고 진천으로 가라 하시더군요.

결국 23억 정도 들여 지어놓은 복대동 지하 성전은 폭파하고 땅에 묻었죠.

처음에 저한테 교구청 사목국장 신부님이 와서,

주교님이 우리는 저것 올릴 능력이 안 되니 다시 폭파한다고 통보하고 오라 했다는 거예요.

저는 제가 그 안에 들어가 있을 테니 같이 폭파하라 했어요.

후원금이 23억인데 후원해주신 분들에게 땅에 묻었다고 어떻게 말을 하느냐, 신부 생활하지 말라는 거냐 그 전에 나를 죽이라 했죠.

제가 강하게 나가니 2년 동안은 철거를 못 하고, 주교님이 제 손을 잡고 ‘허락해’ 하시는 거예요.

주교님은 제 성격을 아시죠.

분명 폭파하면 같이 들어가 죽을 거라는 것을 알아요.

그렇게 제게 부탁하면서 자기도 지금 한 달째 설사한대요.

집은 썩어들어 가고 있고 우리 교구는 감당할 능력도 없고.

그때도 내가 또 얘기했죠. 다시 보내달라고.

그건 안 된대요.

그래서 ‘주교님, 저 신부 생활하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20억 후원한 분들을 어떻게 봐요?’

한 시간 동안 둘이 아무 말 안 하고 있다가 결국에는 ‘부수세요.’ 그랬어요.

그다음 날 철거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저는 진천에 와서 보따리를 쌌죠. 환속을 해야겠다.

그래서 감실에 앞에 앉아 ‘전 떠납니다.’ 하고 기도했죠.

그런데 누가 내 어깨를 살포시 잡는 거예요.

그곳 수녀님이 새벽마다 일찍 성체조배를 하시니, 내가 울고 있는 사정을 알고 위로해주신 것인 줄 알았어요.

잠시 후 뒤를 돌아보았는데 아무도 없었어요.

그리고 등을 다시 두드리며 내 귀에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내가 있잖아.’

그때 성모님이 등을 두드려주신 것 같아요.

‘그래,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 그다음의 역사는 하느님이 알아서 심판하실 거다.’

다시 집을 풀고 그때도 진천성당이 50주년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싹 다 바꿨죠.

그런데 그때 우리 아들 신부가 보좌신부로 왔어요.

원래 아버지 성당을 안 보내는 것이 전통인데 서품식에서 ‘이경호, 진천성당’ 하니 깜짝 놀랐죠.

그래서 일 년 동안 밤마다 테니스 열심히 치면서 치킨도 먹으며 재미났게 살았죠.

이렇게 진천성당 50주년이 눈앞에 다가오는데 갑자기 주교님이 호출해요.

 

그래서 갔더니 성당이 부도가 났대요.

아니, 회사가 부도났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어도 성당이 부도라니요?

그 내용은 다 아시죠?

처음에는 빚이 28억이 있대요.

저에게 갚으라고 하시는 것이야 하니, 그 얘기는 못 하시겠고 이자가 한 달에 1,600만 원씩 나오는데 이자만 막아주면

3년 지나면 사놓은 땅 오르면 그것 팔아 원금 갚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28억도  알고 보니, 여기저기서 나와 삼십억이 넘어간 거예요.

사채업자들은 돈 달라고 난리고 사무실에 가서 행패 부리죠.

아무튼 그것도 기적처럼 8개월 7일 만에 30억 원을 갚았어요.

 

그리고 복대동에 있을 때 또 새로운 여자를 만나 아들 둘을 만나요.

그래서 아들 둘을 같이 신학교를 보냈죠.

여기 양선규 신부랑 이제현 신부. 그런데 지금 우리 큰아들 말고는 아들들이 다 특수 사목을 해서 오늘 못 온 거예요.

내가 군대에 있을 때 보낸 사람까지 합치면 신학교 9명을 보냈어요.

9명 가운데 8명이 신부가 되었고 그 중 둘은 수사 사제, 9명 중 한 명은 아직 신학생이예요.

우리 교구에서는 6명을 보내 5명이 신부가 되고 한 명이 마지막 성당인 서운동 성당에서 신학교 가서 지금 4학년이지요.

그 신학생까지 신부가 되면 내가 교구에서 있는 동안 6명의 아들이 만들어진 거죠.

괴산에서 한 명, 복대동에서 두 명, 진천에서 한 명, 감곡에서 한 명, 그리고 서운동에서 보낸 신학생 한 명.

우리 이경호 신부가 올해 몇 년째라고요?

여러분 기도해 주세요. 아직 아들을 못 만들었어요.

20년 정도 되면 한두 사람은 추천서 써 주어야 해요.

그런데 지금은 애들이 없어요.

그전에는 우리 신부님들이 미사 끝나고 ‘얘, 신학교 가야지’, 혹은 아들 있으면 ‘하나는 신학교 보내세요’ 했죠.

그런데 지금은 독자뿐이 없어요. 어떻게 신학교를 보내라 해요.

그런 것을 보면 제가 다복한 거죠.

수녀원에 보낸 사람은 얼추 52명이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참 행복스러운 것은 딱 한 명 중간에 나갔어요. 그것도 허원하기 전에요.

나머지 51명은 아직까지 수녀 생활하고, 내가 보낸 아들 신부도 아직까지 사고 친 친구 하나 없죠.

참 큰 복이죠.

 

제가 아까 감곡까지 이야기했죠?

감곡에서 살만하니 이제 배티로 가라 해요.

배티가서 7년 동안 허허벌판을 아름다운 성지로 바꿨습니다.

사실 은퇴하고 배티 삼박골이라는 곳에 치유 센터를 짓고 거기서 살려고 했어요.

그때 또 주교님이 배티 급한 불 껐으니, 청주 시내에서 제일 오래된 성당, 서운동에 가라 했죠.

 

서운동 성당 주변에도 순교터가 다섯 군데 있는데 가서 정리 좀 해야겠대요.

그래서 4년 동안에 순교터 정비 다 하고, 또 청주시에서 제일 지저분하고 더럽던 성당을 깔끔하게 만들고 온 곳입니다.

 

지금 말은 이렇게 쉽게 했지만 지난 40년 동안 또 그전 신학생 생활까지 50여 년 동안은 하느님의 은혜, 하느님의 섭리죠.

그래서 제가 체험에서 우러나는 것이 제가 피정 때도 말씀드리는 것처럼,

이 김웅열 신부를 신학생 때부터 잡아주고 있는 세 가지 기둥이 있다 했죠.

이 김웅열 신부를 신학생 때부터 나를 잡아 잡아주고 있던 세 가지 기둥이 있다고 그랬어요.

혹시 기억하세요? 따라 해보세요.

첫 번째 주님은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두 번째는 주님은 나의 이 어려움을 반드시 해결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세 번째 주님은 나의 앞길 선하게 예비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저는 그 세 가지 기둥이것 놓치면 죽는다 생각하고 살았어요.

여러분들도 이 세 가지 기도를 붙들고 살라고 제가 피정 때 많이 강조한 것 기억나시죠?

이거 놓치면 우리 죽어요.

 

오늘 고등학교 동창 세 명이 왔는데, 박수 한 번 쳐주세요.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보면 신자들이 꽤 많은데 거의 다 냉담이야.

그런데 그중 제일 리더격인 세권이 친구가 이번 예비자 등록을 해서 베드로로 세례받아요.

아마 이제 쉬고 있는 친구들을 많이 끌어낼 사명을 받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베드로라는 이름도 그렇고, 베드로는 충분히 예쁘게 살기 때문에 아마 친구들이 영향을 많이 받을 것 같아요.

‘세권이가 천주교 신자로 다니고 있다.’

참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아요.

 

아무튼 오늘 여러분들 비도 그쳤나 모르겠지만 바람이 좀 불고 있는데 식사 맛있게 하세요.

여러분들 감사하고 사랑하고, 열심히 잘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3년 5월 성모 신심 미사 (5/6)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사제 수품 40년 소회

출처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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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3.05.22 아멘~감사합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05.22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계절 | 작성시간 23.05.22 감사합니다.
  • 작성자1만두 | 작성시간 24.02.04 신부님, 감사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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